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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18일 갑오 1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임금과 동궁이 몸이 불편하여 조서를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다

의정부(議政府)의 영의정(領議政) 하연(河演)·좌의정(左議政) 황보인(皇甫仁)·좌찬성(左贊成) 박종우(朴從愚)·좌참찬(左參贊) 정분(鄭苯)·우참찬(右參贊) 정갑손(鄭甲孫)·예조 판서 허후(許詡)가 동궁(東宮)의 병이 나은 것을 하례하였는데, 임금이 연(演) 등에게 이르기를,

"홍희(洪熙) 원년(元年)에 칙서(勅書)를 영접할 때, 내가 병이 있어서 세자(世子)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고, 경술(庚戌)·신해 연간(辛亥年間)에 창성(昌盛)이 왔을 때와 연전(年前)에 왕무(王武)가 왔을 때에도 역시 세자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다. 내가 이미 병들고 세자도 또한 평복(平復)되지 못하였으므로, 세손(世孫)으로 하여금 조서(詔書)를 맞이하게 하려는 것은 명분(名分)이 이미 정해진 것이고, 또 나이가 어리므로 행례(行禮)할 때에 비록 잘못 실수가 있을지라도 저들이 반드시 허물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고 넓은 의복을 입고 높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만(萬)에 하나라도 잘못됨이 있다면 후회됨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종친(宗親)을 대우함이 매우 박해서, 그 사는 집이 담장을 높게 쌓아서 죄수를 가두는 옥과 같은데, 그러나, 황제가 유고(有故)하면 반드시 종친(宗親)으로 하여금 섭정(攝政)하게 하여 천지(天地)·종묘(宗廟)·사직(社稷)에 제사지내기까지 섭행(攝行)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제 세상이 돌아가기를 점점 옛날과 같지 아니하여 임금이나 세자가 연고가 있어도 대신(大臣)이 섭정(攝政)할 수 없고 반드시 왕자로 하여금 섭정하게 하는데, 섭정하는 것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조칙(詔勅)을 대신하여 맞이하는 것이겠는가. 대저 비록 좋은 법일지라도 만약에 한 사람이 잘못 의심을 내게 되면 여러 사람이 모두 현혹되는데, 나와 동궁이 함께 병이 있고 장손(長孫)도 또한 어리니, 경들은 잘 제도를 의논하여 정해서 더벅머리 선비[儒竪]들에게 기롱을 받지 않게 하라. 근일에 동궁이 나를 보러 왔을 때 평지(平地)는 행보(行步)가 편이(便易)하나 섬돌을 오를 때에는 다리와 무릎에 힘이 없었으니, 사신(使臣)이 만약 내월(來月)에 입경(入京)하게 되고 동궁의 몸이 평강(平康)하다면, 전정(前庭)에 나가서 조칙(詔勅)만을 받게 하고, 문밖에서 명령을 맞이하는 것과 사신에게 잔치를 베푸는 것은 왕자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는 것이 어떠할까. 이제 예조 낭청(禮曹郞廳)으로 하여금 사신에게 묻기를, ‘전하(殿下)와 세자(世子)가 병이 있으니 장차 어느 사람으로 하여금 조칙(詔勅)을 대신 맞이하게 함이 옳겠는가.’ 하려 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조선은 예의의 나라라고 칭하였는데, 먼저 사신에게 의식을 물어서 정하지 아니하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니, 연(演)인(仁)이 아뢰기를,

"동궁의 병환이 이제 비록 나아가지만 조복(朝服)을 입고 조서를 맞이하기는 어려울 것이오니, 마땅히 왕자로 하여금 대행(代行)하게 하고, 후일에 태평관(太平館)으로 사신을 가 보게 하는 것이 편할 듯하옵니다."

