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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윤1월 7일 임자 1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조서안과 안완경을 북경에 보내 채백 하사를 사례하고 세자의 면복을 청하게 하다

병조 참판 조서안(趙瑞安)과 형조 참판 안완경(安完慶)을 보내어 북경에 가서 채백(綵帛)을 하사한 것을 사례하고, 겸하여 상성 황태후(上聖皇太后)·황태후(皇太后)·황후(皇后)를 책봉(冊封)한 것을 하례하고, 또 세자(世子)의 면복(冕服)을 청하였는데, 사례하는 표에 이르기를,

"황제(皇帝)의 마음이 어지시고 사랑하시와 독실하게 감싸서 편안케 하여 주시고, 황제께서 주신 물건이 많사옴에 깊이 감격함을 더하와 가루가 될지라도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가슴속에 새기고 차서 어찌 잊으오리까.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외람되게 용렬한 자질로써 멀리 거치른 땅에 살면서 항상 직책과 공물을 바치는데 부지런하게 하였사와도 털끝만큼도 도움됨이 없었사온데, 아름답다고 포상하심을 밝게 보이시와 첫머리에 은혜를 광주리에 더하여 주시오니, 생각하옵건대, 이 아름다운 채색 비단이 진실로 내탕(內帑)에 간직하셨던 것을 나누어 주신 것인데, 하물며 신의 아내에게까지 역시 밝으신 은택을 입히시오니, 영화로움이 바라지도 못하던 것으로 기쁨과 부끄러움을 함께 하옵니다. 이는 대개 도량을 널리 하시와 감싸 용납하시고 도타우신 덕으로 함육(涵育)하시면서, 우리 나라가 정치와 교화에 훈도(薰陶)되었다고 생각하시고, 소신이 상전(常典)을 공경하여 받드는 것을 가엾게 여기시와, 드디어 미약한 몸으로 하여금 특별하게 주심을 받자오니, 신이 노둔(駑鈍)한 것을 찬찬히 삼가고 더욱 힘써 금석(金石)같이 굳게 할 것을 맹세하옵니다. 항상 뫼와 언덕같이 튼튼하심을 축원하오며, 하늘과 땅이 오래도록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하고, 방물표(方物表)에 이르기를,

"황제께서 주신 물건이 많사와 특별한 영공을 입었습니다. 토산물이 비록 박약하오나 적은 정성을 간절히 표시합니다. 삼가 백세저포(白細苧布) 50필, 흑세마포(黑細麻布) 1백 50필, 황화석(黃花席) 20장, 만화석(滿花席) 20장, 만화방석(滿花方席) 20장, 잡채화석(雜彩花席) 20장, 인삼(人蔘) 2백 근, 잡색마(雜色馬) 20필을 갖추었습니다. 위 물건들은 거치른 땅에서 나온 것이옵고 만들기도 좋은 공장이 아니므로, 어찌 물건을 드리는 의식에 충당할 수 있사오리까. 다만 토산물을 바치는 예절을 꾸미옵니다. 상성 황태후(上聖皇太后)·황태후(皇太后)·태상 황후(太上皇后)·중궁(中宮)께 드리는 예물은 백세저포(白細苧布)·홍세저포(紅細苧布)·흑세마포(黑細麻布) 각 20필 씩과 만화석(滿花席)·잡채화석(雜彩花席) 각 10장 씩입니다."

하고, 전(箋)에 이르기를,

"자리는 이극(貳極)에 높으시고 여정(輿情)에 잘 화협하시와 은혜로 나라안을 인도하심이 바닷가까지 미치오니, 가슴에 새기고 차서 어찌 말겠습니까. 가루가 되어도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외람되게 용렬한 자질로써 저희 나라를 지키면서, 돌아보건대, 털끝만큼도 도와드림도 없었사오니, 어찌 우로(雨露)의 은혜에 젖음을 기약하오리까. 보내신 사신이 마침 왕림하여 기쁘게 윤음(綸音)의 밀물(密勿)을 받들었삽고, 성상께서 내려 주심이 환악(渙渥)하시와, 궁중에서 쓰시는 비단의 인온(氤氳)024) 을 공경하여 받자왔는데, 혜택이 과처(寡妻)025) 에게까지 미치오니, 온 나라가 즐거워 날뛰옵니다. 공손하게 생각하건대, 전하(殿下)께서는 덕이 어질고 효성스러우심을 온전히 갖추셨고, 성품이 부드럽고 착하시와 저희 나라에서 지성스럽게 사모하옵니다. 성상께서 회수(懷綏)하시는 뜻을 몸받게 하시와, 드디어 노둔(駑鈍)한 저로 하여금 용광(龍光)을 입음을 얻사오니, 신은 삼가 마땅히 적심(赤心)을 다하여 더욱 소절(素節)을 굳게 하겠사옵고, 갱가(賡歌)를 중윤(重潤)에 싣고, 항상 천년이나 하시도록 빌겠습니다. 삼가 백세저포(白細苧布)·흑세마포(黑細麻布) 각 20필, 만화석(滿花席)·잡채화석(雜彩花席) 각 10장, 인삼(人蔘) 50근, 잡색마(雜色馬) 4필을 갖추어 전(箋)과 함께 받들어 올리나이다."

