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사 영접례 군사 상제 변란시의 방비책 등에 대해 논의하다
통사 김신(金辛)이 치보(馳報)하기를,
"신이 8월 17일에 청석령(靑石嶺)에 이르러 요동 지휘(遼東指揮) 왕무(王武)가 칙서(勅書)를 가지고 온 것을 보았는데, 무(武)가 말하기를, ‘강을 건넌 제5일에 귀국의 서울에 들어가려 한다. ’고 하고, 칙지(勅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더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황제께서 7월 17일에 친히 6군(軍)을 거느리고 거용관(居庸關)을 나와 대동성(大同城)에 이르셨는데 달달(達達)이 패하여 도망가매, 황제 역시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8월 18일에 어가(御駕)를 되돌리셨습니다."
하니, 좌의정 하연(河演)·우의정 황보인(皇甫仁)·좌참찬 정분(鄭苯)·우참찬 정갑손(鄭甲孫)·예조 판서 허후(許詡)를 불러 말하기를,
"내 풍질(風疾) 때문에 칙서를 친히 맞이하지 못하겠으나, 세자로 하여금 대신 행하려 하니, 이 뜻을 미리 사신(使臣)에게 알리라."
하고, 곧 원접사(遠接使)로 한성부 윤 김하(金何)를 의주(義州)에 보내고, 또 선위사(宣慰使)로 중추원 부사 안진(安進)을 안주(安州)에, 병조 참판 박중림(朴仲林)을 평양(平壤)에, 동지중추원사 양후(楊厚)를 황주(黃州)에, 형조 참판 조극관(趙克寬)을 개성부(開城府)에 보내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황제가 친히 정벌하심을 이미 천사(天使)에게 들었으니,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흠문기거사(欽問起居使)를 마땅히 보내야 할 것이니, 빨리 사람을 택하라."
하니, 모두가 대사헌 조수량(趙遂良)을 천거하매,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영칙(迎勅)을 대행(代行)하는 의주(儀注)에 세자가 전내(殿內)에 들어와 칙서를 대신 받는가. 칙서를 받는 예(禮)가 없는가. 예전에는 대신 받았던 일이 있었으니, 세자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함이 어떻겠는가."
하니, 하연(河演)은 말하기를,
"대신 받는 것이 가하겠습니다."
하고, 인(仁) 등은 말하기를,
"비록 옛일이 있으나, 대신 받아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매, 임금이 연(演)의 의논을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의 의장(儀仗)은 지금 대의장(大儀仗)을 사용하는데 행로(行路)·전정(殿庭)·관정(館庭)에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하매, 모두 말하기를,
"의장(儀仗)을 노상(路上)에서는 좌우로 나눠 가게 하되, 동궁이 중도(中道)로 가지 않게 하고 전정(殿庭)에서는 지존(至尊)의 의장을 사용하더라도 들어가지 아니하고 근정문(勤政門) 밖에 머무르게 하고, 태평관(太平館)에 이르러 뜰에 들어와서는 좌우로 나눠 서게 함이 좋겠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예전에 내 사조용의(四爪龍衣)를 입었었는데, 뒤에 듣자니 중국에서는 친왕이 오조용(五爪龍)을 입는다기에 나도 또한 입고 천사(天使)를 대접했는데, 그 뒤에 황제가 오조용복(五爪龍服)을 하사하셨다. 지금 세자로 하여금 사조용(四爪龍)을 입게 하면 내게도 혐의로울 것이 없고 중국의 법제에도 잘못됨이 없겠다."
하매, 모두 말하기를,
"진실로 마땅하나이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삼년지상(三年之喪)을 우리 나라에서 일찍이 행하지 아니하다가 뒤에 모두 행하였는데, 이직(李稷)이 헌의(獻議)하기를, ‘군사들이 만일 삼년상(三年喪)을 행하면 임용할 만한 자가 적다.’ 하였으나, 내 그르게 여겨 삼년상을 모두 행하게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아름다운 법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의 사변이 긴급하니, 우선 군사들에게 단상(短喪)토록 하여 임용할 만한 자가 있으면 삼년상내에 있더라도 병조에서 자체적으로 사용토록 하고, 사변이 잠잠해지면 다시 예전대로 시행함이 어떻겠느냐."
