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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25권, 세종 31년 8월 20일 정묘 1번째기사 1449년 명 정통(正統) 14년

영중추원사 이순몽의 졸기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이순몽(李順蒙)이 졸(卒)하였다. 순몽(順蒙)영양군(永陽君) 응(膺)의 아들로 풍자(風姿)가 뛰어났었다. 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라 무과(武科)에 급제, 여러 번 옮겨 총제(摠制)가 되었다. 대마도의 정벌에 나서 여러 장수들이 모두 패했으나 오직 그 휘하의 군대만 손실 없이 돌아왔고 또 야인의 북벌(北伐)에 나가서 자못 공적이 있었는데, 무예가 남보다 뛰어나지 않는데도 가는 데마다 공(功)을 세우므로 당시 사람들이 복장(福將)이라 말하였다. 또 아우와 누이동생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으므로 어루만져 기르기를 심히 돈독하게 하였고, 자라서는 혼수를 갖추어 혼인시켰으며, 만일 궁핍하게 되면 구휼하여 주기를 두터이하여 자기 아들과 꼭같이 하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그러나, 사람 됨됨이 욕심많고 난폭하고 음란하여 겉으로는 뜻이 크고 강직한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실상 교활하여 재물을 탐내기를 한정없이 하여 여러 거만(鉅萬)을 헤아렸으며, 경기·경상도에 전원(田園)을 넓게 차지하고 곡식을 내어 이식(利息)을 취하되 빚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지완(遲緩)하게 되면 가산(家産)을 모두 빼앗아 생업을 탕진시켰고, 수주(守主)의 노복(奴僕)이 만일 두승(升斗)이라도 모자라면 무섭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혹 귀를 베기까지 하였고, 취렴(聚歛)하기를 오로지 일삼아 있는 데마다 위협하여 빼앗았다. 또 권세 있고 벼슬 높은 이를 사귀어 뜻을 굽혀 아첨하고, 조사(朝士)로 조금 명망(名望)이 있는 자가 절조를 굽혀 굽실거리면 두터이 서로 증유(贈遺)하지만, 조금만 뜻을 거스리면 문득 도로 거두었다. 일찍이 군기감 제조(軍器監提調)로 있을 적에 관청 물건을 사적으로 사용하되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고, 공장(工匠)을 시키기를 노예같이 하였다. 매번 새로 제수된 감사나 수령들도 또한 후하게 증유(贈遺)하였는데, 그 뒤에 보답하여 증유하기를 열곱이나 하게 하였으며, 남의 노비와 처첩(妻妾)과 전산(田産)을 빼앗은 것을 이루 기록할 수가 없다. 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은 임금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임금이 매우 사랑하는 것을 알고는 마침 이염(李琰)이 그 집에서 피병(避病)하게 되니, 그 인연(因緣)으로 수양(收養)을 삼아서 이염의 생일 때마다 금·은과 진귀한 보물을 선사하기를 셀 수 없이 하고 황금으로 적은 수레와 소를 만들어서 아부하여 임금에게 총애를 굳게 하니, 임금도 또한 대접하기를 후하게 하여 벼슬을 극품(極品)에 올리고, 항상 하사하기를 특별히 후하게 하여 어주(御廚)의 진기한 음식을 하사하기를 끊임없이 하였다. 또 주견(紬絹)과 면포(綿布)를 환수(宦竪)와 나인(內人)에게 주어 그들의 마음을 굳게 맺어 놓았으므로, 좌우(左右)에서 다투어 칭찬하게 되어 총애가 더욱 높아져서 여러 신하가 비할 자가 없었고, 비록 죄책(罪責)이 있더라도 은혜로 용서하여 주심을 입으니, 더욱 거만하여 어려워함이 없어서 일찍이 무슨 일이 있어 첩의 딸을 차[蹴]서 죽이기도 하였다. 희첩(姬妾)을 많이 데리고 살아 10여 인이나 되었다. 그 아내가 죽으매, 진사(進士) 이회(李檜)의 아내 권씨(權氏)가 새로 과부가 되었는데 자색(姿色)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장가들고자 하였다. 권씨가 처음에 따르지 아니하였는데, 권씨의 어미 집에서 일찍이 순몽(順蒙)의 곡식을 빌어먹었으므로 순몽이 징납하기를 몹시 급하게 하니, 그 집에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리고 잇따라 달래고 또 위협하면서 말하기를,

"권씨의 어미도 과부이니 만일 듣지 아니하면 내 임금에게 아뢰어 그 어미에게 장가들겠다."

