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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123권, 세종 31년 3월 10일 경인 2번째기사 1449년 명 정통(正統) 14년

이명신·김신민·정지하·정차공·이교연·김계우·유효련·신후갑·홍심·민후생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명신(李明晨)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김신민(金新民)을 사간원 우사간 대부(司諫院右司諫大夫)로, 정지하(鄭之夏)정차공(鄭次恭)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이교연(李皎然)김계우(金季友)를 사간원 좌·우 헌납(司諫院左右獻納)으로, 유효련(柳孝聯)신후갑(愼後甲)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홍심(洪深)을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민후생(閔厚生)을 행 직예문관(行直藝文館)으로 삼았다. 나라 제도에 조관(朝官)이 복(服)을 마치고 담(禫)을 지낸 뒤에야 숙배(肅拜)할 수 있는데, 이명신은 담(禫) 전에 경솔히 숙배를 행하니, 임금이 명신이 이미 담을 지낸 줄로 생각하고 지중추원사로 삼았다. 사은(謝恩)함에 미쳐서 명신이 담복(禫服)으로 행하니, 임금이 비로소 담(禫)을 지내지 아니한 것을 알고, 유사(攸司)에게 추핵하기를 명하여 관교(官敎)를 거두었다. 명신(明晨)은 경조 잔열(輕躁孱劣)하나, 심종(沈淙)의 사위인 까닭으로 2품에 이르게 되었다. 후생(厚生)은 전 원평 부사(原平府使)로서 주자소 별좌(鑄字所別坐)가 되었는데, 이조 정랑(吏曹正郞) 강희안(姜希顔)의 집에 가서 벼슬을 구하되, 말이 심히 어수선하고 지리(支離)하여 그치지 아니하였다. 희안은 이때에 친구와 만나기를 약속하였으므로, 후생이 나가기를 기다려서 돌아가고자 하여 듣기가 이미 싫었는데, 작별하기에 미쳐서는 날이 이미 어두웠다. 희안이 돌아가지 못하여 드디어 약속을 잃고 탄식하기를,

"후생이 나이가 70이 되었고, 집이 부유한데, 어찌 녹(祿)을 위해 벼슬하는 것일까. 여러 대(代) 의관(衣冠)의 집이고, 몸이 또 아들이 없는데, 어찌 자손을 위하여 기가(起家) 하려는 것일까. 다만 천재 일우(千載一遇)로서 다시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따름이다."

하였다. 후생은 본디 문무(文武)에 별다른 재주가 없으므로, 있고 없음이 국가에 관계가 없고, 더욱이 늙고 병든 까닭에 정신이 어둡고 동작이 곤란하여, 억지로 얼굴을 들고 조정에 있기가 마땅하지 못하므로, 사림(士林)에서 비웃었고, 신진 후생(新進後生)에게 어두운 밤에 벼슬을 애걸하니, 희안의 이 말은 매우 미워하여 비난하는 말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123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21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以李明晨知中樞院事, 金新民爲司諫院右司諫大夫, 鄭之夏鄭次恭司憲掌令, 李皎然金季友司諫院左右獻納, 柳孝聯愼後甲司憲持平, 洪深知司諫院事, 閔厚生行直藝文館。 國制, 朝官服闋禫後, 乃得肅拜, 明晨於禫前經行之, 上意明晨已行禫, 有是拜。 及謝恩, 明晨以禫服行, 上始知爲未禫也, 命攸司劾之, 收官敎。 明晨輕躁孱劣, 以沈淙之壻得至二品。 厚生以前原平府使, 爲鑄字所別坐, 詣吏曹正郞姜希顔家求官, 言甚綢繆, 支離不已。 希顔時與友人期會, 待厚生出欲歸, 聽之旣厭, 及別, 日已昏矣。 希顔不得歸, 遂失期, 嘆曰: "厚生年垂七十, 家居富饒, 豈爲祿仕者耶? 累葉衣冠, 身且無嗣, 豈爲子孫起家者耶? 但以千載一時, 時難再得耳。" 厚生本無文武異才, 不關有無, 加以老病, 志慮昏耗, 擧止艱澁, 不宜强顔立朝, 士林鄙笑, 而屈己於新進後生, 昏夜乞哀。 希顔此語, 甚疾而譏之之辭也。


    • 【태백산사고본】 38책 123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21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