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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23권, 세종 31년 3월 26일 병오 2번째기사 1449년 명 정통(正統) 14년

삭천 부사 박호문이 사람을 매질해 죽였는지의 여부 조사와 윤배에게 형장을 가할 것인지를 의논하다

처음에 삭천(朔川) 사람 김영뢰(金永賴)가, 부사(府使) 박호문(朴好問)김을지(金乙之)노민(盧敏)을 매질해 죽인 것을 호소하였으므로, 이에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강맹경(姜孟卿)과 한성 소윤(漢城少尹) 허눌(許訥)을 보내어 가서 국문하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병고(病故)라고 이르고, 또 영뢰도 죽어서 안험(按驗)할 수 없었는데, 맹경 등이 이에 이르러 무덤을 파서 검시(檢屍)하기를 청하니, 좌의정 하연(河演)·우의정 황보인(皇甫仁)·좌찬성 박종우(朴從愚)·우찬성 김종서(金宗瑞)·우참찬 정갑손(鄭甲孫) 등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 맹경 등이 김을지노민의 시체를 검시하기를 청하니, 이를 어떻게 할까. 나는 박호문을 가두고 대신을 보내어 국문하고자 하는데 어떨까. 그렇지 못하면 다시 다른 사람을 보내어 국문하고, 또 그렇지 못하면 맹경 등으로 하여금 감사(監司)와 함께 추국(推鞫)하게 함이 어떨까."

하니, 모두 아뢰기를,

"김을지노민의 죽음이 작년 3월과 6월에 있었으므로, 살이 이미 썩어서 상고할 수없으며, 또 이미 두 조관(朝官)을 보냈으니 다시 다른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고, 감사는 일이 번거롭고, 또 하루 이틀에 국문할 일이 아니오니, 함께 국문하게 할 수 없습니다. 호문은 말이 간사하지 아니하오니 수금(囚禁)할 수 없고, 또 가볍게 체임(遞任)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윤배(尹培)의 죄가 비록 크다고 하나, 공신의 후손으로 불충(不忠)과 불효(不孝) 외에, 또 형장을 치는 것이 있는가, 만약 경들이 가하다고 하면 형장을 치고자 한다."

하니, 모두 아뢰기를,

"이현로는 공신의 자손이기 때문에 형장(刑杖)을 받지 아니하였으나, 죄를 범한 바로써 말하면 현로는 더욱 심한 자입니다. 윤배는 어리석고 모자라는 사람이오니, 최순(崔淳)의 일을 사람들이 모두 현로가 참여해 안다고 의심하옵니다. 대저 청탁(請托)은 먼저 친구에게 하는 것이므로, 현로가 궐내(闕內)에 출입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반드시 먼저 최읍(崔浥)의 청을 듣고, 일의 성패(成敗)는 윤배에게 맡겨서, 가만히 그 형세를 보아서 일이 이루어지면 공을 자기에게 돌리고, 일이 실패하면 죄를 윤배에게 돌리려고 함이었으니, 그 간사함이 더할 수 없습니다. 지금 현로를 다만 직첩만을 거두고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였으니, 그 벌이 너무 가볍습니다. 이와 같으면 윤배만 매질하는 것이 부당하옵니다. 만약 윤배에게 형장 1백 대에 유(流) 3천 리에 처한다면, 현로도 마땅히 형장 1백 대에 도(徒) 3년에 처할 것이며, 만약 현로에게 매질하지 아니한다면, 윤배는 삼공신(三功臣)의 후손이옵고, 현로는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후손이오니, 그 공신 됨이 또한 등급이 있으니 어찌 삼공신을 원종 공신의 예(例)에 비하오리까. 현로에게 매를 치지 아니하면 윤배에게도 매를 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억지로 내 뜻을 고집하려고 함이 아니다. 현로의 죄는 진실로 윤배와 격하게 다르다."

