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가 왔을 때 채붕·나례를 베풀지의 여부에 대해 논의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홍희(洪熙)·선덕(宣德) 두 황제가 등극하게 되어 조사(詔使)가 왔었을 때에는 채붕(彩棚)·나례(儺禮)를 쓰지 않았사온데, 정통(正統) 때 이르러서는 이를 썼습니다. 이제 조사(詔使)가 반드시 또 올 것이오나, 태상 황제(太上皇帝)가 노정(虜庭)에 함해(陷害)되어 평상시와 비교가 아니오니, 채붕·나례는 기쁜 경사와 같아 혹 미안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희·선덕 때에는 역월(易月)의 제도를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일로 말하면 비록 천하가 통분(痛憤)해 하지만 흉문(凶聞)051) 이 없으니 채붕·나례를 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러니 정부와 더불어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하매, 좌참찬 정분(鄭苯)·우참찬 정갑손(鄭甲孫)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태상왕(太上王)은 대행왕(大行王)과 비교가 아니온데, 이제 새 황제가 즉위하여 조사(詔使)를 맞이함에 이미 행하던 구례(舊禮)를 폐지하시오면 어찌 마음에 편안하겠습니까. 만일 그것을 폐지하실 경우는 방애(防礙)되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영조(迎詔)와 개독(開讀)할 때, 고취(鼓吹)를 연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사신의 연향(宴享)에 음악을 사용함도 그만둘 수 없을 것이오니, 이제 배표(拜表)함에 있어서도 고취(鼓吹)를 씀이 마땅하옵니다. 만약 채붕·나례를 태상황(太上皇)의 연고 때문에 폐해야 한다면, 연향에 음악 사용함도 마땅히 제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연향에 음악을 제거함이 옳다면, 방금 새 황제가 즉위하여 사방에서 사신이 와 하례할 때 중국에서 어찌 음악을 쓰지 않는다 하겠습니까. 중국에서도 오히려 음악을 사용하옵는데, 우리 나라에서 음악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태상황의 연고로 해서 채붕·나례를 베풀지 아니함은 결코 옳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명(大明)의 번방에서 조칙을 맞이하는 의식[迎詔儀]에, 단지 가항(街巷)과 관문(館門)에 결채(結彩)한다 하였을 뿐, 채붕·나례를 베푼다는 예문(禮文)이 없습니다. 국가에서 중국을 섬기니 모든 일은 중화의 제도를 한결같이 따라야 하옵는데, 예문에 없는 것임에도 시행하여 희롱함은 폐단된 일이오니, 어찌 구태의연하게 개혁하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원컨대, 이제부터는 모든 조칙을 맞이할 때 영구히 채붕·나례를 혁파하소서. 이같이 하오면 의리에도 매우 순하여 방애될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사신에게 채붕·나례를 베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까닭을 묻지 아니할 것이며, 설사 묻는다 하더라도 이 뜻으로써 개유(開諭)하오면 그들도 옳게 여길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황희(黃喜)·좌의정 하연(河演)·우의정 황보인(皇甫仁)도 정분 등의 의논과 같았으므로, 세자에게 명하여 예조 판서 허후(許詡)·도승지 이사철(李思哲)을 인견하여 말하게 하기를,
"예전에 홍희 황제(洪熙皇帝)의 등극사(登極使)가 왔을 때 채붕·나례를 베풀지는 않았지만, 처음부터 베풀려고 하지 아니함은 아니었다. 의정 허조(許稠)가 헌의하기를, ‘단지 채붕만 베풀고 나례는 베풀지 마옵소서.’ 하였으나, 나는 우원(迂遠)하게 여기었다. 그래서 채붕·나례를 설비하게 하였으나 그때의 사신인 이기(李琦)는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 항상 소복(素服)을 입고 있었으므로, 채붕·나례뿐 아니라 연향에 음악 쓰는 것도 없애게 한 것이었다. 예관(禮官)이 조칙 읽을 때의 춤추는 절차를 물었더니, 이기가 말하기를, ‘춤[舞蹈]이야 어찌 폐지할 수 있겠소, 하지만, 이밖에 없앨 만한 일은 모두 다 없애도록 하시오.’ 하므로 채붕·나례를 베풀지 아니하였다. 선덕 황제(宣德皇帝) 때에는 홍희 황제의 예(例)에 의거하여 설비하지 않았는데, 그때의 사신은 길복(吉服)을 입고 음악을 듣되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했고, 또 스스로 말하기를, ‘요동(遼東)에서도 역시 음악을 사용하였소.’ 하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부득이하여 음악을 사용하였었고, 정통(正統) 때에는 역월(易月)의 기한이 이미 다했던 까닭으로, 채붕·나례를 베풀고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늘날 태상 황제의 일은 매우 가슴아픈 일이나, 그러나 승하한 것이 아닌즉 어찌 흉례(凶禮)로써 이를 처리할 것이며, 그리고 조칙을 맞이할 때에도 이미 격례(格例)가 이루어진 그전 일을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더구나, 금상 황제는 정통의 아들이 아니어서 부자의 사이와 다르니, 만약 조칙을 맞이하는 예절이 전자보다 감(減)함이 있게 되면 어찌 혐의가 없겠느냐, 채붕·나례는 정(情)으로써 말하면 미안하지만, 형세로써 보면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에 당하여 할 만한 일은 다 행함이 옳지, 갑자기 예문(禮文)에 없는 것이라 하여 행하지 않음은 불가한 것이다."