하고, 하례하는 표문에는 이르기를,

"효성이 지극하시와 어버이를 높이시어 크게 책봉하여 찬양하시니, 예절이 엄숙하심이 중하게 하셨고, 인하여 오래오래 문적으로 하시니, 경사로움이 종묘에 흡족하시고 고르게 보솔(普率)026) 이 즐거워합니다. 공경하여 생각하옵건대, 총명하시고 시절이 태평하오니 날로 새롭게 강건하옵소서. 공경하시와 두 궁[兩宮]을 받드시니 덕교(德敎)가 온 천하에 펴지고, 중곤(中壼)을 올려 높이시니 풍화(風化)가 이남(二南)에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욕례(縟禮)를 거행하고 더욱 순하(純嘏)의 모임을 받으셨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이 외람되게 용렬한 자질을 가지고 다행히 창성한 때를 만나, 청구(靑丘) 땅에 머물러 있으면서 비록 추창(趨蹌)한 행렬에는 참예하지 못하오나, 마음은 자달(紫闥)에 가 있사와 거듭 빌어 기리는 정성을 펼치나이다."

하고, 그 방물표(方物表)에는,

"책봉하심을 입으시와 큰 이름을 날리셨습니다. 이에 욕례(縟禮)를 거행하시오니 하정에 깊이 기뻐 하례하옵니다. 공손하게 드리는 거치른 의식으로 삼가 황세저포(黃細苧布) 20필, 백세저포(白細苧布)·흑세마포(黑細麻布) 각 30필, 용문염석(龍文簾席) 2장, 황화석(黃花席)·만화석(滿花席)·만화방석(滿花方席)·잡채화석(雜彩花席) 각 20장, 잡색마(雜色馬) 20필을 갖추었습니다. 위 물건들은 거치른 고장에서 나는 것으로 양장(良匠)이 만든 것이 못되므로, 어찌 족히 여정(旅庭)의 물건에 충당될 수 있사오리까마는, 그저 미나리를 드리는 정성을 본받은 것입니다."

하고, 상성 황태후(上聖皇太后)·황태후(皇太后)·중궁(中宮)의 예물은 홍세저포·백세저포 각 20필, 흑세마포 30필, 황화석·만화석·만화방석·잡채화석 각 10장이다. 그 전(箋)에 이르기를,

"동위(銅闈)에서 덕을 기르시와 크게 황제의 계책을 크게 도우시고, 궁곤(宮壼)에 이름을 정하시와 욕례(縟禮)를 갖추어 거행하시오니, 즐거움이 중국과 외방에 가득이 올랐삽고 경사스러움이 종묘에 널렸습니다. 공경하여 생각하옵건대, 순하시고 화합하신 원량(元良)께서는 마음에 어지신 가르침을 온전하게 간직하시고 높게 저부(儲副)가 되었사오니, 나라 근본의 융성하심을 밝게 하신 것입니다. 황제의 곁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항상 천안(天顔)을 받드심에 기쁘시겠고, 아름다운 호(號)를 부쳐드리니 더욱 순전한 복을 받으셨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다행하게도 좋은 때를 만나 멀리 거치른 땅에 살면서 비록 가뵈옵지 못하오나, 잔치하여 하례하는 정성을 다하려 하옵니다 삼가 백세저포·흑세포(黑細布) 각 20필, 만화석·만화방석·잡채화석 각 10장을 갖추어 전(箋)에 따라 받들어 드립니다."