하니, 이에 권씨의 집에서 허락하였다. 당시의 권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집에 있었는데, 순몽과 약속하고는 권씨가 그 집을 도망쳐 나오매, 아이들이 울부짖으면서 어머니를 찾으니 듣는 이들이 눈물을 흘리었다. 장가간 지 며칠 후에 잔치를 베풀었는데 순몽이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찬물(饌物)을 들고 권씨에게 이르기를, ‘만일 나를 사랑한다면 이 음식을 먹으라.’ 하매, 권씨가 곧 받아먹으니,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소매로 얼굴을 가리었다. 그 음흉하고 방종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졸(卒)하매, 조회를 그만두고 부의를 내리기를 더하게 하였다. 시호는 위양(威襄)이라 하니, 용맹스러워 굳세고 과단성 있는 것이 위(威)이고, 갑주(甲胄)로 공로 있는 것이 양(襄)이다. 아들은 없고 기첩(妓妾)의 아들이 있으니, 이름은 석장(石杖)인데 음란하고 방종스러움이 그 아버지와 같았다. 일찍이 그 아버지의 애첩(愛妾)을 간통하였으므로 추한 소문이 널리 퍼지었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125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43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친(宗親) / 가족-가족(家族)

○丁卯/領中樞院事李順蒙卒。 順蒙, 永陽君 之子。 風姿魁偉, 以蔭補官, 擢武擧, 累遷摠制, 從征對馬島, 諸將皆敗績, 獨全軍而還。 又北伐野人, 頗有勞績, 武藝不踰於人, 所至立功, 時人謂之福將。 又同父弟妹, 早失怙恃, 撫育甚篤, 及長, 爲備資粧昏嫁, 若遇貧乏, 則賑與優厚, 有同己子, 時人多之。 然爲人貪暴荒淫, 外若狂直, 內實狡黠, 黷貨無厭, 貲累鉅萬。 於京畿慶尙道, 廣占田園, 糶穀取息, 負債者少有稽緩, 盡奪家産, 生業蕩然。 守主奴僕, 若斗升虧欠, 嚴加酷刑, 或至劓耳, 專事聚斂, 所在劫奪。 又交結權貴, 曲意媚事, 朝士稍有名望者, 折節下之, 厚相贈遺, 小忤意, 輒還收之。 嘗提調軍器監, 私用官物, 略無疑忌, 使工匠如奴隷。 每有新除監司守令者, 亦厚贈之, 其後報遺十倍。 奪人奴婢妻妾田産, 不可勝紀。 永膺大君 , 上愛子也。 知上鍾愛, 適避病于其家, 因緣稱爲收養, 每遇生日, 贈遺金銀珍寶無算, 至以黃金作小車及牛媚之, 以固寵於上。 上亦待之厚, 致位極品, 常賜特厚, 御廚珍羞, 賜遺絡繹。 又以紬絹緜布贈宦竪內人, 固結其心。 由是左右爭譽, 寵眷益隆, 群臣無比, 雖有罪責, 曲蒙恩宥, 益倨傲無忌憚。 嘗以事蹴殺妾女, 多畜姬妾, 至十餘人。 其妻死, 聞進士李檜權氏新寡, 有姿色, 欲娶之, 初不從。 母家嘗貸順蒙粟, 順蒙徵納甚急, 其家不勝苦, 從而誘之, 且脅曰: "母亦寡, 如不從, 吾當啓于上, 娶其母也。" 於是家許之。 時率兒子在夫家, 旣與順蒙約, 逃還其家, 兒號呼索母, 聞者爲之垂涕。 娶後數日設宴, 順蒙於衆中, 擧饌物謂曰: "如愛我, 當食此物。" 卽受食之, 滿座掩袂, 其淫縱類此。 及卒, 輟朝賻贈有加。 諡威襄, 猛以剛果威, 甲冑有勞襄。 無子。 有妓妾子曰石杖, 淫縱如其父。 嘗蒸其父愛妾, 醜聲流播。


  • 【태백산사고본】 39책 125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43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친(宗親) / 가족-가족(家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