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126권 1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49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註 051]흉문(凶聞) : 죽었다는 소식.
○禮曹啓: "洪熙、宣德兩皇帝登極詔使之來, 不用彩棚儺禮, 至正統時乃用之。 今必詔使又來, 然太上皇帝陷虜庭, 非常時之比, 彩棚儺禮, 似若喜慶, 恐或未安。" 上曰: "洪熙、宣德之時, 易月之制, 未畢故耳。 今日之事, 雖天下所痛憤, 然無凶問, 彩棚儺禮, 似難廢也, 其與政府更議。" 左參贊鄭苯、右參贊鄭甲孫議云: "太上王非大行之比, 今新皇帝卽位, 詔使之迎, 廢已行之舊禮, 豈安於心! 如其廢之, 多所防礙。 迎詔及開讀之時, 鼓吹不可不作, 使臣宴享用樂, 亦不可已, 今拜表亦當用鼓吹矣。 彩棚儺禮, 若以太上皇故而爲可廢, 則鼓吹宴享, 亦當除之矣。 借曰鼓吹宴享, 亦可除之, 則方今新皇帝卽位, 四方來賀之時, 中國豈不用樂乎! 中國尙用樂, 而我國不用樂, 則無乃不可乎? 故以太上皇故而不設彩棚儺禮, 斷不可也。 但今大明藩國迎詔儀, 只於街巷及館門, 結彩而已, 無設彩棚儺禮之文。 國家事朝廷, 凡事一遵華制, 旣禮文所無而戲謔之, 弊事也, 何必因循不革乎! 願自今凡迎詔勑, 永罷彩棚儺禮。 如此則於義甚順, 而無所防礙矣。 今雖不設, 使臣必不問其故, 設使問之, 以此意開論, 則彼必以爲善矣。"
領議政黃喜、左議政河演、右議政皇甫仁同苯等議。 命世子引見禮曹判書許詡、都承旨李思哲曰: "昔洪熙皇帝登極使來, 不設彩棚儺禮, 初非不欲設也。 議政許稠獻議云: ‘但設彩棚, 不設儺禮。’ 予以爲迂遠也, 彩棚儺禮, 已令備之。 其時使臣李琦, 知禮者也, 常著素服。 非唯彩棚儺禮, 宴享用樂, 亦令除之。 禮官問讀詔時蹈舞節次, 琦曰: ‘舞蹈, 何可廢也! 此外可除之事, 竝皆除之。’ 以故不設彩棚儺禮。 至宣德之時, 據洪熙之例而不設, 其時使臣著吉服聽樂, 不以爲怪。 且自言曰: ‘遼東亦且用樂矣。’ 故我國不得已用樂。 及正統時, 易月之期已盡, 故設彩棚儺禮, 不以爲疑。
今太上皇帝之事, 痛切心肝, 然非昇遐, 則豈可以凶禮處之而迎詔之時, 乃不行已成格例之舊事乎! 況今皇帝, 非正統之子, 異於父子之間, 若迎詔之禮, 有減於前, 則烏得無嫌乎! 彩棚儺禮, 以情言之, 行之未安; 以勢觀之, 不得不爲。 當今之時, 可爲之事, 當盡行之, 不可遽以禮文所無而不爲也。"
- 【태백산사고본】 39책 126권 1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49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