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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실록 7권, 문종 1년 4월 14일 임오 3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정안종이 내원 불당을 옆의 혈로 옮길 것을 상언하다

전 부사정(副司正) 정안종(鄭安宗)이 상언(上言)하였다.

"신(臣)이 일찍이 역대 제가(歷代諸家)의 풍수론(風水論)을 보건대, 간혹 어지럽고 헛되어 떳떳하지 못한 것이 많으나, 오직 도선(道詵)389) 이 산을 답사(踏査)한 뜻은 제현(諸賢)의 가결(歌訣)390) 보다 특이하니, 그 도안(道眼)391) ·신술(神術)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대저 우리 나라의 산천(山川)은 백두산(白頭山)에서 비롯하여 대맥(大脈)이 나뉘어 나가 대세(大勢)가 활달하고, 찬지만엽(千枝萬葉)이 그로부터 어지러이 내려와서 천태만상(千態萬狀)으로 활[弓]처럼 당기고, 손톱처럼 뻗는 모양이 되어 종횡으로 내달아 그 사이에 음양(陰陽) 두 길의 산이 안팎으로 문호(門戶)를 겸제(鉗制)하니, 산형(山形)의 기색(氣色)과 산수(山水)의 성정(性情)과 더불어 저 운맥(運脈)의 성쇄(盛衰)와 산천(山川)의 지덕(地德)과 시운(時運)의 상당함을 전인(前人) 도선(道詵)이 철저하게 간파하고, 통달하게 알아서 때를 당하여 길흉(吉凶)이 나타나는 바를 바로 대어 놓고 가리키니, 앞으로 올 화복(禍福)이 미리 정해져 있음이 거짓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병오년392) ·임자년393) ·계축년394) 의 병화(兵禍) 같은 것이 어찌 거짓이었겠습니까? 이미 증험(證驗)한 신효(神效)395) 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땅을 살피고 맥(脈)을 살핀 현묘(玄妙)한 신술(神術)을 후세(後世)에 보였으니, 후인(後人)이 감히 경모(敬慕)하여 만에 하나도 자취를 쫓지 못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산천이 관계되는 바가 경(輕)하지 않다 하니 풍수(風水)의 맡은 바가 더욱 중합니다. 왜냐하면 현재(賢才)의 출입(出入)도 산천의 소치(所致)이며 물품(物品)의 흥쇠(興衰)도 산천의 소치입니다. 그런데 풍운뢰우(風雲雷雨)의 변화가 산천이 만드는 것이 아니겠으며, 군병(軍兵)이 움직이고 그치는 까닭이 어찌 산천이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것이 모두 산천에 관계되니 산천을 어찌 가벼이 보겠으며, 풍수를 어찌 소홀히 생각하겠습니까? 산천이 험하면 땅의 정기가 악(惡)하므로 도선(道詵)이 말하기를, ‘지맥(地脈)에 정력(靜力)이 없어서 동(動)함이 많으니, 정(靜)하면 비보(裨補)396) 하고, 동하면 양진(禳鎭)397) 한다.’ 하였습니다. 양진·비보하여 화기(和氣)를 순합(順合)함은 옛 신선(神仙)이 남긴 자취인데, 지금에 있어서는 풍수라는 것이 오직 무덤을 앉히고 집을 세우는 것만을 일삼을 뿐이고, 산천의 국맥(國脈)을 양진·비보하는 술법으로 쓰임을 듣지 못하니, 이는 성명(聖明)의 시대에 있어서의 흠결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엎드려 바라건대 우리 나라의 산천을 답사하여 이미 신술(神術)을 밝힌 도선《비밀서기(祕密書記)》 외에 산수(山水)의 논(論)과 양진의 술(術)이 남긴 자취를 모두 쫓아서 빠짐 없이 살펴 드러내어 음양(陰陽)을 이끌어 맞추어서 만세의 태평한 기틀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신이 근년에 남방에 물러가 산림(山林)에 엎드려 살다가, 이제 서울에 이르러 내원불당(內願佛堂)398) 을 보니 궁궐과 문소전(文昭殿) 뒤에 자리잡고 있으니, 그 불사(佛舍)를 지은 바가 나라를 위한 계책으로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唐)나라 일행(一行)이 지은 《경위령(京緯令)》에 이르기를, ‘사관(寺觀)399) 을 성 곁이나 성의 앞과 좌우에 세우는 것은 근심이 없으나, 성의 뒤에 세우는 것은 내려온 형세가 맥(脈)을 손상하므로 아주 이롭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불사가 혈(穴)로 들어오는 정맥(正脈)에 자리잡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神)이 앞에 있고, 불(佛)이 뒤에 있어 용(龍)을 다투고 주(主)를 다투는 것은 역대의 산가(山家)400) 도 또한 금기(禁忌)하던 것인데, 하물며 이는 한 곳에 아울러 자리잡고 있으니 옳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해와 달이 함께 운행할 수 없고, 추위와 더위가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은 도리가 각각 달라서 형세가 반드시 그렇게 되는 때문인데, 더구나 신도(神道)와 불도(佛道)는 다른데, 한 와혈(窩穴)에 함께 있는 것이 옳겠습니까? 신은 엎드려 바라건대 불사(佛舍)를 옆의 혈로 옮겨서, 각각 그 분수를 편안하게 하여 그 도리를 지키게 하였으면 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종묘(宗廟)는 인륜(人倫)의 대전(大典)이고, 궁궐은 국가의 중기(重器)이며, 노·불(老佛)의 도(道)는 그 유래가 멉니다. 천하의 일에는 반드시 그 요체(要諦)가 있으니, 경중 대소(輕重大小)와 완급 선후(緩急先後)를 성감(聖鑑)으로 재결(裁決)하소서."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6책 375면
  •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정론(政論) / 출판(出版)

