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 방비를 위해 우선 의주 읍성과 행성을 쌓게 하다
평안도 도절제사 의정부 우찬성(平安道都節制使議政府右贊成) 김종서(金宗瑞)가 상언(上言)하기를,
"신이 명령을 받자온 이래로 연변 주군(沿邊州郡)과 복리 주군(腹裏州郡)을 왕복하면서 순심(巡審)하온즉, 백성이 드물게 살고 밭과 들이 황무(荒蕪)하므로 그 이유를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자주 흉년을 만난데다가 변방의 수자리 사는 고통과 요동(遼東)의 영송(迎送)하는 번거로움과 성을 쌓는 역사로 인하여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서, 유망(流亡)함이 잇달아 이 지경에 이르렀다. ’고 하였습니다. 신이 눈으로 본 바 과연 그 말과 같으므로, 소복(蘇復)시킬 도리를 밤낮으로 생각하여도 구제할 바를 알지 못하와 크게 탄식하기를 벌써 몇 달이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중국에 변란이 있으면 그 해(害)가 마침내 우리 나라에까지 미치게 되므로, 백성을 보전할 바와 적을 방어할 준비를 게을리 할 수 없사오니, 어찌 백성이 괴로와한다 하여 가만히 있을 것이옵니까. 그러하오나, 일에는 선후(先後)와 완급(緩急)의 순서가 있는 것이므로, 마땅히 먼저 할 것과 또 급한 것에 힘을 쓴 연후에야, 일이 쉽게 되고 공(功)도 쉽게 이룰 수 있사오니,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익히 염려해서 영구한 계책을 도모할 때이옵니다.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성(城)을 잘 지켜서 당 태종(唐太宗)이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성(安市城)을 공략하였으나 마침내 빼앗지 못하였고, 요 성종(遼聖宗)도 역시 많은 무리를 끌고 와서 귀주성(龜州城)을 습격하였으나 여러 달[月]을 이기지 못하다가 내응(內應)을 인하여 승리를 얻었다. ’고 하옵니다. 그러하온즉, 인민을 대성(大城)이나 소보(小堡)에 입보(入保)시키고 높고 견고하게 수축(修築)해서 사졸(士卒)을 휴양시키고 무예(武藝)를 훈련시키며, 군량을 많이 저축하는 것이 진실로 먼저 해야 하고, 또 급히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연변(沿邊)의 대성(大城)과 소보(小堡)를 이미 자세히 순시(巡視)하였사온데, 의주 읍성(義州邑城)은 낮고 약하며, 또 벽성(壁城)으로 보수(補修)한 것도 견고하지 못한 것 같으므로, 신이 전일에 이를 수리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삽고, 삭주 읍성(朔州邑城)은 험(險)한 곳을 의지하여 쌓았으나 간혹 낮고 약한 데가 있고, 또 무너진 곳이 거개가 모두 완전하게 보수되지 않았으며, 해자[坑坎]도 전연 파내서 수리하지 않았고, 소삭주(小朔州)는 도적이 오는 첫머리이온데 다만 목책(木柵)만이 있을 뿐이오며, 창성 읍성(昌城邑城)은 험한 곳에 의지하여 견고하게 쌓았고, 창주 구자(昌州口子)는 비록 석보(石堡)이나 낮고 약하며, 벽단 석보(碧團石堡)도 또한 그러하옵니다. 벽동 읍성(碧潼邑城)은 험한 곳에 의지하여 견고하게 쌓았으며, 소파아(小波兒)는 목책(木柵)이 견고하지 못하고, 또 대산(大山)은 동서(東西)로 압박을 받게 되어 지키기 어렵게 되었고, 아이 구자(阿耳口子)는 비록 험하오나 몇 군데에 잠시 돌로써 쌓았고, 나머지는 모두 쌓지 아니하고 돌이나 가시로 막았으며, 산양회보(山羊會堡)와 이산 읍성(理山邑城)과 고산리보(高山里堡)는 모두 벽성(壁城)이고, 만포 석보(滿浦石堡)는 험한 곳에 의지하여 견고하게 쌓았습니다. 