하고, 청표(請表)에 이르기를,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외방의 나라가 중국의 위령(威靈)을 믿지 아니하오면 뭇 백성이 호령할 수 없사옵고, 관복(冠服)도 명복(命服)의 총수(寵數)를 받은 것이 아니오면 존비(尊卑)를 가릴 수 없사오니, 이것은 진실로 예의(禮義)에 관계되는 바로서 이세(理勢)의 당연한 것이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저희 나라는 기자(箕子)가 봉(封)함을 받은 뒤로부터 화하(華夏)027) 를 향모(向慕)하여, 비록 궁벽한 촌구석에 살지라도 오래 관대(冠帶)를 쓰는 예의가 두터운 풍속이 되어, 고려 때에 있어서는 왕과 세자(世子)가 모두 면복(冕服)을 입고서 신민(臣民)에게 군림하였고, 홍무 2년에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공민왕(恭愍王) 전(顓)에게 구장 면복(九章冕服)을 하사하셨고, 신의 선부(先父) 공정왕(恭定王) 때에 와서는 특별히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께옵서 돌보아 대우하심이 융숭하심을 입어 구장 면복(九章冕服)을 받았으며, 신의 몸에 이르러서는 또 태상 황제(太上皇帝)께서 곤복과 면류관을 주심을 입었사오나, 세자(世子)의 면복(冕服)은 아니 주셨으므로 나라 사람이 민망하게 생각하여서, 이르기를, ‘신의 선부(先父)와 신이 모두 구장 곤면(九章袞冕)의 의복을 받았으니 세자(世子)도 마땅히 칠장 면복(七章冕服)을 받아야 한다.’ 하여, 모두 진청(陳請)할 것을 바랍니다마는, 그러나, 신이 감히 아뢰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은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정통(正統) 11년에 이르러 신이 말씀을 갖추어 표(表)를 올렸사오나 밝게 내려 주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나라안 사람이 말을 모아 다시 아뢰어 청할 것을 원하옵는데, 신도 또한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세자(世子)는 나라의 저이(儲貳)로서 여러 사무를 참예하여 결정하옵는데, 관(冠)과 의복이 배신(陪臣)들과 비슷하와 등급의 위엄을 가릴 수 없으므로 존비(尊卑)의 분별이 분명하지 않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는 거치른 것을 널리 싸안으시와, 은혜를 자소(字小)에게 내려 칠장 면복(七章冕服)을 하사하시어, 저희 나라의 상하 존비(上下尊卑)의 차례로 하여금 빛나게 가릴 수 있게 하시오면, 어찌 오직 신과 나라안 사람만 즐겁고 기뻐서 한때 춤추고 뛰놀 뿐이겠습니까. 신의 자자손손이 성상의 은혜를 대대로 입을 수 있을 것이옵고, 신의 선조(先祖)와 선부(先父)도 또한 장차 땅속에서 감격하여 울 것이옵니다. 신이 공경하여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옵서 어질게 보심을 한결같이 하시고 교화를 높이심에 외면하심이 없사온데, 신이 오히려 마음속에 있는 것을 툭털어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어찌 신자(臣子)로서 품은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는 의리라 하겠습니까. 신이 쇠약하고 병들음이 날로 심하와 남은 여생(餘生)이 얼마 남지 못하였으므로 끝내 상달할 기약이 없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께서는 불쌍하다고 살펴주시옵소서."

하고, 방물표(方物表)에는,

"성인(聖人)께서 하늘에 계시오니 도타운 덕이 멀리까지 편안하옵니다. 미약한 신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진실로 간절하게 중국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옵니다. 삼가 황세저포·백세저포 각 20필, 흑세마포 50필, 용문염석(龍文簾席) 4장, 황화석·만화석·만화방석·잡채화석 각 10장, 석등잔 10개, 잡색마(雜色馬) 20필을 갖추었습니다. 위의 물건들은 거치른 고장에서 나온 것이롭고, 양장(良匠)이 만든 것이 아니어서, 어찌 전정(殿庭)에 채우기에 합당한 물건이오리까. 그저 폐백을 받드는 의식을 꾸미옵니다. 상성 황태후(上聖皇太后)·황태후(皇太后)·태상 황태후(太上皇太后)·중궁(中宮)께 드리는 예물은 백세저포·홍세저포 각 10필, 흑세마포 각 20필, 봉문염석(鳳文簾席) 각 2장, 만화석·잡채화석 각 8장이옵니다."

