최유가 공신 자손의 서용, 참리의 개정, 본영을 옮기는 일 등을 상언하다
전농 소윤(典農少尹) 최유(崔濡)가 상언(上言)하였다.
"함길도(咸吉道)는 우리 열성(列聖)께서 탄생하신 땅이고, 능실(陵室)이 계신 곳이며, 그 원래 수종(隨從)한 족파(族派) 및 삼공신(三功臣) 등이 태조(太祖)를 도와서 백전 백승(百戰百勝)하고 가문을 바꾸어 나라로 만들었으며, 태종(太宗)께서 즉위하시기에 이르러서는 시위 군사(侍衛軍士)에 본도의 자제(子弟)를 많이 임명하여 친군위(親軍衛)라 칭하여 녹(祿)을 주고, 전함(前銜)506) 은 별군(別軍)이라 칭하여 요(料)를 주었으며, 또 본궁(本宮)에는 가별치패(加別赤牌)507) 를 더하여 소속시켜 번상(番上)하여 시위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군사 및 조행(朝行)에 포열(布列)한 자가 무릇 수백 인이므로 민간의 이해(利害)가 곧 모두 문달(聞達)되었는데, 이제는 오진(五鎭)을 새로 설치하여 경중(京中)의 시위 군사로 하여금 죄다 방수(防戍)에 나아가게 하였으므로 경중에서 시위하는 자는 많지 않습니다. 청컨대 열성께서 대우하신 예에 따라 태조·태종·세종조(世宗朝)의 원래 수종한 족파 및 삼공신 등의 자손 중에서 문·무(文武)의 재간(才幹)이 있는 자로서 수백 인을 뽑아서 시위로 서용하소서.
또 도절제사(都節制使)의 영(營)은 예전에는 경성(鏡城)에 두었던 것을 근일에 옛 종성(鐘城)으로 옮기나, 길주(吉州) 이북 무산(茂山) 이남은 적이 들어오는 길이 하나뿐이 아니므로, 대장(大將)으로 중병(重兵)을 거느리고서 한 구석에 치우쳐 있게 하면 안을 비우고 밖을 채우는 것이니, 옳지 못합니다. 만약에 적의 중병이 북방의 한 구석에 있음을 알고서 동량북(東良北)508) 으로부터 빈틈을 타고 와 남으로 길주(吉州)의 서북동(西北洞)·사말동(斜末洞)을 향하고, 동으로 경성의 주온동(朱溫洞)·오촌동(梧村洞)·어유간동(魚游澗洞)·송동(松洞) 등지로 돌입(突入)하여 변을 일으킨다면, 누가 때 맞추어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진(五鎭)은 부강(富强)하므로 대소(大小)의 변장(邊將)이 각각 그 보(堡)를 지키더라도 넉넉히 적을 막을 만하며, 옛 종성도 변지(邊地)이므로 반드시 주장(主將)이 중병을 가지고서 항상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 내상(內廂)509) 의 인리(人吏)가 모두 경성·길주에 있으므로, 6, 7일 길을 식량을 지고 왕래하느라고 인마(人馬)가 모두 피곤하니, 장래가 염려됩니다. 또 옛 종성은 전토(田土)가 부족하고 어염해채(魚鹽海菜)의 이(利)도 없어서 영(營)에 속한 노비(奴婢)가 살아갈 수 없으나, 경성 사람은 농사를 그르쳤을지라도 양식을 매매(賣買)로 구하여 오히려 살 만합니다. 또 길주·부령(富寧)·경성은 둔전(屯田)에서 나는 것과 매년 봄·가을의 선세(船稅)와 어곽(魚藿)510) 과 염분(鹽分)511) 에서 나는 것을 모두 본영(本營)으로 날라다가 쓰는데, 경성에 있어서는 모두 부근이 되므로 나르기에 어려움이 없으나, 종성은 험하고 먼 길을 나르는 폐단이 작지 않습니다. 또 본영의 각색(各色) 차비인(差備人)512) 은 모두 부근 각진(各鎭)의 군민(軍民)으로 충정(充定)하였으므로 본진의 방어(防禦)를 돌보지 않고 식량을 싸 가지고 왕래하니, 또한 미편합니다. 