의주(義州)로부터 만포(滿浦)에 이르기까지는 모두가 큰 무리의 도적이 오는 길이오니, 위에서 아뢴 돌로 쌓아서 견실한 성보(城堡) 외에는 모두 다 서둘러서 수축하되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신이 소문을 듣자오니, 의주(義州)의 벽성(壁城)을 돌로써 고쳐 쌓은 뒤에 잇따라 행성(行城)을 쌓아서 관방(關防)을 설치한다 하옵는데, 이 계책은 비록 좋기는 하오나, 그러나 규모가 넓고 크므로 사세가 빨리 이루기 어렵고, 또 의주(義州) 근처에는 강변에 돌이 없어서 반드시 강을 건너가서 돌을 거두게 되므로 힘과 역사가 다른 데에 비하여 곱이 들게 되어, 반드시 대중(大衆)을 동원하여서 오랜 세월을 지낸 뒤에야 그 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듣자오니 요(遼) 성종(聖宗)은 대중(大衆)을 동원하여 삭주(朔州)를 경유해서 들어왔다 하옵고, 소손녕(蕭遜寧)과 홍건적(紅巾賊)도 모두 삭주(朔州)를 거쳐 왔다 하옵니다. 이상의 여러 길로 우리 지경을 짓밟아 들어왔으므로, 신이 기왕에 큰 무리의 들어왔던 길과 지금의 산천 형세(山川形勢)를 살펴 헤아려 보옵건대, 삭주(朔州)로부터 만포(滿浦)에 이르기까지 8백 10여 리의 땅을 가지고 이 땅에다 모두 관문을 설치하지 아니한다면, 비록 의주(義州) 등지에 성을 쌓아서 관방(關防)을 설치한다 할지라도 이익됨이 미진할까 두렵습니다. 이제 이미 행성(行城)을 쌓은 것을 보면 저습(沮濕)한 곳과 크고 작은 내가 흐르는 곳은 모두 살기가 어려워서 가시[荊棘]나 말목(抹木)으로 막았는데, 만약에 얼음이 얼게 되면 태워 버리거나 철거하여 적로(賊路)를 트기 쉬우니, 이를 견고하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단연코 먼저 크고 작은 성보(城堡)를 수축하여서 인민의 입보(入保)할 곳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무(急務)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대저 관문을 설치하는 곳은 반드시 험하고 좁아야 되오니, 진(秦)나라의 함곡(函谷)과 정(鄭)나라의 호뢰(虎牢)가 그것입니다. 만약 평탄하고 광활한 곳이라면 관문을 설치하기 어렵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널리 여러 사람의 말을 들어 심사 숙려(深思熟慮)하여서 영구(永久)한 방책을 도모하는 것이 진실로 국가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신이 멀리 변방에 있사와 조정의 의논을 자세하게 들을 수 없으므로 망령되게 광고(狂瞽)의 말씀을 올리오니, 죄가 진실로 작지 않사오나, 일의 어느 것이 이 일보다 중(重)함이 있다고 스스로 죄책(罪責)을 꺼리어 신하로서의 마음을 피로(披露)하지 않는다면 그 죄가 이보다 더 중할 것이므로,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 내리니 정부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소삭주(小朔州)의 목책(木柵)과 창주 구자(昌州口子)·벽단 석보(碧團石堡)·소파아 목책(小波兒木柵)·아이 구자(阿耳口子)·산양회보(山羊會堡)·고산리보(高山里堡)·이산 읍성(理山邑城)과 대산(大山)은 높고 험하여 대적(大敵)의 군사가 들어오는 길이 아니옵고, 다만 농민(農民)을 위해서 좀도적을 피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입니다. 