하고, 종우(從愚)·분(苯)·갑손(甲孫)·후(詡)는 아뢰기를,

"동궁이 조서를 맞이할 수 없다는 뜻을 미리 사신에게 알리고, 만약에 사신이 내월(來月)에 입경(入京)하게 되면 동궁께서 전정(殿庭)에 나가 조서를 받게 하고, 문밖에서 명령을 맞이하는 것과 연향(宴享)하는 것은 왕자(王子)로 하여금 대행(代行)하게 함도 역시 가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서를 맞이하는 의식은 전에 만든 의주(儀注)로써 하되,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기를 기다려 다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전번에 강서원(講書院)에서 왕세손(王世孫)으로 하여금 조칙(詔勅)을 대신 받게 하도록 청하였었는데, 더벅머리 선비[竪儒]란 말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처음에는 임금이 돈독하게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학문을 좋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로소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사(文士)를 모아서 강관(講官)에 충당시키고 밤마다 3, 4고(鼓)가 되어야 비로소 취침(就寢)하며, 중관(中官)을 보내어 숙직하는 곳에 가서 고문(顧問)하기를 끊이지 아니하므로, 당직(當直)된 사람은 반드시 밤새도록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서 기다려야 했었는데, 중년(中年) 이후에 이르러 연속하여 두 아들을 잃고, 소헌 왕후(昭憲王后)가 또 별세하니, 불자(佛者)들이 비로소 그의 학설(學說)을 드리게 되어, 임금이 그만 불교를 숭상하게 되었고, 불당(佛堂)을 세우게 하매, 시종(侍從)과 대간(臺諫)·유신(儒臣)들이 그 옳지 아니함을 극언(極言)하였으므로, 임금이 몹시 미워하여 자주 물리쳤으되, 혹은 이르기를,

"실지의 일에 쓸모없는 선비[迂儒]"

라 하고, 혹은

"더벅머리 선비[竪儒]"

라고도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127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5책 160면
  • 【분류】
    외교-명(明) /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甲午/議政府領議政河演、左議政皇甫仁、左贊成朴從愚、左參贊鄭苯、右參贊鄭甲孫、禮曹判書許詡賀東宮疾瘳。 上謂等曰: "洪熙元年迎勑時, 予得疾, 使世子代之。 庚戌辛亥年間昌盛之來及年前王武之來, 亦令世子代之。 予旣有疾, 世子又未平復, 欲使世孫迎詔者, 以爲名分已定, 且以幼沖行禮, 雖或差謬, 彼必不咎, 然着長闊之衣, 升降高階, 萬一違誤, 悔不可言。 中國待宗親甚薄, 其居室高築垣墻, 若囚牢獄, 然皇帝有故, 則必使宗親攝政, 以至祀天地宗廟社稷, 無不攝行。 今世運漸不如古, 君若世子有故, 大臣不得攝政, 必令王子攝政, 攝政尙然, 況代迎詔勑乎!

大抵雖美法, 若一人曲生疑意, 則衆皆惑之, 予與東宮俱有疾, 長孫且幼, 卿等善議定制, 毋令取譏於竪儒。 近日東宮進見於予, 平地則行步便易, 至於陞階, 脚膝無力。 使臣若於來月入京, 而東宮體尙平康, 則出殿庭受詔勑, 若門外迎命及宴使臣, 令王子代行如何? 今欲使禮曹郞廳問諸使臣曰: ‘殿下與世子有疾, 將使何人代迎詔勑可也?’ 然古稱朝鮮禮義之邦, 不先定儀, 問之使臣, 無乃取笑乎?"

曰: "東宮之疾, 今雖差愈, 着朝服迎詔爲難, 宜令王子代行, 後日往見使臣于太平館爲便。" 從愚甲孫曰: "東宮未得迎詔之意, 預告使臣。 若使臣來月入京, 而東宮得出殿庭受詔, 門外迎命, 及宴享則令王子代行亦可。" 上曰: "迎詔之儀, 以前撰儀註, 待使臣渡江更啓。" 前此講書院請令王世孫代受詔勑, 竪儒之言, 指此也。 初, 上敦尙儒術, 好學不倦, 始置集賢殿, 聚文士以充講官, 每夜三四鼓, 始就寢, 遣中官至直廬, 顧問不絶, 當直者必終夜正衣冠以待。 及中年以後, 連喪二子, 昭憲王后又薨, 佛者始以其說進, 上乃崇尙釋敎, 創建佛堂。 侍從、臺諫、儒臣極言其不可, 上深惡之, 屢斥之, 或曰迂儒, 或曰竪儒。


  • 【태백산사고본】 39책 127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5책 160면
  • 【분류】
    외교-명(明) /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