더구나 여러 종족의 야인(野人)이 잇달아 왕래하니 어염(魚鹽)·미포(米布) 따위 물건을 장만하여 주기 어렵습니다. 또 봄·가을로 남도(南道)의 조전 군사(助戰軍士)를 징집하였을 때에는 영문(營門)의 병비(兵備)가 오히려 넉넉하여 볼 만하나, 그들을 방환(放還)하게 되면 수영 군사(隨營軍士)513) 가 외로와져서 성곽(城郭)이 빈 듯하므로, 야인이 자주 왕래하여 반드시 넘보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니, 이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경성은 북도(北道)의 각관(各官)·각진(各鎭)의 가운데에 있어서 적이 들어오는 길의 요충(要衝)에 해당하여 안팎이 서로 맞서므로, 국가에서 의논을 정하여, 부거(富居)로부터 여기에 영(營)을 옮겨, 매양 봄·가을에 주장(主將)이 군사를 이끌고 행영(行營)514) 으로 들어가 머물러서 방수(防戍)하기도 하고 여러 진(鎭)을 순행하기도 하여 수어(守禦)를 살피는 까닭에 적이 두려워서 복종하는데, 지금 별로 큰 해(害)가 없는데도 가벼이 구영(舊營)을 옮기니 백성이 큰 폐해를 받습니다. 신(臣)은 장성(長城)을 다 쌓은 뒤에 피차의 이해(利害)를 다시 의논하고 아직은 예전대로 경성에 영을 두어 두기를 바랍니다.
또 길주(吉州)의 서북 구자(西北口子) 동량북(東良北) 쪽으로는 적의 무리가 통행하여 예로부터 길이 되어 있는데, 근년 대소(大小)의 사신(使臣)이 그 실정을 몰라 방어도 소홀합니다. 이제 범찰(凡察)·동창(童倉)이 도망해 숨어서 도적이 되어 산천(山川)과 도로를 모르는 것이 없는데도 길주에는 성보(城堡)가 없으므로 창고(倉庫)와 이민(吏民)이 장차 표절(剽竊)515) 을 당할 것입니다. 그 부근 서북 구자에는 무산(茂山)의 예를 따라 만호(萬戶)를 차정(差定)하고 길주의 정군(正軍) 1백 50명과 잡색군(雜色軍) 3백 명을 주어 번을 나누어 방수(防戍)하소서. 또 길주는 곧 옛 삼해양(三海陽)으로 한 도(道)의 거진(巨鎭)인데, 지난 갑인년(甲寅年)516) 에 주치(州治)를 옮겼으나, 수재(水災)를 걱정하여 곧 영조(營造)하지 않았습니다. 빌건대 부세평(富世坪)의 성황봉(城隍峯) 남쪽으로 옮겨서 동북의 산성(山城)과 서남의 평성(坪城)을 이어 쌓아서 성황봉을 주산(主山)으로 삼으면, 앞에 큰 들이 있고 산천이 돌아 안아서, 만세의 거진(居鎭)이며 군문(軍門)이 엄숙할 것입니다. 또 지난 정사년(丁巳年)517) 에 도내(道內)로 입거(入居)할 향호(鄕戶)518) 를 초정(抄定)할 때에 그 중 도망하여 죄(罪)를 범한 하삼도(下三道)의 향리(鄕吏)를 모두 경성의 주촌(朱村) 이북의 새로 설치한 각참(各站)의 서리(胥吏)에 소속시켰습니다. 그 뒤로 죽을 죄인도 다 대사(大赦)를 입었는데, 홀로 이들만이 부형(父兄) 때문에 자손 제질(子孫弟姪)이 영구히 천역(賤役)이 되어 억울함을 펴지 못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10여 년 동안 천역에 복로(服勞)하여 이미 넉넉히 징계되었을 것이니, 빌건대 모두 방사(放赦)519) 하여 정군(正軍)으로 정하여 병액(兵額)을 보충(補充)하고, 도내의 각사(各司)의 노비(奴婢)를 참리(站吏)에 소속시키되, 만약 모자라면 하삼도(下三道)사로(斜路)520) 의 각역(各驛)의 살림이 넉넉한 역자(驛子)를 뽑아다가 입거(入居)하게 하소서."