하고, 그 전(箋)에 이르기를,

"그윽이 생각하건대, 신자(臣子)가 군부(君父)에게 속이는 마음을 품으면 반드시 아뢰어야 하는 것은 정리에 지당한 것입니다. 저희 나라가 다행하게 성조(盛朝)를 만나, 특별하게 여러 임금께서 한결같이 어질게 보시고 자주 친왕(親王)의 구장의 복[九章之服]을 주시오니, 은혜가 지극히 우악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오직 세자(世子)에게만 면복(冕服)을 내리지 않으셨는데, 관복(冠服)의 제도가 배신(陪臣)과 비슷하와 높고 낮음의 분별이 없으므로, 온 나라 신민(臣民)이 싫어하지 않는 이가 없으므로, 신이 이 때문에 감히 사정을 갖추 진달하여 위엄을 범하면서 스스로 말지 못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태자 전하께서는 밝으신 은택을 인도하여 베푸시와 신의 세자(世子)에게 칠장 면복(七章冕服)을 하사하시어, 먼 곳에 있는 사람의 사정에 부응하여 주시오면 지극한 소원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삼가 예물로 백세저포·흑세마포 각 20필, 만화석·잡채화석 각 10장, 잡색마(雜色馬) 4필을 전(箋)을 따라 진봉(進奉)하옵니다."

하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에서 방물(方物)의 수량을 마감하였는데, 태상 황후(太上皇后)에게는 없으므로, 임금이 판사(判事) 김황(金滉)과 교리(校理) 김득례(金得禮)를 불러 그 연고를 물으니, 황(滉) 등이 대답하기를,

"태상 황후는 오늘날 봉(封)하여 높임이 없으므로 책봉(冊封)을 하례하는 데도 역시 방물(方物)이 없었고, 또 조서(詔書)에도 또한 이르기를, ‘황후를 인수궁(仁壽宮)으로 받들어 옮겼다.’ 하였으므로, 이로써 정부(政府)에서 의논하여 방물(方物)을 폐지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통 황제(正統皇帝)가 이미 태상 황제가 되었은즉, 그 황후(皇后)를 태상 황후라 부르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거늘, 어찌 봉숭(封崇)하지 않았나 하여 예물(禮物)을 폐지할 것인가. 이제 황제(皇帝)가 이미 어머니를 높여서 상성 황태후(上聖皇太后)로 하고, 황태자(皇太子)의 어머니는 측실(側室)인데도 오히려 봉숭(封崇)을 했은즉, 그 황후(皇后)를 받들어 인수궁(仁壽宮)으로 옮겨 보내신 것은 존경하는 것이니, 책봉(冊封)을 하례하는 데는 봉숭(封崇)을 하지 않은 때이니까 예물을 드리지 않은 것이 옳을 것 같지만, 사은(謝恩)하는 데에 방물(方物)이 없음은 예절에 합당하지 않다. 내 비록 몸이 불편하지만, 이런 것은 번거롭고 자차분한 일이 아니니 어찌 의논하지 않았겠는가. 다시 속히 정부에 의논하라."

하고, 인하여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승문 관리(承文官吏)를 추핵 치죄(推劾治罪)함이 고당(固當)하나, 정부(政府)에서 인혐(引嫌)할까 염려된다. 그러나, 정부(政府)와 여러 승지(承旨)는 혐의가 없다."

하였다. 황(滉) 등이 정부(政府)와 승문원(承文院)에 의논하니, 제조(提調) 하연(河演)·황보인(皇甫仁)·박종우(朴從愚)·정분(鄭苯)은 말하기를,

"태상 황후(太上皇后)에게 마땅히 예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고, 정인지(鄭麟趾)·정갑손(鄭甲孫)·허후(許詡)·김청(金聽)·이변(李邊)·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정통 황후는 그때에 책봉(冊封)되지 못하였으므로 의거할 칭호(稱號)가 없사오니, 청하건대, 사신에게 물어 보소서."