  • [註 389]
    도선(道詵) : 신라 말의 유명한 중.
  • [註 390]
    가결(歌訣) : 말로써 예언함.
  • [註 391]
    도안(道眼) : 신통한 눈.
  • [註 392]
    병오년 : 1426 세종 8년.
  • [註 393]
    임자년 : 1432 세종 14년.
  • [註 394]
    계축년 : 1433 세종 15년.
  • [註 395]
    신효(神效) : 신비스러운 효험.
  • [註 396]
    비보(裨補) : 도와서 보충함.
  • [註 397]
    양진(禳鎭) : 기도하여 누름.
  • [註 398]
    내원불당(內願佛堂) : 나라의 운명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던 궁실 안의 불당(佛堂). 내불당.
  • [註 399]
    사관(寺觀) : 불교의 절과 도교의 사원.
  • [註 400]
    산가(山家) : 풍수가.

○前副司正鄭安宗上言:

"臣嘗觀歷代諸家風水之論, 間或紛紜, 詭詐不經者, 多矣。 惟道詵, 踏山之旨, 獨異於諸賢歌訣, 其道眼、神術, 豈可量哉? 夫我國山川, 原於白頭山, 大脈分散, 大勢磊磊落落, 千枝萬葉, 紛紛亂來, 萬狀千態, 張弓布爪, 縱橫奔馳, 其間陰陽兩路山, 鉗內外門戶, 山形氣色, 山水性情, 與夫運脈盛衰, 山川地德, 時運相當, 前人道詵, 徹看徹知, 當時吉凶所發, 觸面而指, 未來禍福, 預定不虛。 如丙午之火、壬子ㆍ癸丑之兵, 豈其虛哉? 已驗神效, 非一、二矣。 然其審地察脈, 玄妙神術, 用示後世, 後人敢不敬慕, 而追迹萬一乎? 臣聞 ‘山川所係, 匪輕’, 風水之任, 尤重。 何則? 賢才出入, 山川之致然, 品物興衰, 亦山川之致然。 風雲雷雨之變, 非山川之所爲歟? 軍兵動息之由, 豈非山(非)〔川〕 之所爲也? 世上云爲, 皆係乎山川, 則山川其可輕視乎? 風水其可慢易乎? 山川險, 則地精惡, 故曰: "地脈無靜力, 而多動, 靜則補之, 動則鎭之", 禳鎭裨補, 順合和氣, 古神仙之遺迹。 今也風水者, 唯事安墳立宅而已, 未聞山川國脈, 禳鎭裨補之術, 此非明時之欠事歟? 臣伏願, 我國山川踏驗, 已經神術, 道詵 《秘密書記》外, 山水之論, 禳鎭之術, 一從遺迹, 檢擧無遺, 導合陰陽, 以致萬世太平之基。 臣近年, 退居南方, 跧伏山林, 今到京, 觀內願佛堂, 坐於宮闕與文昭殿之後, 其所營佛舍, 爲國之計, 未知是否。 然 一行所撰《京緯令》云: "寺、觀置立城側、城前左右, 無防患; 城後, 來勢損脈, 極爲不利。" 然則今玆佛舍, 非坐於入穴正脈乎? 神前佛後, 爭龍爭主, 歷代山家, 猶且禁忌, 況是幷坐於一處, 可乎? 臣未知其可也。 何則? 日月不竝行, 寒暑不兩立, 所道各異, 勢必然也。 而況神、佛道別, 竝處一窩, 可乎? 臣伏願, 佛舍移於傍穴, 使之各安其分, 以守其道。 伏惟, 宗廟人倫之大典, 宮闕國家之重器, 老、佛之道, 其來邈矣。 天下之事, 必有其要, 輕重大小、緩急先後, 惟聖鑑裁之。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6책 375면
  •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정론(政論) / 출판(出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