병조(兵曹)에 명하여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자제 족파(子弟族派) 및 공신 자손(功臣子孫)의 서용(敍用)은 이미 입법(立法)하였고, 서북 구자 만호(西北口子萬戶)의 차정(差定)은 조완벽(趙完壁)의 진언(陳言)에 따라 마감(磨勘)하여 시행하였으며, 참리(站吏)의 개정(改定)은 천사(遷徙)가 지극히 중한 일이므로 가벼이 시행할 수 없습니다. 다만 경성(鏡城)의 본영(本營)을 예전대로 두는 가부(可否)는 일찍이 종성(鍾城) 백성이 폐해를 아룀에 따라 그 도(道)로 하여금 찾아가 알아보고서 회보(回報)하게 하였으며, 길주(吉州)를 부세평(富世坪)으로 옮기는 일은 다시 감사(監司)·병사(兵使)로 하여금 편한가의 여부를 잘 살펴서 아뢰게 한 뒤에 의의(擬議)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6책 383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부방(赴防) / 군사-관방(關防) / 호구-이동(移動) / 정론(政論) / 재정(財政)
- [註 506]전함(前銜) : 전직.
- [註 507]
가별치패(加別赤牌) : 향화(向化)한 여진 추장(酋長)의 ‘관하 백성(管下百姓)’으로써 편성된 패(牌). 가별치(加別赤)는 여진 추장들의 ‘관하 백성’들을 의미함.- [註 508]
동량북(東良北) : 무산(茂山)의 옛이름. 동량뒤라 부름.- [註 509]
내상(內廂) : 조선조 때 각도의 도절제사(道節制使)가 주재하여 있는 행영(行營)을 말함.- [註 510]
어곽(魚藿) : 해산물의 총칭.- [註 511]
염분(鹽分) : 염전.- [註 512]
차비인(差備人) : 특별한 사무를 분장(分掌)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하는 사람.- [註 513]
수영 군사(隨營軍士) : 각 군영(軍營)에 소속된 그 지방의 군사(軍士). 양계(兩界)에서는 이를 익속군(翼屬軍)이라 하였음.- [註 514]
행영(行營) : 조선조 때 도절제사가 있던 큰 진(鎭)의 영문(營門)을 말함.- [註 515]
표절(剽竊) : 노략질하여 훔침.- [註 516]
갑인년(甲寅年) : 1434 세종 16년.- [註 517]
정사년(丁巳年) : 1437 세종 19년.- [註 518]
○典農少尹崔濡上言: "咸吉道, 我列聖誕生之地, 陵室所在, 其原隨從族派及三功臣等, 佐太祖, 百戰百勝, 化家爲國。 及太宗卽位, 侍衛軍士, 多本道子弟見任, 則稱: ‘親軍衛’, 給祿, 前銜則稱: ‘別軍’, 給料, 又本宮屬加別赤牌, 番上侍衛。 於是軍士及布列朝行者, 凡數百人, 故民間利害, 卽皆上聞, 今則新設五鎭, 使京中侍衛軍士, 盡赴防戍, 故侍衛京中者, 不多。 乞依列聖待遇之禮, 太祖、太宗、世宗朝, 原隨從族派、三功臣等子孫內有文武才幹者擇數百人, 敍用侍衛。 