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겸과 사마순이 북경으로 돌아가니 수양 대군 이유로 하여금 모화관에서 전송케 하다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이 북경으로 돌아가니, 수양 대군(首陽大君) 이유(李瑈)가 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에서 전송할 제, 이날 아침에 통사(通事) 애검(艾儉)이 사신에게 이르기를,
"오늘 문무 군관(文武群官)이 모두 문밖에서 대인(大人)을 전송할 것이고, 또 왕자(王子)가 전하를 대신해서 전별 잔치를 베풀 것이니, 예절이 편복(便服)으로 갈 수 없을 것이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길가는 사람이니, 비록 편복(便服)일지라도 무엇이 예의에 잘못됨이 있으랴."
하고, 드디어 편복(便服)을 입고 갔다. 전별 잔치에서 술이 거나해지자 두 사신이 서로 눈짓을 하고, 수양 대군(首陽大君)에게 말하기를,
"전하의 병은 명나라에서도 모두 아는 바이지만, 세자(世子)의 병은 우리들이 황주(黃州)에 와서야 처음 들었으므로, 만약에 친히 맞이 하지 아니하면 비록 해를 지날지라도 반드시 병이 차도 있기를 기다리려다가 들어오니, 이때서야 세자(世子)가 할 수 없이 조서를 맞이하고, 그 뒤에는 한번도 나와 보지 아니하니, 세자가 천승국저(千乘國儲)이니, 우리 같은 미관말직(微官末職)의 사람이야 그 무엇을 족히 생각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들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명나라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니, 이는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이 그렇게 한 것이다."
하니, 대군(大君)이 말하기를,
"두 대인(大人)이 돌아가 들어가서 친히 세자(世子)의 병을 보면 진짜인지 거짓인지를 가히 알 것이라."
하니, 겸(謙) 등이 말하기를,
"병들었거나 병들지 않았거나를 무엇하러 가보겠는가."
하니, 대군(大君)이 말하기를,
"병세가 지극히 위중하여 부득이 이에 이른 것이니, 어찌 감히 거짓 병들었다고 칭탁할 것인가."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상불괴우옥루(尙不愧于屋漏)033) 로다."
하였다. 대군(大君)이 자세하게 세자가 세 곳이나 종처가 나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실을 말하니, 사신이 조금 그 의심하던 것을 풀고 말하기를,
"왕자(王子)의 말을 들으니 우리 마음이 석연(釋然)하다."
하였다. 대군이 이 일로써 들어와 아뢰니, 임금이 몹시 놀라서 예조 참판 이변(李邊)과 도승지 이사철(李思哲)에게 명하여, 벽제역(碧蹄驛)까지 쫓아가서 사신에게 고하기를,
"이제 두 대인(大人)의 말을 듣고 황공하여 어찌할 줄 모르겠소. 내 옛날에는 비록 요동 지휘(遼東指揮)·천호(千戶)라 할지라도 칙서를 가지고 오면 반드시 친히 영접하여 예절을 다했는데, 하물며 두 대인이 조서를 받들고 왔는데 감히 세자로 하여금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게 하겠소. 이같이 하면 이는 하늘을 속이는 것이고 황제를 속이는 것이며, 또한 두 대인을 속이는 것이니, 내 비록 덕이 없을지라도 이미 임금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감히 이 같은 간사한 일을 차마 하겠소. 원컨대, 대인은 두목(頭目) 한 사람을 보내서 세자의 종처를 보게 하면 가히 알 것이거니와, 만일에 보내지 아니하면 일생에 추한(追恨)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니, 대인은 가엾게 여기기를 바라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당초에 의심되는 데가 있어서 말한 것인데,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이미 자세하게 말하였고, 또 두 공(公)의 말을 들으니, 의심이 이미 풀어졌으니 두목을 보내 무엇하겠소. 우리들이 말이 많아서 전하로 하여금 걱정하시게 하였소."
하였다. 변(邊) 등이 처음 벽제(碧蹄)에 이르니, 경기 감사박중림(朴仲林)과 수원 부사(水原府使) 이예손(李禮孫)이 술 마시기를 청하니, 변(邊)이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상교(上敎)가 심히 급하시와 그 신하들을 기다리심이 반드시 조급하실 터인데 어찌 술 마실 때인가."
하고, 굳이 사양하였는데, 예손(禮孫)이 다시 청하니, 변(邊)이 성내며 말하기를,
"너는 참으로 사람의 신하된 예절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하고, 드디어 달음질하여 사철(思哲)과 돌아와 복명(復命)하니, 밤중이 되었는데 임금이 과연 자지 않고 기다렸다. 변(邊)의 성질이 굳세고 곧아서 비록 편협한 데가 있으나, 의롭지 않은 일은 털끝만치도 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처음에 임금이 중국의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사철(思哲)과 이계전(李季甸)에게 명하여 원접사(遠接使)를 추천하여 들이라 하였는데, 사철(思哲) 등이 판서 윤형(尹炯)을 추천하여 올리고는 금시에 사철과 계전이 사사로이 서로 말하기를,
"이제 중국의 사신이 모두 유림(儒林)에 글 잘하는 선비라 하니, 원접사(遠接使)도 마땅히 글 잘하는 대신(大臣)을 써야 할 것으로 판서 정인지(鄭麟趾)가 가하다."
하고, 이리저리 한참 생각하다가 또 서로 이르기를,
"형(炯)도 유자(儒者)이요, 또한 이제 이미 정하였으므로 고치기 어렵다."
