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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23권, 세종 31년 2월 22일 계유 1번째기사 1449년 명 정통(正統) 14년

《고려사》 개찬할 때 뜻대로 삭감한 권제·안지·남수문 등에 과죄하다

이조에 전지하기를,

"전자에 《고려사(高麗史)》가 소략(疎略)함에 지나쳐서 권제(權踶) 등에게 개찬(改撰)하기를 명하였더니, 이제 그 글을 보건대, 권제가 뜻대로 삭감하여서, 혹은 남의 청촉(請囑)을 듣고, 혹은 자기에게 관계되는 긴요한 절목(節目)은 모두 그 사실을 빠뜨렸다. 안지(安止)권제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도와 이루었으니, 참람함이 막심하매, 권제의 고신(告身)과 시호(諡號)를 추탈(追奪)하고, 또한 안지의 고신을 빼앗아 영영 서용(敍用)하지 말며, 낭청(郞廳) 남수문(南秀文)《고려사》의 일을 오로지 맡아서 당상관에 아부하였으니, 그 죄가 또한 같으니, 고신을 추탈하라."

하였다. 권제가 구사(舊史)를 깎고 보탠 것은 매우 자세하였다. 그러나, 채하중(蔡河中)의 어머니는 용강(龍崗)의 관비(官婢)이라, 사관(史官)이 모두 그 사실을 썼고, 윤회(尹淮)도 기록하였으며, 권제도 초고(初藁)에는 실었으나, 최사강(崔士康)의 청을 듣고 마침내 깎았으며, 또 제(踶)의 아버지 권근(權近)이 성지(聖旨)를 사사로 개탁(開坼)한 일을, 가 그 말을 왜곡(歪曲)되게 쓰고, 또 사초(史草)에는 권부(權溥)·권준(權準)·권고(權皐) 등의 행실을 낮추어 썼는데, 는 이것을 또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또 권부권수평(權守平)의 후손인데, 일찍이 《고려실록(高麗實錄)》을 수찬하다가, 수평이 죽으매, 그 세계(世系)가 미상(未詳)하다고 썼는데, 수평태조(太祖)026) 의 공신 권행(權幸)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의 죄가 오로지 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나, 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그 화(禍)가 미치는 것이 마땅하다. 안지는 성품이 나약(懦弱)하여 에게 견제(牽制)되어 같이 죄를 받았다. 처음에 임금이 권제 등의 보태고 깎은 것이 공정하지 못한 것을 알고, 안지를 불러 힐책하고, 또 그때의 사관(史官) 이선제(李先齊)·정창손(鄭昌孫)·신석조(申碩祖) 등을 불러 물으니, 어효첨김종서정인지에게 말하기를,

"경신년에 남수문과 더불어 같이 《고려사》를 편수하였는데, 묻기를, ‘채하중(蔡河中)의 일은 어찌하여 먹으로 지웠는가.’ 하니, 수문이 말하기를, ‘어찌 내가 한 일인가. 다만 당상(堂上)027) 의 명을 좇은 것이다.’ 하기에, 내가 곧 본초(本草)에 좇아 쓰고, 다만 필적(筆跡)을 다르게 하여, 남이 내가 쓴 것임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고 하매, 종서 등이 곧 들어가 아뢰게 하였더니, 이에 종서인지를 불러 의논하고, 또 효첨을 머물러 두고 유시(酉時)에서 해시(亥時)까지 이르러 파한 뒤 이 명이 있었다. 수문(秀文)은 널리 경사(經史)에 통하고 글에 고기(古氣)가 있었다. 처음에 사마천(司馬遷)을 모방하여 역사를 편찬하고자 하였으나, 중론(衆論)의 억제하는 바가 되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권제의 편찬한 《고려사》수문의 글이 많았으나, 성품이 좁고 꼿꼿하여 역사 편찬하는 일을 스스로 오로지 함이 많으니, 동류들이 마음으로 꺼리고, 안지수문의 오로지함을 미워하여 일찍이 좌중에서 꾸짖고 욕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123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19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 / 역사-전사(前史)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註 026]
    태조(太祖) : 왕건(王建).
  • [註 027]
    당상(堂上) : 권제를 가리킴.

○癸酉/傳旨吏曹:

前者《高麗史》失於疎略, 命權踶等改撰, 今觀其書, 任情減削, 或聽人請囑, 或自己干係緊關節目, 皆沒其實。 安止同心贊成, 汎濫莫甚。 其追奪告身及諡, 亦奪告身, 永不敍用。 郞廳南秀文專掌史事, 阿附堂上, 其罪亦同, 幷追奪告身。

刪潤舊史頗詳, 然蔡河中之母, 龍崗官婢也。 史官悉書其事, 尹淮亦紀之, 亦載初藁, 聽崔士康之請而終削之。 又私坼聖旨事, 迂曲其辭書之。 又史草貶書權溥權準權皐行實, 又不錄。 且, 守平後也。 曾修《高麗實錄》, 守平卒, 以未詳世系書, 而守平太祖功臣權幸之後。 罪雖不專在是, 所爲如是, 其及也宜。 性懦, 牽制於, 同受罪責。 初, 上知等筆削不公, 召詰之, 又召其時史官李先齊鄭昌孫辛碩祖問之。 魚孝瞻言於金宗瑞鄭麟趾曰: "歲庚申, 與南秀文同修史, 問曰: ‘蔡河中之事, 何以墨抹?’ 秀文曰: ‘豈我所能爲耶! 祇從堂上命耳。 吾卽從本草書之, 但異其筆跡, 不令人知吾書也。’" 宗瑞等卽令入啓, 乃召宗瑞麟趾議之。 且留孝瞻以問, 自酉至亥而罷, 乃有是命。 秀文淹通經史, 爲文有古氣, 初欲倣司馬遷撰史, 爲衆論所抑, 不果。 所撰史, 秀文筆居多, 然性褊剛, 史事多自專, 輩流心忌之。 亦惡秀文專, 嘗於坐中罵辱之。


  • 【태백산사고본】 38책 123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19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 / 역사-전사(前史)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