又都節制之營, 舊置鏡城, 近移古鍾城, 然吉州以北, 茂山以南, 賊路非一, 以大將而領重兵, 偏居一隅, 虛內實外, 未可也。 若賊人知重兵在北方一隅, 從東良北, 乘虛而來, 南指吉州 西北洞、斜末洞, 東指鏡城 朱溫洞、吾村洞、魚游澗洞、松洞等處, 突入生變, 則誰能及期救援哉? 五鎭富强, 小、大邊將, 各守其堡, 猶足禦敵。 古鍾城亦是邊地, 不必主將持重兵常居也。 又內廂人吏, 皆在鏡城、吉州, 六、七日之程, 贏糧往來, 人馬俱困, 將來可慮。 又古鍾城田土, 不足亦無魚、鹽、海、菜之利, 營屬奴婢, 無以爲生, 鏡城之人, 則已雖失農, 乞糧買賣, 猶足以生。 又吉州、富寧、鏡城屯田所出及每年春秋船稅、魚藿、鹽盆所出, 竝輸本營而用之, 若在鏡城, 則皆爲附近, 轉輸無難, 鍾城則險阻遠路, 轉輸之弊, 不貲。 又本營各色差備人, 皆以附近各鎭軍民充定, 不顧本鎭防禦, 裹糧往來, 亦爲未便。 況諸種野人, 絡繹來往, 魚、鹽、米、布等物, 備給爲難。 又春秋徵聚南道助戰軍士之時, 則營門兵備, 猶足可觀, 及其放還, 則隨營軍士孤單, 城郭似空, 野人數數來往, 必生覬覦之心, 是不可不慮也。 又鏡城則在北道各官、各鎭之中, 當賊路要衝, 表裏相持, 故國家定議, 自富居移營于此, 每當春秋主將率兵, 入于行營, 或留而防戍, 或巡行諸鎭, 以察守禦, 故賊乃畏服, 今別無大害, 輕移舊營, 民受巨弊。 臣願畢築長城後, 更議彼此利害, 姑令仍舊, 置營于鏡城。 又自吉州西北口子, 指東良北, 賊徒通行, 自古成路, 近年大、小使臣, 未知其實, 防禦亦踈。 今凡察、童倉, 逃匿作賊, 山川道路, 無不知之, 而吉州無城堡, 故倉庫、吏民, 將爲剽竊。 其附近西北口子, 乞依茂山例, 差定萬戶, 給吉州正軍一百五十名、雜色軍三百名, 使之番戍。 又吉州, 卽古之三海陽, 一道巨鎭也, 去甲寅年間, 徙州治, 然畏水災, 不卽營造。 乞移于富世坪 城隍峯之南, 仍築東北山城、西南坪城, 以城隍峰爲主山, 則前有大野, 山川回抱, 萬世巨鎭, 軍門嚴肅矣。 又去丁巳年, 道內入居鄕戶抄定之時, 其逃亡犯罪下三道鄕吏, 皆屬于鏡城 朱村以北新設各站之吏。 是後死罪之人, 皆蒙大赦, 獨此輩, 以父兄之故, 而子、孫、弟、姪, 永爲賤役, 冤抑莫伸。 臣以謂, 十餘年服勞賤役, 旣足懲戒, 乞竝放赦, 定爲正軍, 以補兵額, 以道內各司奴婢, 屬站吏, 若不足, 則刷下三道斜路各驛富實驛子, 入居。" 命兵曹議之。 兵曹啓: "子弟族派及功臣子孫敍用, 則已曾立法; 西北口子萬戶差定, 則因趙完璧陳言, 磨勘施行; 站吏改定, 則遷徙至重, 不可輕易行之。 但鏡城本營, 仍舊可否, 則曾據鍾城人民陳弊, 令其道訪問回報; 移吉州于冨世坪, 則更令監司、兵使, 看審便否以啓, 後擬議。" 從之。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6책 383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부방(赴防) / 군사-관방(關防) / 호구-이동(移動) / 정론(政論) / 재정(財政)
- [註 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