하니, 임금이 연(演) 등의 말을 좇았는데, 후(詡)가 다시 아뢰기를,

"정통 황후중국에서 존호(尊號)하지 않았는데, 우리 나라에서 태상 황후라 부르는 것은 근거할 데가 없는 것이 아니옵니까. 신은 명나라에서 무엇이라 할까 두렵사오니, 청하옵건대, 사신에게 물어 보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에서 이미 정통(正統)을 부르기를 태상 황제라 하니, 그 후(后)를 태상 황후라 부르는 것은 사리에 당연한 것인데, 어찌 근거가 없다 하는가."

하고, 김하(金何)로 하여금 묻게 하였더니, 사신이 말하기를,

"정통 황후(正統皇后)는 태상 황후라 부릅니다."

하였다. 하(何)가 말하기를,

"존호를 봉숭한 것이 없는데, 마음대로 태상 황후라 불러도 좋습니까."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황제(皇帝)를 이미 태상 황제라 부르니, 황후(皇后)를 마땅히 태상 황후라 불러야 합니다."

하였다. 하(何)가 말하기를,

"만일 경사(慶事)를 만났을 때도 역시 태상 황후라 부를 것입니까."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경사가 있으면 마땅히 표(表)가 있어야 합니다."

하므로, 이에 태상 황후의 방물(方物)을 갖추게 하고, 황(滉)득례(得禮) 등을 의금부(義禁府)에 내렸다가 곧 석방하였다. 또 정인지(鄭麟趾)·김하(金何)로 하여금 사신에게 묻기를,

"우리 나라 왕세자(王世子)의 관복(冠服)이 배신(陪臣)들과 분별이 없어서, 일찍이 청하여 아뢰었더니 윤허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이제 또 다시 주청하고자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하니, 예겸(倪謙)이 말하기를,

"조선(朝鮮)은 군신(君臣)의 분별이 심히 분명한데 관복이 아직도 배신들과 섞여서, 우리들이 조서를 맞이하던 날 보고 스스로 사사로이 의논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명나라로 돌아가면 마땅히 예부(禮部) 관원에게 말하여 다시 주청하게 하겠습니다."

하므로, 이에 명하여 청하는 표문[請表]을 짓게 하였는데, 그때에 서안(瑞安) 등이 이미 떠났으므로, 사람을 쫓아 따라가서 주었다. 서안(瑞安)완경(完慶)과 더불어 본디부터 서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 길에 서안(瑞安)이 자주 불손(不遜)한 말을 하여도 완경(完慶)은 조심하여 피하고 마침내 탓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이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127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66면
  • 【분류】
    외교-명(明) /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종친(宗親) / 의생활(衣生活) / 인물(人物) / 역사-전사(前史)

  • [註 024]
    인온(氤氳) : 풍기는 좋은 향내.
  • [註 025]
    과처(寡妻) : 제후의 아내를 겸사하는 말.
  • [註 026]
    보솔(普率) : 나라 땅과 백성.
  • [註 027]
    화하(華夏) : 중국.

○壬子/遣兵曹參判趙瑞安、刑曹參判安完慶, 如京師謝賜綵帛, 兼賀冊封上聖皇太后、皇太后、皇后, 又請世子冕服。 謝表曰:

天心仁愛, 庸篤懷綏。 帝賚便蕃, 冞增感激。 靡粉難報, 銘佩何忘! 伏念臣猥以庸資, 邈居荒服。 常勤職貢, 顧無補於絲毫; 明示褒嘉, 首加恩於筐篚。 惟玆綵帛之美, 實分內帑之珍。 矧至臣妻, 亦蒙睿澤! 榮非望及, 喜與愧幷。 玆蓋度擴包容, 德敦涵育。 謂弊邦薰陶治化, 憐小臣祗服常典。 遂使微軀, 獲被殊錫。 臣(徐)謹〔當〕 益勵駑鈍, 誓同金石之堅; 恒祝岡陵, 願獻乾坤之久。

方物表曰:

天貺沓至, 特荷殊榮。 土宜雖微, 聊表卑懇。 謹備白細苧布五十匹、黑細麻布一百五十匹、黃花席二十張、滿花席二十張、滿花方席二十張、雜彩花席二十張、人蔘二百斤、雜色馬二十匹。 右件物等, 産自荒裔, 製非良工, 豈充及物之儀! 第修執壤之禮。

上聖皇太后、皇太后、太上皇后、中宮禮物: 白細苧布ㆍ紅細苧布ㆍ黑細麻布各二十匹、滿花席ㆍ雜彩花席各一十張。 箋曰:

位尊貳極, 允協輿情。 恩導中宸, 覃霈海徼。 佩銘曷已! 糜粉難酬。 伏念臣猥以庸資, 叨守弊服。 願乏絲毫之裨補, 何期雨露之霑濡! 星使鼎臨, 欣奉綸音之密勿; 天施渙渥, 祗荷宮錦之氤氳。 惠及寡妻, 懽騰一國。 恭惟殿下德全仁孝, 性稟溫文。 小邦向慕之誠, 體聖上懷綏之意。 遂令駑鈍, 獲被龍光。 臣謹當倍殫赤心, 益堅素節。 載賡歌於重潤, 恒申祝於千齡。 謹備白細苧布ㆍ黑細麻布各二十匹、滿花席ㆍ雜彩花席各一十張、人蔘五十斤、雜色馬四匹, 隨箋奉進。

賀表曰:

孝極尊親, 誕揚顯冊。 禮嚴重匹, 仍擧彌文。 慶洽宗祊, 歡均普率。 欽惟聰明時乂, 剛健日新。 祗奉兩宮, 德敎加於四海; 載崇中壼, 風化肇於二南。 玆値縟禮之成, 益膺純嘏之集。 伏念臣猥將庸質, 幸際昌辰。 迹滯靑丘, 雖阻趨蹌之列; 心懸紫闥, 陪伸頌禱之誠。

方物表:

冊揚鴻名, 爰擧縟禮。 情深喜賀, 恭展菲儀。 謹備黃(紬)〔細〕 苧布二十匹、白細苧布ㆍ黑細麻布各三十匹、龍文簾席二張、黃花席ㆍ滿花席ㆍ滿花方席ㆍ雜彩花席各二十張、雜色馬二十匹。 右件物等, 産從荒陬, 製非良匠, 豈足充旅庭之實! 聊以效獻芹之誠。

上聖皇太后、皇太后、中宮禮物: 紅細苧布、白細苧布各二十匹, 黑細麻布三十匹, 黃花席、滿花席、滿花方席、雜彩花席各一十張。 箋曰:

銅闈毓德, 丕贊皇猷。 宮壼定名, 備擧縟禮。 歡騰夷夏, 慶衍宗祊。 恭惟道協元良, 心全仁敎。 尊爲儲副, 式昭邦本之隆; 昵侍耿光, 常奉天顔之喜。 屬薦徽號, 益擁純禧。 伏念臣幸際昌辰, 邈居荒服。 雖阻駿奔之庭, 列殫燕賀之誠。 謹備白細苧布ㆍ黑細布各二十匹、滿花席ㆍ滿花方席ㆍ雜彩花席各一十張, 隨箋奉進。

請表曰:

臣竊惟外國非恃中國之威靈, 無以令衆庶; 冠服非受命服之寵數, 無以辨尊卑, 此誠禮義之所關, 而理勢之自然者也。 竊(兪)〔惟〕 小邦, 自箕子受封, 向慕華夏。 雖處僻陋之陬, 久爲(寇)〔冠〕 帶之俗。 其在高麗之時, 王及世子, 俱服冕服, 以臨臣民, 至洪武二年, 太祖高皇帝恭愍王 王顓九章冕服, 逮臣先父恭定王, 特蒙太宗文皇帝眷遇之隆, 獲受九章冕服, 至及臣身, 又蒙太上皇帝袞冕之錫, 而世子冕服則未之及焉。 國人閔然以謂: "臣先父及臣, 旣皆受九章袞冕之服, 世子宜受七章冕服。" 咸願陳請。 然臣未敢敷奏, 囁嚅有年矣。 至正統十一年, 臣俱辭上表, 未蒙明降, 國人合辭, 願復陳請。 臣亦竊念, 世子爲國儲貳, 參決庶務, 而冠服與(倍)〔陪〕 臣相似, 等威之辨不嚴, 尊卑之分不明。 伏聖度廓包荒, 恩推字小, 賜以七章冕服, 俾小邦上下尊卑之序粲然有倫, 豈唯臣及國人歡欣蹈舞於一時而已哉! 臣之子子孫孫, 獲被皇恩於永世, 而臣之先祖先父, 亦且感泣於地下矣。 欽惟臣皇帝陛下仁同一視, 化隆無外, 臣猶且不披露心肝, 以達天聰, 豈臣子有懷必陳之義乎! 臣衰病日甚, 餘年無幾, 終無上達之期也。 伏惟皇帝陛下矜察焉。