의주(義州)와 같은 도로(道路)가 평탄한 곳에는 불가불 설비하여야 되므로, 읍성(邑城)을 개축(改築)할 것과 근지(近地)에 행성(行城)을 쌓을 것을 이미 벌써 의논을 정하여 그 도(道)에 이문(移文)하였사오니, 갑자기 고쳐서 깊고 먼 곳으로 옮겨 가게 하여 민심(民心)을 동요시킬 수 없사오니 마땅히 먼저 의주 읍성(義州邑城)과 행성(行城)을 쌓고, 또 삭주(朔州)도 역시 평탄하여 적로(賊路)에 해당됨은 과연 도절제사(都節制使)의 아뢴 바와 같사오나, 힘이 넉넉하지 못하여 일시에 모두 거사(擧事)하기는 어렵사오니, 의주성(義州城)을 다 쌓은 뒤에 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127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60면
- 【분류】군사-관방(關防) / 외교-야(野)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平安道都節制使、議政府右贊成金宗瑞上言曰: "臣受命以來, 沿邊及腹裏州郡, 往復巡審, 民居稀少, 田野蕪荒, 問其所由, 皆曰: ‘屢値年(險)〔儉〕 , 加以邊方戍役之苦、遼東迎送之煩、築城之役, 民不聊生, 流亡相繼, 以至於此。’ 臣所目見, 果如其言。 蘇復之由, 晝夜思之, 罔知攸濟, 噓唏嘆息者, 已有日月矣。
自古中國有變, 則其害終及於我國, 保民之所、禦敵之備, 誠不可緩也, 豈以民勞而不擧哉! 然事有先後緩急之序, 當務其先且急者, 然後事易成而功易就, 此誠深思熟慮, 以圖永久之時也。 中國號爲我國善守城。 唐 太宗擧天下之兵, 攻安市城, 卒不能拔; 遼 聖宗亦以大衆, 來襲龜州城, 累月不克, 乃因內間而獲利。 然則人民入保大城小堡, 高堅修築, 休養士(率)〔卒〕 , 訓鍊武藝, 多畜糧餉, 此固先且急者也。
臣巡視沿邊大城小堡已熟。 義州邑城低微, 且補以壁城, 似不牢固, 臣於前日啓請修之。 朔州邑城, 據險以築, 或有低微處, 又頹圮處, 率皆不完, 坑坎全不修鑿; 小朔州, 賊來初程, 但有木柵而已。 昌城邑城, 據險堅築。 昌州口子, 雖石堡而低微, 碧團石堡亦然。 碧潼邑城, 據險堅築。 小波兒木柵不固, 且大山東西臨壓, 守之爲難。 阿耳口子雖險, 不多處暫築以石, 餘皆不築, 或塞以石棘。 山羊會堡與理山邑城、高山里堡, 皆壁城。 滿浦石堡, 據險堅築。 自義州至滿浦, 皆大黨賊路。 上項石築堅實城堡外, 皆汲汲修築, 不可少緩。
臣側聞義州壁城, 以石改築後, 連築行城, 以設關防。 此策雖善, 然規模闊大, 勢難速成。 且義州近處, 此邊無石, 須越江收石, 力役倍他, 必動大衆積歲月, 然後乃就其功。 臣嘗聞遼 聖宗擧大衆, 由朔州而入; 蕭遜寧及紅賊, 皆由朔州以上諸路闌入我境。 臣以已往大黨出入之路與當今山川形勢量度, 自朔州至滿浦將八百十餘里之地, 若不幷設關於此地, 則雖築義州等處, 以設關防, 其利恐未盡也。 今觀已築行城, 沮濕之處, 大中流川, 幷築爲難, 乃塞以荊棘抹木, 若當氷凍, 或焚或撤, 易開賊路, 不可恃此以爲固也。 是故臣斷以爲先修大小城堡, 以固人民入保之所, 是今日之急務。
大抵設關之處, 必須險隘, 秦之函谷、鄭之虎牢是已。 若平坦闊遠之地, 難以設關, 伏望廣採衆論, 深思熟慮, 以圖永久之策, 實國家之利。 臣遠在邊方, 未得詳聞朝議, 妄進狂瞽之言, 罪誠不少, 然事孰重於此擧, 而自嫌罪責, 不披露臣心, 其罪有重於此, 謹昧死以聞。
下議政府, 政府議啓曰: "小朔州木柵、昌州口子、碧團石堡、小波兒木柵、阿耳口子、山羊會堡、高山里堡、理山邑城, 大山高險, 非大敵行兵之路, 只爲農民, 僅避竄竊而設。 若義州, 道路平坦, 不可不設備, 故改築邑城, 及築近地行城, 已曾定議, 文移其道, 不可遽改, 移赴深遠之地, 以搖民心, 當先築義州邑城行城。 且朔州亦是平坦, 正當賊路, 果如都節制使所啓, 然力不能贍, 一時幷擧爲難, 待畢築義州城, 然後爲之。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39책 127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60면
- 【분류】군사-관방(關防) / 외교-야(野)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