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지 / 경기 / 수원 도호부 / 안성군
◎ 안성군(安城郡)
본래 고구려의 내혜홀(柰兮忽)인데, 신라가 백성군(白城郡)으로 고쳤고, 고려가 안성현(安城縣)으로 고쳐, 현종(顯宗)무오093) 에 수주(水州) 임내(任內)에 붙이었다가, 뒤에 천안부(天安府)로 옮겨 붙이었으며, 명종(明宗)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0년 신축에 홍건적(紅巾賊)이 송도(松都)에 침입하여, 임금이 남쪽으로 순행하니, 적이 선봉(先鋒)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하매, 양광도(楊廣道)의 주군(州郡)이 감히 그 선봉을 꺾지 못하였는데, 오직 안성 사람들이 거짓 항복하여 음식을 차려 놓고 적군을 먹이다가, 그 취(醉)한 틈을 타서 괴수(魁首) 6인을 베이니, 적군이 이로 말미암아 감히 남하(南下)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인에 그 공으로써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켜, 수원(水原) 임내(任內)인 양량(陽良)·감미탄(甘彌呑)·마전(馬田)·신곡(薪谷)의 4부곡(部曲)을 떼어 주고, 공정왕(恭靖王) 원년 기묘에 양량을 떼어 양지현(陽智縣)을 설치하고, 나머지 3부곡은 지금 없애어 직촌(直村)을 삼았다.
청룡산(靑龍山) 【군 남쪽에 있다. 서쪽 봉우리에 단(壇)이 있고, 단 아래에 세 우물이 있는데, 가뭄을 만나면, 우물을 깨끗이 하고, 비를 빌면 자못 영험이 있다. 】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충청도 죽산(竹山)에 이르기 13리, 서쪽으로 양성(陽城)에 이르기 15리, 남쪽으로 충청도 직산(稷山)에 이르기 24리, 북쪽으로 양지(陽智)에 이르기 12리이다.
호수(戶數)가 4백 24호, 인구가 1천 7백 63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92명, 선군(船軍)이 1백 29명이다.
토성(土姓)이 6이니, 이(李)·김(金)·조(趙)·설(薛)·장(張)·경(敬)이요, 감미탄(甘彌呑)의 성이 1이니, 유(柳)이다.
땅은 메마르며, 간전(墾田)이 5천 4백 36결(結)이다. 【논이 조금 적다. 】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잡곡(雜穀), 뽕나무·삼[麻]·대추요, 토공(土貢)은 모과·감·느타리[眞茸]·지초요, 약재(藥材)는 낙석(洛石)·연밥·삿갓나물[皂休]이다.
역(驛)이 1이니, 강부(康富)요, 도기소(陶器所)가 1이다. 【군 동쪽 대문리(大門里)에 있다. 】
- 【태백산사고본】 52책 148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5책 620면
- [註 093]무오 : 9년.
◎ 安城郡: 本高句麗 柰兮忽, 新羅改爲白城郡, 高麗改爲安城縣。 顯宗戊午, 屬水州任內, 後移屬天安府。 明宗二年壬辰, 始置監務。 恭愍王十年辛丑, 紅賊入松都, 王南巡, 賊遣先鋒, 招降楊廣道州郡, 所至莫敢挫其鋒, 唯安城人佯爲降附, 設享犒之, 乘其醉斬魁首六人, 賊由是不敢南下。 壬寅, 以功陞爲知郡事, 割水原任內陽良、甘彌呑、馬田、薪谷四部曲以與之。 恭靖王元年己卯, 析陽良, 置陽智縣, 餘三部曲, 今亡爲直村。 靑龍山。 【在郡南, 西峯有壇, 壇下有三井, 遇旱修井禱雨, 頗應。】 四境, 東距忠淸道 竹山十三里, 西距陽城十五里, 南距忠淸道 稷山二十四里, 北距陽智十二里。 戶四百二十四, 口一千七百六十三。 軍丁, 侍衛軍九十二, 船軍一百二十九。 土姓六, 李、金、趙、薛、張、敬。 甘彌呑姓一, 柳。 厥土塉, 墾田五千四百三十六結。 【水田差少】 土宜五穀雜穀, 桑麻、棗。 土貢, 木瓜、柿、眞茸、芝草。 藥材, 洛石、蓮子、皂休。 驛一, 康富。 陶器所一。 【在郡東大門里。】
- 【태백산사고본】 52책 148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5책 6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