方物表:

聖人御天, 德敦綏遠。 微臣執壤, 誠切由中。 謹備黃細苧布ㆍ白細苧布各二十匹、黑細麻布五十匹、龍文簾席四張、黃花席滿花席滿花方席雜彩花席各一十張、石燈盞一十事、雜色馬二十匹。 右件物等, 産自荒陬, 製匪良匠, 豈合充庭之實! 聊修奉幣之儀。

上聖皇太后、皇太后、太上皇太后、中宮禮物: 白細苧布ㆍ紅細苧布各一十匹、黑(紐)〔細〕 麻布各二十匹、鳳文簾席各二張、滿花席ㆍ雜綵花席各八張。 箋曰:

竊惟臣子之於君父, 有懷必達, 情之至也。 竊念小邦欽遇盛朝, 特被列聖一視之仁, 屢錫親王九章之服, 恩至渥也。 顧惟世子未受冕服之賜, 冠服之制, 乃與陪臣相似, 尊卑無辨, 一國臣民罔不爲慊, 此臣所以敢具情由, 干冒威嚴而不能自已者也。 伏惟皇太子殿下導宣睿澤, 賜臣世子以七章冕服, 以副遠人之情, 不勝至願。 謹備禮物白細苧布ㆍ黑細麻布各二十匹、滿花席ㆍ雜彩花席各一十張、雜色馬四匹, 隨箋奉進。

初, 承文院磨勘方物之數, 而於太上皇后無之。 上召判事金滉、校理金得禮, 問其故, 等對曰: "太上皇后, 今未封崇, 故於賀冊封, 亦無方物。 且詔書亦云: ‘奉遷皇后仁壽宮。’ 以此政府議之而廢方物。" 上曰: "正統旣爲太上皇帝, 則其皇后稱太上皇后, 固其宜也, 豈可以未封崇廢禮物乎! 今皇帝旣尊母爲上聖太后, 皇太子之母, 側室也, 而尙且封崇, 則其奉遷皇后居仁壽宮者, 尊敬之耳。 其賀冊封則時未封崇, 不進禮物, 猶之可也, 於謝恩無方物, 不合於禮。 近日, 予雖未寧, 此非煩碎之事, 何不啓達乎? 更速議諸政府, 備方物。" 因謂承政院曰: "承文官吏, 固當推劾治罪, 恐政府引嫌。 然政府與諸承旨, 固無嫌焉。" 等議諸政府及承文院, 提調河演(皇南仁)〔皇甫仁〕 朴從愚鄭苯以爲: "太上皇后, 宜有禮物。" 鄭麟趾鄭甲孫許詡金聽李邊鄭昌孫以爲: "正統皇后, 時未冊封, 稱號無據, 請問使臣。" 上從等議。 更啓曰: "正統皇后, 中國未有尊號, 我國稱爲太上皇后, 無乃無所據乎? 臣恐朝廷以爲如何, 請問使臣。" 上曰: "中國旣稱正統爲太上皇帝, 則其后稱太上皇后, 乃理事之當然, 豈無據乎!" 令金何問之, 使臣曰: "正統皇后稱太上皇后。" 曰: "無封崇尊號, 而便稱太上皇后可乎?" 使臣曰: "皇帝旣稱太上皇帝, 皇后宜稱太上皇后。" 曰: "如遇慶事, 亦稱太上皇后乎?" 使臣曰: "然。 有慶事, 宜有表。" 於是, 備上皇后方物。 乃下得禮等于義禁府, 尋釋之。 又令鄭麟趾金何問使臣曰: "本國王世子冠服, (興)〔與〕 陪臣無別, 曾奏請, 未蒙兪允, 今欲更奏, 何如?" 倪謙曰: "朝鮮君臣之分甚明, 而冠服尙雜於陪臣, 我等於迎詔日見之, 自有私論。 我等還朝, 當與禮部官言之, 更奏。" 於是, 命製請表。 時瑞安等已發, 遣人追授之。 瑞安完慶素不相能, 是行也, 瑞安屢發不遜之言, 完慶謹避, 終不與校, 人多之。


  • 【태백산사고본】 39책 127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66면
  • 【분류】
    외교-명(明) /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종친(宗親) / 의생활(衣生活) / 인물(人物)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