하니, 하연 등이 아뢰기를,

"현로의 죄는 진실로 윤배만 못하지 아니하온데, 한 사람은 형장 1백 대에 유(流) 3천 리에 처하고, 한 사람은 직첩만 거두고 외방에 부처하여, 죄는 같고 형벌은 다르니, 공도(公道)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신 등의 청을 좇으시어 현로도 형장 1백 대에 도(徒) 3년에 처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현로의 아비 이효지(李孝之)는 나의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다. 내가 본디 현로를 알지 못하였었는데, 언문청(諺文廳)을 처음 실시할 때에 현로도 참여하여 비로소 알았다. 그러나, 그 심술(心術)과 학술(學術)이 바르지 못한 것은 내가 이미 알았고, 황보인이 찬성으로 있을 때에 이미 더불어 말하였으나, 온전한 재주는 대개 적으므로, 각각 그 재주에 따라 쓴 것이니, 내가 현로에게 어찌 감히 사정(私情)을 두리오. 현로는 광망(狂妄)한 소질로서 본래 최읍과 사귀었는데, 그 청을 듣지 아니하고 곧 말하기를, ‘차례가 당하면 하겠다. ’고 하였으니, 그 마음이 오히려 가상하다. 오늘날에 이르러 김세민을 타일러서 자수하게 하고, 또 권기(權琦)를 보복하려고 하였으니, 심술이 바르지 못한 것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예전에 자객(刺客)이 소진(蘇秦)을 찔러, 진(秦)이 죽음에 다달아서 이르기를, ‘내 몸을 거열(車裂)하면 나를 찌른 자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나타나거든 잡아 죽이라. ’고 하였으니, 그 글을 읽으면 지금까지 사람들로 하여금 얼굴을 찌푸리게 한다. 현로의 일도 바로 이와 같으니, 그의 불초(不肖)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리오. 비록 그러하나, 지금 모두 환관(宦官)과 교결(交結)한 것을 허물하나, 그때 언문청에 있던 자로서 누가 사귀어 좋아하지 아니하였던가. 하물며 내가 듣건대, 환관(宦官)의 집에 내왕하는 자로는 권제(權踶)이촌(李村)을 수양(收養)으로 삼은 것 같은 일이 있었으니, 환관과 교결(交結)하는 자가 어찌 없겠는가, 지금 승정원·의금부·의정부·대간에서 같은 소리로 현로를 불초하다고 하고, 윤배에 대해서는 모두 어리석다고 말하니, 그 많은 간사한 꾀가 어찌 어리석은 자의 소위(所爲)이겠는가. 또 강희는 갑사(甲士)를 시취(試取)할 때에 함극명(咸克明)의 창(槍)이 능하지 못한 것을 거짓으로 한번 맞혔다고 하였으니, 불초함이 심하거늘, 조금도 허물하지 아니하고 매양 현로를 가지고 말하니, 이러한 뜻을 나는 진실로 알지 못하겠다."

하니, 하연 등이 대답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세자가 하연 등을 인견(引見)하고 상교(上敎)를 전과 같이 전하니, 하연 등이 또한 전과 같이 대답하였다. 하연·박종우·정분·정갑손 등을 먼저 물러가도록 명하고, 황보인·김종서 및 의금부 제조 허후를 머무르게 하여 의논하기를,

"현로의 죄는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끝내 바꿀 수 없다. 오직 윤배에게 결장(決杖)할 여부(與否)는 좇을 바를 알지 못하니,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옳을까. 이영서(李永瑞)는 종척(宗戚)에 관련되고, 또 근시(近侍)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나, 이 까닭으로 가볍게 논할 수 없고, 다만 일이 애매하니 어떻게 처리할까. 현로와 같이 죄를 과(科)함이 어떨까. 송수중(宋守中)의 율(律)은 너무 중(重)하지 않을까. 나는 논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떨까."

하니, 황보인이 아뢰기를,

"윤배는 좌명 공신(佐命功臣)의 자손이오니, 죄를 용서함이 후손(後孫)에까지 미침은 서문(誓文)에 실려 있습니다. 대저 사죄(死罪)를 감등(減等)하면 모두 결장(決杖) 1백 대에 유(流) 3천 리에 처하옵니다. 지금 윤배에게 형장을 치면, 공신의 자손이 다른 사람과 다름이 없을 것이오니, 형장은 면하고 직첩을 거두어 유(流) 3천 리에 처함이 적당하옵니다."

하고, 종서허후는 아뢰기를,

"현로는 진실로 소인(小人)입니다. 소인은 나라를 해롭게 함이 심히 크기 때문에. 소인을 다스리기를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모름지기 중하게 논죄하여 그 간사함을 징계함이 마땅하옵니다. 만약 현로에게 형장을 치면 윤배도 마땅히 형장을 칠 것이오나, 만일 현로에게 형장을 치지 아니한다면, 윤배만을 매질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또 두 사람의 죄는 심히 현격하게 다르지 아니하온데, 율(律)이 차등이 있으면 불가함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황보인 등이 또 아뢰기를,

"영서의 죄는 현로와 같이 할 수 없으니, 부처(付處)하지는 말고 직첩만 거두며, 수중(守中)은 ‘마땅히 아뢸 것을 아뢰지 아니한 율’에 따라 논죄하면 실정과 율(律)이 서로 어긋남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중의 율은 내가 마땅히 고칠 것이나, 현로의 일은 내가 끝내 들을 수 없다."