하니, 모두 말하기를,
"군사의 상제(喪制)가 이미 《육전(六典)》에 기록되었으니, 다시 다른 법을 만들 수 없사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 옛일을 본 것이 적지 않다. 옛 현철(賢哲)이 나이는 젊어도 큰 일을 결정하였으니, 등우(鄧禹)는 광무(光武)를 알고 섬겨 드디어 대업(大業)을 이루었고, 당(唐) 태종(太宗)도 또한 대사(大事)를 일으켜 마침내 천하를 얻었으며, 우리 나라의 일로 말하더라도 이숙번(李叔蕃)도 젊은 나이에 우리 태종(太宗)을 보필하여 큰 공을 이루었으니, 이는 다 지략이 남보다 뛰어나 능히 유악(帷幄) 안에서 계획을 세워 천리 밖에 승리를 결정한 자들이다. 내 나이 젊지 않으며 본 바도 적지 않은데, 중요한 일을 과단함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니 심히 부끄러이 여기노라. 옛적 동진(東晉)에 노순(盧循)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남방(南方)의 적은 도적이었다. 맹창(孟昶)이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임금을 모시고 피하려고 하매, 유유(劉裕)가 말하기를, ‘피하지 말고 굳게 지키자.’ 하였다. 맹창(孟昶)이 믿지 않고 죽으려 하니, 유유(劉裕)가 말하기를, ‘싸움이 패한 후에 죽어도 늦지 않다.’ 하였으나, 창이 듣지 않다가 죽었는데, 뒤에 유(裕)가 드디어 이겼으며, 사안(謝安)은 부견(符堅)의 대거(大擧)한 때를 당하여도 손님을 맞아 바둑을 두면서 거동이 태연하고 야외(野外)에 나가 놀므로 진(晉)나라 사람들이 힘입어서 안정하였으며, 오(吳)나라 손호(孫皓)는 적국을 경멸하여 유의하지 않다가 적병이 성에들어와 임금을 잡은 후에야 국민이 드디어 알았고, 고려 공민왕 때에는 홍군(紅軍)이 쳐들어왔는데 적변을 보고한 자가 있었으나 적이 따라 들어와 경성을 함락시키니 공민이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이것을 본다면 맹창(孟昶)은 너무 두려워하는 데 잃었고, 사안(謝安)은 두려워하지 않는 데 얻었으며, 손호(孫皓)와 공민(恭愍)은 두려워하지 않는 데 잃은 것이다. 이제 광녕(廣寧)의 성식(聲息)을 처음 듣고 사람들이 모두 소동했지만, 내 마음은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서워할 것이 없다. 옛 사람이 큰 일을 당할 적에 반드시 일을 임해서는 두려워하고 지모를 내어 성사시키라 하였는데, 일을 임해서 두려워 하는 것은 두려울 것이 없지 않다는 것을 말함이요, 지모를 내어 성사시킴은 두려워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지금 너무 두려워하여 소요스러울 것도 없고, 또한 두려워하지 않아 방비를 잊어서도 안 되는 것이니, 이 두 가지를 요량하여 알맞게 처리하라. 경 등은 이 뜻을 알아 포치(布置)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125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5책 146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軍事) / 인사-관리(管理) / 왕실-국왕(國王) / 의생활-관복(官服) / 역사-고사(故事)
