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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22권, 세종 30년 12월 14일 병인 1번째기사 1448년 명 정통(正統) 13년

영응 대군의 집을 영건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다

의정 하연, 찬성 박종우·김종서, 참찬 정분·정갑손 등을 불러 이르기를,

"집을 짓는 자가 사치하고 큰 것을 다투어 숭상하는 까닭에, 품계에 따라 제도를 정하여, 대군(大君)은 60간(間), 제군(諸君) 및 공주(公主)는 50간, 2품 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으로, 이렇게 법을 세운 뒤에도 제도가 오히려 굉장한 것이 있어서, 이에 또 척촌(尺寸)을 정하여, 공주 이상은 정침 익랑(正寢翼廊)의 들보[梁]의 길이가 10척, 동자기둥[棟]의 길이가 11척, 기둥[柱]의 높이가 13척이고, 그 나머지 간각(間閣)은 들보의 길이가 8척, 동자기둥의 길이가 9척, 기둥의 높이가 7척 5촌으로 하였는데, 뒤에 임영(臨瀛)의 집에 두 칸을 더 지었으므로, 내가 법을 어길 수 없다고 하여 곧 헐게 하였으며, 신자경(申子敬)의 아들과 박실(朴實)의 아내의 집이 모두 제도에 지나침으로써 헐게 되었다. 이제 그 제도를 자세히 살피건대, 들보의 길이가 8척, 기둥의 높이가 7척 5촌이며, 비록 평민의 집일지라도 오히려 비좁을 것이니, 어떻게 용납해 있을 것인가. 영응 대군(永膺大君)은 늦게 낳은 아들이라, 친히 길러서 매우 사랑하여, 일찍이 집 한 구(區)를 사서 또한 족히 살 만하여, 따로 집을 세우려고 하지 아니하였는데, 이제 선공 제조(繕工提調)가 청하기를, ‘불당(佛堂)을 짓고 남은 재목이 장차 썩어 쓸 수 없는 형편이오니, 영응 대군의 집을 지음이 마땅합니다. ’고 한다. 무릇 사람들은 생각을 지나치게 하여, 임금의 마음에 싹트지 아니한 일을 먼저 억측하니, 이제 들보와 기둥의 척촌을 고쳐 정하면, 반드시 말하기를, ‘장차 영응 대군의 집을 짓기 때문에 먼저 이 법을 고치는 것이라.’ 할 것이니, 이제 장차 고칠 것인가, 아니면 예전대로 둘 것인가. 일찍이 정원(政院)에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 이 제도를 준용(遵用)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갑자기 고칠 수 없다. ’고 하니, 그 말이 당연한가."

하니, 종우 이하가 모두 아뢰기를,

"신 등이 일찍이 듣자옵건대, 민의생(閔義生)이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이 법을 의논해 세웠는데, 망령되게 헤아려서 상정(詳定)하였다고 하옵니다."

하였다. 종서가 아뢰기를,

"승정원에서 아뢴 바는 그렇지 아니하옵니다. 여러 승지(承旨)들의 집은 반드시 이 제도대로 짓지 아니하였습니다."

하고, 하연은 일찍이 이 법을 정하는 의논에 참예하였으므로, 말하지 않다가, 얼마 만에 아뢰기를,

"영응 대군은 나이가 이미 장성하였는데도 집이 없사오니, 속히 세우게 하소서."

하였다. 종서가 아뢰기를,

"여러 대군들은 모두 집이 있는데 영응 대군만이 없으니, 진실로 옳지 못합니다. 사서 놓은 이교(李皎)의 집터는 여염(閭閻) 사이에 있고, 땅도 또한 기울고 좁으며, 또 저자[市]와 가까와서 시끄럽고 고요하지 못하오니, 상림원(上林園)의 땅에다 목진공(睦進恭)의 집을 아울러서 지음이 적당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교의 집터에다 짓고자 한다. 이 앞서 여러 아들의 집을 짓는데 남의 집을 많이 헐어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음이 실로 많았으나, 매양 이를 생각하니 왕자로 하여금 성문 밖에 나가 살게 할 수야 있겠는가. 사세(事勢)가 부득이할 뿐이다. 집터는 천천히 의논해 정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 이현로(李賢老)가, 지리(地理)로 좋은 곳은 북부(北部)의 안국방동(安國坊洞)만한 데가 없다고 아뢰어, 드디어 집터를 정하여 인가(人家) 60여 구(區)를 헐었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12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08면
  • 【분류】
    건설-건축(建築) / 주생활-가옥(家屋) / 왕실-종친(宗親)

○丙寅/召議政河演、贊成朴從愚金宗瑞、參贊鄭苯(甲縣)〔甲孫〕 , 謂曰: "營建宅舍者, 爭尙侈大, 故隨品定制, 大君六十間, 諸君及公主五十間, 二品以上四十間, 三品以下三十間。 以此立法後, 制度尙有宏壯者, 於是又定尺寸, 公主以上正寢翼廊梁長十尺, (楝)〔棟〕 長十一尺, 柱高十三尺。 其餘間閣, 梁長八尺, (楝)〔棟〕 長九尺, 柱高七尺五寸。 後臨瀛之第, 加造二間, 予以爲法不可違也, 卽令撤之。 申子敬子及朴實妻之家, 皆以過制見壞, 然今詳其制, 梁長八尺, 柱高七尺五寸, 則雖平人之家, 尙有狹隘, 何以容處! 永膺大君, 晩生之子, 親自鞠養, 甚愛之, 曾爲買宅一區, 亦足以居, 不欲別建第宅。 今繕工提調請曰: ‘佛堂餘材, 勢將朽腐無用, 宜構永膺之第。’ 凡人意料大過, 人君心所未萌之事, 先自臆度, 今改定梁柱尺寸, 則必曰將營永膺之第, 故先改此法耳。 今將改之歟? 抑仍舊歟? 嘗議于政院, 皆曰: ‘士夫之家, 遵用此制已久, 不可遽改。’ 其言然乎?"

從愚以下皆曰: "臣等嘗聞閔義生爲禮曹判書, 議立此法, 妄度詳定耳。" 宗瑞曰: "政院所啓, 不然。 諸承旨之家, 固未必依此制營構矣。" 以嘗與議此法, 無所言, 旣而啓曰: "永膺大君, 年齒旣長, 未有第宅, 亟令營建。" 宗瑞曰: "諸大君旣皆有宅, 而永膺獨無, 固爲不可。 所買李皎家基, 間在閭閻, 地且傾隘, 又近於市, 喧擾不靜。 以上林園之地, 幷睦進恭家, 營構爲便。" 上曰: "欲於李皎家基營構。 前此爲營諸子第宅, 多壞人家, 取人譏笑實多, 然每思之, 其令王子出居門外乎? 勢不得已耳。 基址, 徐當議定。" 未幾, 李賢老啓: "地理之勝, 無如北部安國坊洞。" 遂以爲定, 凡撤人家六十餘區。


  • 【태백산사고본】 38책 12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08면
  • 【분류】
    건설-건축(建築) / 주생활-가옥(家屋)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