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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 4월 28일 신축 1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황보인·남지·김종서·정갑손 등이 중들이 대납하는 폐단을 아뢰다

좌의정(左議政) 황보인(皇甫仁)·우의정(右議政) 남지(南智)·우찬성(右贊成) 김종서(金宗瑞)·우참찬(右參贊) 정갑손(鄭甲孫)이 아뢰기를,

"전일에 신(臣) 등이 충청도(忠淸道)녹전(祿轉)290) 남은 쌀 1천 80여 석(石)을 마땅히 진관사(津寬寺)간사승(幹事僧)291) 에게 주어 절을 조성(造成)하는 비용으로 삼고 금년에 각도의 초둔(草芚)을 대납(代納)하는 폐단을 없애게 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는데, 다시 의논하여 아뢰도록 전지(傳旨)하였으니, 신(臣) 등은 황송하게도 임금의 보살핌을 번거롭게 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를 다 진술하여 숨김이 없은 후에야 마음이 서로 통하게 될 것입니다. 대저 진관사(津寬寺)의 수륙사(水陸社)를 짓는 것은 곧 세종(世宗)께서 조종(祖宗)을 위한 일이었으므로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 수용(需用)되는 비용을 이에 간사승(幹事僧)이 전라도(全羅道)·황해도(黃海道) 등의 초둔(草芚)을 대납(代納)하고 그 대가(代價)를 거두어 쓰게 한 것은 실제 국가에 폐해가 없도록 하고자 한 것인데, 지금 듣건대 간사승(幹事僧)이 바로 각 고을에 도착하여 여리(閭里)에 거리낌없이 다니면서 갑절이나 되는 수량을 받고 있다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남은 쌀 1천 80여 석(石)을 진관사(津寬寺)에 주고, 만약 모자란다면 작년에 대납(代納)한 것의 미수(未收)된 대가(代價)가 있는 고을에 명령하여 거두어서 진관사(津寬寺)에 주도록 하고, 그래도 모자란다면 국고미(國庫米)로써 방패(防牌)292) 를 사역(使役)하여 절을 짓게 한다면 거의 세종(世宗)께서 조종(祖宗)을 위하시는 뜻을 실추(失墜)시키지 않으며 백성들도 원망하지 아니하여 일이 쉽사리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중들의 대납(代納)을 금지하더라도 잡인(雜人)들이 몰래 숨어서 청탁하여 대납(代納)하게 되니 그 폐단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다같이 이것을 대납(代納)할 경우라면 공처(公處)로 하여금 대납하게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또 오늘 아침에 정분(鄭苯)의 말을 들으니, 또한 내 뜻과 의견이 멀지 않다."

하였다. 김종서(金宗瑞)가 다시 아뢰기를,

"중들의 대납(代納)하는 폐단이 이보다 더 심함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의 말에 ‘차라리 자기의 재물이 없어질지라도 백성의 재력(財力)은 차마 손상(損傷)시킬 수 없다.’ 하였는데, 지금 각 고을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대납(代納)에 시달려서 원망을 감당하지 못하니, 다만 지둔(紙芚)뿐만 아니라 유밀(油蜜) 등의 잡공(雜貢)까지도 모두 대납하게 되므로 유밀(油蜜) 1두(斗)에 쌀 1백 두까지 징수하게 됩니다. 그외의 잡승(雜僧)들도 진관사(津寬寺)의 간사승(幹事僧)이라고 거짓 일컫고는 세력에 의지하여 협잡(挾雜)을 시행하는 자가 자주 있게 됩니다. 지금 진관사(津寬寺)의 역사(役事)는 선왕(先王)의 유지(遺志)이므로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산릉(山陵)의 역사(役事)가 이미 끝나면 방패(防牌)가 할 일이 없을 것이니, 비록 이들을 사역하더라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울의 성(城)이 무너진 곳이 매우 많고 경복궁(景福宮)도 또한 수즙(修葺)할 곳이 있으며,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집 밖에 난간과 담을 축조(築造)하라는 유교(遺敎)가 있는데, 어찌 방패(防牌)가 하는 일이 없다고 해서 진관사(津寬寺)에 사역할 수가 있겠는가? 또 어찌 유독 중들의 대납(代納)만이 폐해가 있고 다른 사람의 대납은 폐해가 없겠는가?"

