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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실록 2권, 문종 즉위년 7월 15일 정사 1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직제학 박팽년이 신미 칭호의 부당함을 상소하자 승지와 함께 불공한 문구를 따지다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박팽년(朴彭年) 등이 상서하기를,

"신 등은 대간(臺諫)에서 신미(信眉)의 일을 논하여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을 듣고, 분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무릇 호(號)를 가하는 것은 존숭하기 때문입니다. 제왕의 공덕이 있으면 올리고, 장상(將相)이 공훈이 있으면 주는 것으로, 그 예가 대단히 성한 것입니다. 후세의 인주(人主)가 불법을 존숭하고 혹 망령되게 중에게 준 자가 있으나, 이것으로 말미암아 간흉 교활한 난신 적자의 무리가 남의 집과 나라를 패망시킨 것이 많습니다. 신미(信眉)는 간사한 중입니다. 일찍이 학당(學堂)에 입학하여 함부로 행동하고, 음란하고 방종하여 못하는 짓이 없으므로, 학도들이 사귀지 않고 무뢰한으로 지목하였습니다. 그 아비 김훈(金訓)이 죄를 입게 되자, 폐고(廢錮)517)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몰래 도망하여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 아비가 늙고 병든 몸으로 그의 속이고 유혹하는 말을 믿고 일찍이 술과 고기를 끊었다가, 하루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습니다. 때마침 여름으로 더운 날인데, 이 중이 그 아비에게 참회(懺悔)하고 백 번 절할 것을 권하여 마침내 이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만일 《춘추(春秋)》의 법으로 논하면 이것이 진실로 아비를 죽인 자입니다. 대개 이 중은 참을성이 많고, 사람을 쉽게 유혹하며, 밖으로는 맑고 깨끗한 듯이 꾸미고, 속으로 교활하고 속이는 것을 감추어, 연줄을 타서 이럭저럭하여 궁금(宮禁)에 통달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인군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치는 큰 간인(姦人)입니다. 만일 큰 간인이 아니면, 어찌 선왕을 속이고 전하를 혹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은 데에 이르겠습니까? 만일 이 거조가 선왕께서 나왔다고 한다면, 선왕이 이 중을 아신 것이 하루가 아닌데, 일찍이 이 의논을 내지 않으시었으니, 어찌 공의(公議)가 있는 일은 인주(人主)도 경솔히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어찌 감히 선왕도 경솔히 하지 못한 일을 단행하며 의심하지 않습니까? 비록 선왕이 이미 이 일을 하시었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공의(公議)로 고치는 것이 대효(大孝)가 되는 데에 해롭지 않습니다. 하물며 선왕이 감히 미처 하지 못한 것을 갑자기 호를 주어 그 책임을 선왕에 돌리는 것이 가합니까? 인주는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 것도 아껴야 하고, 우국 이세(祐國利世)란 칭호는 비록 장상(將相)과 대신(大臣)에게 주더라도 오히려 조정과 함께 의논하여 그 가부를 살핀 뒤에 주어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노간(老奸)이겠습니까? 그가 우국 이세(祐國利世)하지 못할 것은 사람마다 다 알 뿐만 아니라, 또한 전하께서도 스스로 믿으실 것입니다. 어째서 감히 무익한 일을 하여 만대의 웃음거리를 만드십니까? 하물며 전하께서는 새로 보위(寶位)에 올라서 안팎이 촉망(屬望)하고 있으니, 마땅히 하루하루를 삼가서 한 호령을 내고 시행하는 것을 모두 지극히 공정한 데서 나오기를 기약하여, 조종(祖宗)의 사업을 빛내고 키워야 하는데, 어째서 간사한 말에 빠지고 간사한 중에 유혹되어, 지극히 높은 칭호를 주어 그 도(道)를 고취(鼓吹)하십니까?

옛부터 인군이 처음에는 정대하여 말할 만한 것이 없으나, 재위한 지 오래 되어 가다듬는 정신이 조금 풀리면,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틈을 타서 끝을 마치지 못하는 이가 많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지 겨우 두어 달이 넘었고, 산릉(山陵)이 겨우 끝나고 정사를 하는 처음에 제일 먼저 이 일을 거행하여서, 시초가 이미 크게 바르지 못하니 그 끝이 어떠하겠습니까? 신민의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서 사라집니다. 이 칭호가 한 번 나오자 그 무리가 은총을 빙자하고 독수리처럼 떠벌리고 과장하여 못하는 짓이 없으며, 어리석은 백성들이 또한 존자(尊者)로 봉한 것을 보고 이것이 진짜 부처라 하고 미연히 쏠려 가니, 얼마 안 가서 이적(夷狄)의 금수(禽獸)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정(邪正)의 소장(消長)과 풍속의 이역(移易)과 국가 존망의 기틀이 모두 여기에 달려 있으니, 일에 무엇이 이보다 더 크기에 조금도 경동(警動)하고 반성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지금 북쪽 오랑캐가 충만하여 중원(中原)이 어지럽고, 서북의 야인(野人)이 일찍부터 우리에게 감정이 있으면 지금 이미 연결되었으니, 하루아침에 앞잡이가 되어 크게 침입하면, 그 변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바로 군사를 훈련하고, 병기를 가다듬고, 용도를 절약하고, 군량을 저축하기에 황황급급해야 하고, 다른 일을 할 여가가 없을 날인데, 어찌 한가히 편안하게 놀며 허무(虛無)에 뜻을 둘 때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확연(廓然)히 강한 결단을 돌이키어 간사한 자를 버리기를 의심하지 말고, 급히 내리신 명령을 거두시고, 먼 변방에 물리쳐 두어서 시초를 바루는 도를 삼가시고, 일국 신민의 여망에 부합하게 하소서."