○己卯/通事金辛馳報: "臣八月十七日, 到靑石嶺, 見遼東指揮王武齎勑書出來, 武曰: ‘越江第五日, 欲入王京。’ 不言勑旨辭因。 且曰: ‘皇帝七月十七日, 親御六軍, 出居庸關, 至大同城, 達達敗走。 帝亦不窮追, 八月十八日, 回駕。’" 召左議政河演、右議政皇甫仁、左參贊鄭苯、右參贊鄭甲孫、禮曹判書許詡曰: "予以風疾, 未得親迎勑書, 使世子代行, 預諭此意于天使。" 卽遣遠接使漢城府尹金何于義州, 又遣宣慰使中樞院副使安進于安州, 兵曹參判朴仲林于平壤, 同知中樞院使楊厚于黃州, 刑曹參判趙克寬于開城府。 又曰: "皇帝親征, 已聞於天使, 豈虛語哉! 欽問起居使, 固當遣也, 其亟擇人。" 僉擧大司憲趙遂良, 從之。 上又曰: "代行迎勑儀注, 世子入殿內, 代受勑書乎? 無受勑之禮乎? 古有代受之事, 令世子代受如何?" 河演曰: "代受爲便。" 仁等曰: "雖有故事, 不須代受。" 上從演議。 上曰: "世子儀仗, 今作大儀仗。 其行路及殿庭館庭何?" 僉曰: "儀仗於路上左右分行, 東宮不由中道行, 殿庭則雖至尊, 儀仗不得入, 止于勤政門外, 到太平館, 入庭分立左右爲便。" 上曰: "可。" 又曰: "昔予服四爪龍衣, 後聞中朝親王服五爪龍, 予亦服之, 以待天使, 其後, 帝賜五爪龍服。 今令世子服四爪龍, 則於我無嫌, 於朝廷法制, 亦無妨焉。" 僉曰: "允當。" 從之。 上又曰: "三年之喪, 我國未曾行焉, 後皆行之, 而李稷獻議: ‘軍士若行三年喪, 則可任用者少。’ 予以爲非, 遂令盡行三年喪, 此固美法也。 然今中國事變緊急, 姑令軍士短喪。 若有可用者, 雖在三年之內, 令兵曹得自敍用, 待事變寢息, 更依舊施行何如?" 僉曰: "軍士喪制, 已載《六典》, 不可更立他法。" 上曰: "然。" 又曰: "予觀古事, 非不多也。 古之賢哲, 雖年少, 決定大事, 如鄧禹知光武而附之, 遂成大業; 唐 太宗亦能擧大事, 終得天下。 以我國之事言之, 李叔蕃亦在年少, 輔我太宗, 克成大功, 是皆智略絶人而能運籌帷幄之中, 決勝千里之外者也。 予今年歲不爲少也, 所見不爲寡也, 果斷事機, 不及古人, 以是爲愧。
昔在東晋 盧循叛, 特南方一小賊耳, 孟昶懼其不勝, 欲奉其主避之, 劉裕曰: ‘不如不避而固守也。’ 孟昶不信, 欲死之, 劉裕曰: ‘待戰敗死, 未晩也。’ 昶不聽而死, 後裕遂克之。 謝安當符堅大擧之時, 對賓圍碁, 擧止自若。 且出遊野外, 晋人賴以安靜。 吳 孫皓輕蔑敵國, 不以爲意, 敵兵入城, 已執其君, 然後國人乃知。 高麗 恭愍之時, 紅軍闌入, 有報賊變者, 而賊隨至, 遂陷京城, 恭愍僅以身免。 由是觀之, 孟昶失於過畏者也, 謝安得於不畏者也, 孫皓、恭愍失於不畏者也。
今初聞廣寧聲息, 人皆騷動, 而於予心, 一則以懼, 一則以爲不足畏也。 古人當大事, 必云: ‘臨事而懼, 好謀而成。’ 臨事而懼, 謂不可無畏也; 好謀而成, 謂不可徒畏也。 故今不可過畏而騷擾, 亦不可無畏而忘備, 當量其二者之間, 適中以處之, 卿等知此意布置。"
- 【태백산사고본】 39책 125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5책 14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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