하고, 인하여 영서는 직첩만 거두고, 수중은 논하지 말며, 윤배는 결장(決杖)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에 김세민영광(靈光)으로, 강희풍천(豐川)으로, 이현로남평(南平)으로 부처하고, 윤배해남(海南)으로 유배(流配)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123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23면
  • 【분류】
    사법-재판(裁判) / 인사(人事)

○初, 朔川金永頼訴府使朴好問, 杖殺金乙之盧敏, 乃遣知承文院事姜孟卿、漢城少尹許訥, 往鞫之, 邑人皆云: "病故。" 且永頼亦死, 未得按驗。 孟卿等至是請掘塚檢屍, 召左議政河演、右議政皇甫仁、左贊成朴從愚、右贊成金宗瑞、右參贊鄭甲孫謂曰: "今孟卿等請檢視金乙之盧敏屍, 何以爲之? 予欲囚朴好問, 遣大臣鞫之, 何如? 不爾則更遣他人鞫之, 又不爾, 則令孟卿等同監司推鞫, 何如?" 僉曰: "金乙之盧敏之死, 在前年三月六月, 肌膚已朽, 無從可考。 且已遣兩朝官, 不必更遣他人。 監司事煩, 且非一二日所鞫之事, 不可使之同鞫。 好問則辭不奸涉, 不可囚禁, 亦不可輕易遞任。" 上又曰: "尹培之罪固大矣。 然功臣之後, 不忠不孝外, 亦有杖之者乎? 若卿等以爲可也, 則欲杖之。" 僉曰: "賢老以功臣之後不受杖, 以所犯言之, 賢老尤其甚者。 若尹培, 昏愚殘劣之人, 崔淳之事, 人皆疑賢老與知。 大抵請托先附於親舊, 賢老出入闕內已久, 必先聽崔浥之請, 事之成敗, 委諸尹培, 徐觀其勢, 事成則歸功於己, 事敗則歸罪於, 其爲奸詐莫甚。 今賢老只收職牒, 外方付處, 其罰大輕, 如此則不當獨杖尹培。 若尹培杖一百流三千里, 則賢老亦當杖一百徒三年。 若不杖賢老, 則尹培三功臣之後, 賢老原從功臣之後, 其爲功臣, 亦有等級, 豈可以三功臣, 比諸原從功臣之例乎! 不杖賢老, 則尹培亦不可杖也。" 上曰: "予非欲强執己意, 賢老之罪, 實與尹培懸絶也。" 等曰: "賢老之罪, 固不下於尹培, 而一則杖一百流三千里, 一則只收職牒, 外方付處, 罪同罰異, 有違公道, 須從臣等之請, 賢老亦杖一百徒三年。" 上曰: "賢老之父孝之, 予原從也。 予本不知賢老, 初置諺文廳時, 賢老亦與焉, 乃始知之。 然其心術學術之不正, 予已知之。 皇甫仁爲贊成時, 已與言之, 然全才蓋寡, 各隨其才用之, 予之於賢老, 何敢私之! 賢老以狂妄之質, 素交崔浥, 而不聽其請, 乃曰: ‘例當則爲之。’ 其心猶爲可嘉, 至於今日, 誘世敏以自首, 又欲報復權琦, 心術不正, 何可勝言! 昔有刺客刺蘇秦, 臨死謂曰: ‘車裂我身, 刺我者必現, 現則執而殺之。’ 讀其書, 至今使人皺顔。 賢老之事, 正與此相類, 彼之不肖, 予豈不知! 雖然今皆以交結宦官爲咎, 其時在諺文廳者, 孰不交好! 況予聞來往於宦官之家者, 有如權踶李村爲收養, 豈無交結宦官者乎! 今承政院、義禁府、議政府、臺諫同聲以賢老爲不肖, 至於尹培, 皆曰昏愚, 其多般詐謀, 豈昏愚者所爲乎! 又姜曦試甲士, 而咸克明不能槍, 誣以爲一中, 不肖甚矣, 略不爲咎, 每以賢老爲言。 如此之意, 予實不知。" 等對之如初。 世子引見等, 傳上敎如前, 等亦對如初。 命從愚甲孫先退, 留宗瑞及義禁府提調許詡議曰: "賢老之罪, 予意已定, 終不能易也。 唯尹培決杖與否, 未知所從, 將何處而可? 李永瑞聯系宗戚, 且(近待)〔近侍〕 已久, 然不可以此而輕論, 但事涉曖昧, 何以處之? 欲與賢老同科罪之, 何如? 宋守中之律, 無奈大重乎? 予欲勿論, 何如?" 曰: "尹培, 佐命功臣之後也。 宥及後世, 載在誓文。 大抵死罪減等, 則皆決杖一百流三千里, 今若杖, 則功臣之後, 與他無異, 免杖收職牒, 流三千里爲便。" 宗瑞曰: "賢老, 誠小人也。 小人之有害於國家甚大, 故治小人不可不嚴, 須當重論, 以懲其姦。 若杖賢老, 則尹培亦當杖之, 如其不杖賢老, 則獨杖尹培未便。 且二人之罪, 不甚絶異, 而律則隔等, 無奈不可乎?" 等又啓曰: "永瑞之罪, 不可與賢老同科, 除付處, 只收職牒。 守中照以應奏不奏之律, 則情與律, 庶無相悖矣。" 上曰: "守中之律, 予當改之, 賢老之事, 予終不能聽也。" 仍命永瑞, 只收職牒; 守中, 勿論; 尹培, 除決杖。 於是, 付處金世敏靈光, 姜曦豐川, 李賢老南平, 流尹培海南


  • 【태백산사고본】 38책 123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23면
  • 【분류】
    사법-재판(裁判)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