하였다. 소(疏)가 올라오니,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상소 안에 말한 선왕을 속이고 전하를 미혹하게 하였다는 것은, 속인 것은 무슨 일이며, 미혹한 것은 또 무슨 일인가? 또 선왕을 속일 때에는 어째서 간하지 않고, 지금에야 이런 말을 하는가? 또 신미(信眉)가 아비를 죽였다는 말은 어디에서 들었는가? 이 무리를 불러서 딴 곳에 두고, 하나하나 추궁하여 물어서 아뢰어라."

하였다. 곧 불러 물으니, 박팽년(朴彭年)이 말하기를,

"이 중이 심히 간사합니다. 선왕으로 하여금 존숭하여 봉작(封爵)을 허락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선왕을 속인 것이요, 또 전하로 하여금 존숭하여 봉작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전하를 미혹한 것입니다. 선왕 때에는 비록 높이고 믿기는 하였으나 따로 봉숭(封崇)한 일이 없기 때문에, 일찍이 의논하여 아뢰지 않은 것이요, 전하에 이르러 첫 정사에 특별히 작호(爵號)를 주고 성대한 예를 거행하므로, 감히 천위(天威)를 무릅쓰고 아뢴 것입니다. 또 신미(信眉)의 아비 김훈(金訓)영동현(永同縣)에 살고 있었는데, 신미가 일찍이 김훈에게 권하여 술과 고기를 끊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김훈이 현령(縣令) 박여(朴旅)를 가서 보니, 박여가 말하기를, ‘늙은이는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는다.’ 하고 김훈에게 고기를 권하였습니다. 김훈이 먹고 돌아와서 신미에게 말하니, 신미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거의 부처가 다 되었는데, 오늘 고기를 먹었으니 일은 다 틀렸습니다. 청컨대 참회하여 부처님께 백 번 절하소서.’ 하니, 김훈이 믿고 참회례를 행하여 팔뚝을 태우며 백 번 절하였는데, 그로 말미암아 병을 얻어 죽었습니다. 신이 이 말을 춘추관(春秋館) 여러 관원에게 들은 지가 오랩니다. 이개(李塏)·양성지(梁誠之)·이예(李芮)·허조(許慥) 등의 말이 같았고, 이승소(李承召)·송처검(宋處儉)·서거정(徐居正)·서강(徐岡) 등의 말도 또한 특히 같습니다. 다만 이 말을 근일에 유성원(柳誠源)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또한 같았습니다. 다만 이 말은 김윤복(金閏福)에게서 들었습니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이 이것을 가지고 아뢰니, 임금이 여섯 승지(承旨)를 함원전(含元殿)에서 인견하고 소(疏) 중의 불공한 말을 일일이 지적하고, 또 우승지(右承旨) 정이한(鄭而漢)과 전명(傳命)하는 내시 김득상(金得祥)으로 하여금 이 소를 가지고 정부 당상(政府堂上)의 집에 가서 의논하여 오게 하였는데, 황보인(皇甫仁)이 의논하기를,

"소(疏)의 말 가운데 누(累)가 선왕에게 미친 것이 있어, 비록 불공한 데에 관계되었지만, 자고로 인신(人臣)이 감히 말하고 극진히 간하자면 박절(迫切)하지 아니할 수 없어 그러한 것이니, 비록 이보다 지나치더라도 또한 책할 것이 못됩니다. 하물며 간신(諫臣)의 벌을 논하는 것은 정치 체제에 어떠합니까?"

하였다. 나머지 여러 상신(相臣)의 의논도 대략 모두 같았다. 정이한 등이 돌아와 아뢰었다. 처음에 집현전(集賢殿)에서 상소하기를 의논할 때 직제학(直提學) 최항(崔恒)과 직전(直殿) 이석형(李石亨)·성 삼문(成三問) 등은 그 의논에 따르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6책 254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정론-정론(政論) / 인물(人物)

  • [註 517]
    폐고(廢錮) :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함.

