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조 판서 정인지가 남씨의 상복 문제를 다시 아뢰자 이를 의정부에 의논하게 하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정인지(鄭麟趾)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남경우(南景佑)의 딸이 담양군(潭陽君)의 상복(喪服)을 입는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비록 이미 정한 날이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고제(古制)와 《가례(家禮)》를 상고해 본다면 혼인을 의정(議定)한 후에 납채(納采)를 하고 납채(納采)한 후에 납폐(納幣)를 하고, 또 청기(請期)158) 의 절차가 있고, 그 후에 친영(親迎)의 예절을 행하게 되니, 《예기(禮記)》에 이른바 길일(吉日)을 정하였다는 것은 납채(納采)·납폐(納幣) 이후의 일인데 지금은 납채(納采)·납폐(納幣)의 예절을 행하지 않았으니 《예기(禮記)》에 기재된 길일(吉日)을 정하였다고 한 것과는 다릅니다. 또 오늘날의 한 일은 마땅히 뒷날의 법이 될 것이니, 뒷날에 종친(宗親)의 이 같은 경우는 비록 촌수(寸數)가 먼 일가(一家)일지라도 모두 이 예(例)에 따르겠습니까? 남경우(南景佑)의 딸이 만약 상복(喪服)을 입게 된다면 당연히 봉작(封爵)한 부인(夫人)이 되어 뒷날에 마땅히 담양군(潭陽君)의 사당(祠堂)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예기(禮記)》에 ‘여자가 가묘(家廟)를 알현(謁見)하지 않고 죽으면 가묘(家廟)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姑)에게 부(祔)159) 하지 못하고 부씨(婦氏)160) 의 당(黨)에게 장사하게 된다.’ 하고, 주(注)에는 ‘며느리[婦]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친영(親迎)한 후에도 다만 가묘를 알현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며느리가 되지 못하였다고 여겨 고(姑)에게 부(祔)하지 못하는데, 지금 다만 미리 길일(吉日)을 가려 정하였지만, 납채(納采)도 아니하고 납폐(納幣)도 아니한 여자를 사당(祠堂)에 부(祔)하게 한다면 선왕(先王)의 예절을 제정한 뜻에 있어 아마 합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경우(南景佑)의 딸이 상복(喪服)을 입지 않으면 혼인을 허가하겠는가?"
하였다. 정인지가 대답하기를,
"군신(君臣)의 사이는 진실로 논할 수가 없지마는, 그 이외는 그 상복(喪服)을 입지 않는 사람은 국가에서 그 뜻대로 따라 하기를 맡겨 두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뜻을 가지고 빨리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라."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아뢰기를,
"전일에 신 등도 또한 예절에 어긋남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지마는, 다만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평소에 정해 놓았던 일인 까닭으로써 상복을 입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정인지(鄭麟趾)의 아뢴 바가 꼭 예문(禮文)에 합하니, 마땅히 그 의논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26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풍속-예속(禮俗)
- [註 158]
○工曹判書鄭麟趾啓曰: "臣聞南景佑女, 服潭陽君服。 臣意謂雖曰已有定日, 然考古制、《家禮》, 議婚然後納采, 納采然後納幣, 又有請期之節, 而後行親迎之禮。 《記》所謂有吉日者, 納采、納幣以後之事也, 今未行納采、納幣之禮, 與《記》所載有吉日者, 異矣。 且今日所爲之事, 當爲後日之法, 後日宗親如此之類, 雖踈屬, 皆從此例乎? 景佑女若服喪, 當封爵夫人, 後日當入潭陽君之祠堂。 《記》: ‘女未廟見而死, 不祖于廟, 不祔于姑, 葬于婦氏之黨。’ 注: ‘以爲未成婦也。’ 親迎之後, 但未廟見, 尙以爲未成婦, 而不祔于姑, 今但以預擇吉日, 而未納采、納幣之女, 祔于祠堂, 則於先王制禮之義, 恐未合也。" 上曰: "景佑女不服喪, 則許婚乎?" 對曰: "君臣之間, 固不可論, 其餘不服其喪者, 則國家置之任從其意, 可也。" 上曰: "將此意, 速議于政府。" 僉曰: "前日臣等, 亦疑有違於禮, 但以大行大王素定之事, 故謂服喪可矣。 今麟趾所啓, 正合禮文, 宜從其議。" 從之。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26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