하였다, 여러 사람이 아뢰기를,

"대납(代納)은 법 밖의 일이니, 사람마다 법을 두려워한다면 능히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중들은 대납하라는 명령을 빙자하고서 바로 각 고을에 도착하여 온갖 방법으로 폐를 끼치게 되니, 달리 법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비교가 안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이 두세 번 이를 말하고 있지마는, 나는 그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겠다. 내 뜻으로는 비록 중들로 하여금 대납(代納)하게 하더라도, 그 고을에 명령하여 수합(收合)하여 중에게 준다면 폐해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각 고을 수령(守令)들이 중이 대납(代納)한 초둔(草芚)을 대납(代納)한 값을 거두어 주는 데 시일이 늦었다고 하여 좌죄(坐罪)되어 파출(罷黜)된 후로부터 간사승(幹事僧) 각돈(覺頓)의 무리가 스스로 좋은 수가 났다고 여겨 팔뚝을 걷고 기세(氣勢)를 올리고 그 무리들이 역마(驛馬)를 타고 주군(州郡)에 거리낌없이 다니면서 수령(守令)들을 능멸하니, 수령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감히 그들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민가집에서 징수를 독촉하여 값어치[價値]를 묻지도 않고 한결같이 중들의 하는 대로 들어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6책 232면
  • 【분류】
    재정-공물(貢物)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사상-불교(佛敎) / 정론-정론(政論)

  • [註 290]
    녹전(祿轉) : 봉록으로 주는 것.
  • [註 291]
    간사승(幹事僧) : 일을 맡아 보던 중.
  • [註 292]
    방패(防牌) : 조선조 때 중앙에서 시위(侍衛)를 맡아 보던 군대. 주로 방패를 가지고 적의 공격을 막는 임무를 가졌음. 3대 태종(太宗) 15년(1415)에 종래의 육십(六十), 즉 위(尉)를 개칭한 대장(隊長)과 정(正)을 개정한 대부(隊副)를 모아 방패를 주어 특별히 조직한 군대임.

○辛丑/左議政皇甫仁、右議政南智、右贊成金宗瑞、右參贊鄭甲孫啓曰: "前日臣等啓請, 忠淸道祿轉剩米, 一千八十餘石, 合與津寬寺幹事僧, 以爲造成之費, 除今年各道草芚代納之弊, 傳旨更議以啓, 臣等嘵嘵, 恐煩聖鑑。 然臣之所懷, 悉陳無隱, 然後情志交孚矣。 夫津寬水陸社造成, 乃世宗爲祖宗之事, 不可廢也。 其所需之費, 乃以幹事僧, 代納全羅黃海等道草芚, 收其價而用之, 實欲無弊於國家, 今聞幹事僧徒, 直到各官, 橫行閭里, 倍數徵納, 其弊不貲。 今剩米一千八十餘石, 給與津寬, 若不足, 則去年代納未收之價, 令所在官, 收而給之, 又不足, 則加以國庫米, 役防牌造成, 庶幾不墜世宗爲祖宗之意, 而民不怨咨, 事易成矣。" 上曰: "雖禁僧人代納, 雜人潛隱, 請托代納, 其弊亦然。 等是代納, 令公處代納, 無乃可乎? 且今朝, 聞鄭苯之言, 亦與予意不遠。" 宗瑞更啓曰: "僧徒代納之弊, 有甚於此。 古人云: ‘寧亡己之財, 不忍傷民之力。’ 今各官居民, 苦於代納, 不勝怨咨。 非獨紙芚而已, 油蜜雜貢, 竝皆代納, 乃至油蜜一斗, 徵米百斗。 其他雜僧, 假稱津寬幹事, 依勢售姦者, 比比有之。 今津寬之役, 先王之遺意, 不得已也。 山陵之役旣訖, 則防牌無事矣, 雖使之何害?" 上曰: "京城頹毁處頗多, 景福宮亦有修葺處, 永膺家外欄垣造築, 遺敎在焉, 豈可謂防牌無事而役於津寬? 且何獨僧徒代納有弊, 而他人則無弊乎?" 僉曰: "代納法外事也, 人人畏法, 不能肆也。 至於僧徒, 則憑藉代納之令, 直到各官, 作弊多端, 非他畏法之人比也。" 上曰: "卿等再三言之, 予不能詳知其意。 予意以謂, 雖使代納, 令其官收合給之, 則無弊矣。" 自各官守令, 坐代納芚價收給稽緩, 罷黜後, 幹事僧覺頓之輩, 自謂得計, 扼腕增氣, 其徒乘傳, 橫行州郡, 淩蔑守令。 守令莫不畏脅, 無敢忤其旨意, 徵督閭閻, 不問價直, 一聽僧之所爲。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6책 232면
  • 【분류】
    재정-공물(貢物)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사상-불교(佛敎)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