○丁巳/集賢殿直提學朴彭年等上書曰:

臣等竊聞臺諫, 論信眉事, 未蒙兪允, 不勝憤激, 昧死上聞。 凡加號, 所以尊崇也。 帝王有功德, 則上之, 將相有動勞, 則賜之, 其禮莫盛焉。 後世人主, 尊崇佛法, 則或有妄加之僧者焉, 由是姦猾亂賊之徒, 敗人國家者多矣。 信眉姦僧也, 嘗赴學堂, 猖狂淫放, 無所不至, 學徒不齒, 目之爲無賴。 及其父之被罪也, 恥其廢錮, 潛逃薙髮。 其父老且病, 信其誑誘, 嘗斷酒肉, 一日飮酒啗肉。 時方暑月, 此僧勸其父, 懺悔百拜, 因之致死。 若論以《春秋》之法, 此誠弑父者也。 蓋此僧, 含忍有餘, 易以惑人, 外示淸淨, 內藏巧詐, 因緣展轉, 得達宮禁, 此誠欺君誤國之大姦也。 若非大姦, 安能欺先王, 而惑殿下, 至於如此乎? 儻曰, 此擧出於先王, 先王知此僧非一日, 未嘗發此議, 豈不以公議所在, 有非人主所可輕爲也? 今殿下, 何敢爲先王不輕爲之擧, 斷然行之不疑乎? 雖先王已爲此事, 殿下以公義改之, 固未害爲大孝? 況先王所不敢及焉者, 而遽號之, 以委諸王可乎? 人主愛一嚬一笑, 祐國利世之名, 雖加諸將相大臣, 猶當與朝廷共論, 以審其可否, 然後爲之, 況老姦耶? 其不能祐國利世也, 非獨人人所共知, 亦殿下所自信也。 何敢爲無益之事, 以取笑萬代哉? 況殿下新登寶位, 中外屬望, 當日愼一日, 發一號施一令, 皆期出於至公至正, 以光大祖宗之業, 乃何陷邪說惑姦僧, 極尊崇之稱, 以簧皷其道乎? 自古人君, 始雖正大, 無間可議, 及其在位日久, 勵精少弛, 則姦侫乘間, 不克終者多矣。 殿下卽位, 甫踰數月, 山陵纔畢, 爲政之初, 首擧此事, 始之已大不正矣, 其終何如? 臣庶之望, 於是缺矣。 此號一出, 其徒憑藉寵數, 鴟張夸大, 靡所不至, 愚民亦見封爲尊者, 曰此眞佛也, 靡然趨向, 幾何不爲夷狄禽獸之歸乎? 邪正之消長, 風俗之移易, 國家存亡之機, 括皆係焉, 事孰大於此者, 而漫不警省乎? 況今北虜充斥, 中原搶攘, 西北野人, 嘗有憾於我, 而今已連結, 一朝鄕道, 長驅而至, 則變將不測。 此正訓卒厲兵, 節用峙糧, 遑遑汲汲, 不暇他及之日。 豈優游宴安, 留意虛無之時也? 伏望殿下, 廓回剛斷, 去邪勿疑, 亟收成命, 斥置遠方, 以謹正始之道, 以副一國臣民之望。

疏上, 上謂承政院曰: "疏內云, 欺先王, 而惑殿下, 所以欺之者何事, 所以惑之者又何事歟? 且欺先王之時, 何不諫之, 而今乃有是言乎? 又信眉弑父之言, 從何而聞之歟? 召此輩置之別處, 逐一推問以啓。" 卽召問之, 朴彭年曰: "此僧甚姦也。 使先王尊崇, 而許以封爵, 是欺先王也, 又使殿下尊崇而封爵, 是惑殿下也。 在先王之時, 雖尊信, 而別無封崇之事, 故不曾論啓, 在殿下, 則於初政, 特賜爵號, 禮莫盛焉, 故敢冒天威以啓耳。 且信眉金訓, 居永同縣, 嘗勸禁斷酒肉。 一日往謁縣守朴旅, 言: ‘老者非肉不飽。’ 勸食肉。 啗之歸語, 曰: ‘父幾乎佛矣, 今日啗肉, 事去矣。 請須懺悔百拜。’ 信之, 行懺悔禮, 乃至燃臂百拜, 因而得疾致死。 臣聞此語於春秋館諸官, 久矣。 李塏梁誠之李芮許慥等辭同, 李承召宋處儉徐居正徐岡等所言, 大略亦同。 但聞此語於近日柳誠源所言, 亦同。 而但此語, 聞諸金閏福。" 都承旨李季甸, 將此具啓, 上引見六承旨于含元殿, 歷數疏語不恭。 又令右承旨鄭而漢, 及傳命內竪金得祥, 將此疏, 詣政府堂上第, 擬議而來。 皇甫仁議曰: "疏語間有累及先王, 雖涉不恭, 然自古人臣, 敢言極諫, 則出於迫切而然, 所言雖過於此, 亦不足責也。 況論罰諫臣, 於治體何如?" 自餘諸相論議, 大略皆同。 而漢等還啓。 初集賢殿議上疏, 直提學崔恒、直殿李石亨成三問等, 不從其議。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6책 254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정론-정론(政論)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