하고, 그만 그 의논을 정지하였는데, 형(炯)이 갈 때에 전하와 세자가 모두 병들어 나오지 못하고 왕자(王子)가 대신 영접하게 된 까닭을 사목(事目)에 갖추 적어서 형(炯)으로 하여금 말하라 하였는데, 형(炯)이 의주(義州)에서 맞이하면서부터 끝내 입에 내지 않았으므로, 황주(黃州)까지 와서 중국 사신이 정랑(正郞) 안자립(安自立)의 말을 들은 연후에야 비로소 동궁(東宮)의 나와 맞이하지 못함을 알고 성을 내었던 것으로, 전번에는 원접사(遠接使)가 그대로 관반(館伴)이 되는 것이 전례이지만, 형(炯)이 이미 대단한 절목(節目)을 실수하였으므로 관(館)에서 접대하는 소임에 마땅하지 않은고로, 인지(麟趾)로써 대신시키고 형(炯)은 사유(赦宥)로 불문에 붙였다. 형(炯)이 비록 응대하는 재주가 없다 할지라도 지위가 대신(大臣)에 이르렀으므로 일의 완급(緩急)을 알 것인데도, 일을 처리하기를 이와 같이 하여 드디어 중국 사신을 성내게 하여 욕이 군상(君上)에게까지 미치게 하니, 그 옳지 못함이 심하고, 사철(思哲)과 계전(季甸)도 또한 그 처음에 정(精)하게 가리지 못한 것을 깊이 뉘우치면서도 개차(改差)하자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127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5책 170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인물(人物) / 인사-임면(任免)
- [註 033]상불괴우옥루(尙不愧于屋漏) : 군자(君子)는 혼자서라도 좋지 않은 행동을 아니한다는 말.
○乙丑/倪謙、司馬恂還京師, 首陽大君 瑈率百官送于慕華館。 是日朝, 通事艾儉謂使臣曰: "今日文武群官, 皆送大人于門外。 且王子代殿下設餞宴禮, 不可便服而往。" 使臣曰: "吾輩, 行人, 雖便服, 何害於義!" 遂服便服而行。 及餞宴酒酣, 兩使相目謂首陽大君曰: "殿下之病, 朝廷所共知, 世子之疾, 吾等到黃州始聞, 以爲若不親迎, 雖經年, 必待病差乃入, 於是世子不得已迎詔, 其後一不出見。 世子以千乘國儲, 如我微末之人, 其何足記乎! 然輕吾等, 乃所以輕朝廷, 是驕傲之心使之然也。" 大君曰: "兩大人還入, 親見世子之病, 則可知眞僞矣。" 謙等曰: "病與不病, 何往見之有!" 大君曰: "病勢至危, 不得已至此, 何敢詐稱疾病乎!" 使臣曰: "然則尙不愧于屋漏也。" 大君備陳世子發三腫不能出外之狀, 使臣稍釋其疑曰: "聞王子之言, 我心釋然矣。" 大君以此入啓, 上驚動, 命禮曹參判李邊、都承旨李思哲, 追往碧蹄驛, 告使臣曰: "今聞兩大人之言, 惶恐失措。 予於昔日, 雖遼東指揮千戶齎勑到國, 必親接盡禮, 況兩大人奉詔來, 敢使世子稱病不出乎! 如此則是欺天欺皇帝, 又欺兩大人耳。 予雖寡德, 旣得人君之名, 何敢忍爲如此姦詐之事乎! 願大人遣一頭目, 見世子腫處, 可以知矣。 若不送之, 一生追恨, 可勝言哉! 願大人矜憐。" 使臣曰: "當初有所疑, 故言之。 首陽君已詳言之, 今又聞兩公之言, 疑已解矣, 何必遣頭目乎! 吾等多言, 故使殿下動心。" 邊等初至碧蹄, 京畿監司朴仲林、水原府使李禮孫請行酒, 邊止之曰: "上敎甚急, 其待臣等必忙, 是豈行酒之時乎!" 固辭, 禮孫更請, 邊怒曰: "汝誠不知人臣之禮者也。" 遂趣思哲還復命, 夜已半矣。 上果不寐待之, 邊性剛勁, 雖有偏狹, 然不義之事, 不屑爲之, 人以此多之。 初, 上聞詔使之來, 命思哲及李季甸, 擬進遠接使, 思哲等以判書尹炯擬進, 旣而思哲、季甸私相語曰: "今詔使皆儒林文翰之士, 遠接使當用文翰大臣, 判書鄭麟趾可矣。" 商量久之, 又相謂曰: "炯亦儒者也。 且今已定, 改之爲難。" 遂停其議。 炯之往也, 以殿下及世子俱病不出王子代迎之故, 具載事目, 使炯言之。 炯迎自義州, 終不出口, 至黃州, 詔使聞正郞安自立之言, 然後始知東宮之未出迎而發怒焉。 前此, 遠接使仍爲館伴, 例也。 炯旣失大段節目, 不宜館待之任, 故以麟趾代之, 炯以赦勿問。 炯雖無應對之才, 位至大臣, 猶可知事之緩急, 而料事如此, 遂致詔使之怒, 辱及君上, 其不可也甚矣。 思哲、季甸亦深悔其初不精擇, 而又未能遂其改差之議。
- 【태백산사고본】 39책 127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5책 170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인물(人物)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