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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21권, 세종 30년 7월 22일 병오 2번째기사 1448년 명 정통(正統) 13년

신석조 등이 불당이 완성되기 전에 불당 설치 명령을 폐할 것을 상소하다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 등이 상소하기를,

"불씨가 중국에 들어온 뒤로 남의 집과 나라를 해한 것이 얼마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 동방 불법의 시초가 중국에서 온 것이 다만 순도(順道) 한 중뿐인데, 마침내는 탑(塔)과 묘(廟)가 동네 마을의 반은 되어 신라(新羅)가 망하였고, 고려 태조가 친히 그 폐해를 보고 일찍이 훈요(訓要)를 지어 말하기를, ‘신라가 다투어서 불사(佛寺)를 지어 망하는 데에 이른 것을 마땅히 경계하여야 한다.’ 하고서도, 도리어 술승(術僧)의 도참(圖讖)의 설에 고혹되어 몸소 답습(踏襲)하여 도모하는 것이 착하지 못한 데 이르렀고, 드디어 후세의 군신 상하로 하여금 다투어 서로 높이고 믿어서 편조(遍照)의 난을 순치(馴致)하여 나라를 멸하여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슬픈 일입니다. 하늘이 아조(我朝)를 열어 주었고 태종께서 하늘이 내신 성학(聖學)으로 불씨가 번성한 천백년 뒤에 나서 하루아침에 배척하기를 넓고 크게 하여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공이 하우씨(夏禹氏)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광명정대한 마음과 일은 삼한의 이목이 누가 듣고 보지 않았겠습니까. 근일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을 때에도 또한 불교를 배척한 것으로 태종의 성덕(盛德)을 삼아서 시장(詩章)에 나열하기를, ‘온 나라 사람들이 몹시 좋아하는데 성성(聖性)이 홀로 배척하여 백천이나 되는 불찰을 하루아침에 혁파하였다.’ 하고, 후왕을 경계하는 말로 진술하기를, ‘예융(裔戎)의 사설(邪說)이 죄와 복으로 위협하고 꾀이니 이 뜻을 원컨대 잊지 말라.’ 하였으니 전렬(前烈)을 현양(顯揚)하고 훈계를 후세에 남긴 것입니다. 대개 가시(歌詩)를 지은 것은 장차 관현(管絃)에 입히어 조묘(朝廟)에 쓰고 향당(鄕黨)에서 써서 방국(邦國)을 교화하고 만세에 전하여 떨어뜨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지금 제작이 겨우 정하여져서 관현(管絃)으로 외이는 것이 흡족하지 못한데, 전하가 뜻을 잇고 꾀를 끼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먼저 간사한 말에 위협되어 갑자기 궁성 옆에 불사를 창건하고, 또 따라서 말씀하기를, ‘조종(祖宗)을 위하여 복구(復舊)하는 것이라.’ 하나, 신 등은 오직 태종은 전에 있어서 배척하고 전하는 뒤에서 회복하는 것을 볼 뿐입니다. 태종의 미덕을 가리고 도리어 부처를 높였다는 이름으로 누를 끼치는 데에 가깝지 않습니까. 조종을 위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주공(周公)의 예악(禮樂)이 백금(伯禽)을 기다리지 않고 큰 근본이 이미 무너졌는데, 이에 조묘(朝廟)에서 쟁그랑거리고 여리(閭里)에 양양(洋洋)하게 하려 하니 누구를 속이려 합니까. 이것으로 후손의 감계(鑑戒)를 구하니 또한 거꾸로 된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신 등이 더욱 분울하여 마지 않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대(前代)의 엎어진 수레의 바퀴 자국을 거울 삼으시고 태종의 사교(邪敎)를 버린 뜻을 따르시어 허물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마시고 급히 이루어진 명령을 정지하시면, 계지(繼志) 술사(述事)하는 효도와 자손을 위하는 도에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석조 등이 아뢰기를,

"한 집으로 말하더라도 집 옆에 절을 지어 자손에게 물려줄 수가 없는데, 하물며 천하 국가의 계획을 하는 자가 궁묘(宮廟) 곁에 절을 지어서 후손의 법을 삼을 수 있습니까. 신 등이 간하기를 아무리 간절하게 하나 다만 알았다고 하시어 시일을 끌고, 완성됨에 미쳐서는 이미 완성되었으니 헐어버릴 수 없다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 등의 뜻은 비록 이미 완성되었더라도 반드시 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완성이 되기 전에 파하면 간함을 좇는 아름다움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이루어졌으니 헐 수 없다는 것은 내 말이 아니다. 너희들은 어찌 미리 추측하여 가지고 공동(恐動)하는가."

하였다. 석조 등이 또 아뢰기를,

"종당은 청을 얻어서 제거하겠습니까. 궁성 옆에 흉하고 더러운 물건이 있는데, 신자가 어떻게 차마 보고 제거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12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5책 87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集賢殿直提學辛碩祖等上疏曰:

佛氏之入中國害人家國者, 不知其幾也。 吾東方佛法之始自中國來者, 只順道一僧而已, 卒之塔廟半閭閻而新羅亡。 高麗 太祖親見其弊, 嘗作訓要曰: "宜戒新羅競造佛寺, 以底於亡。" 反惑術僧圖讖之說, 躬自蹈之, 貽謀不善, 遂使後世君臣上下爭互崇信, 馴致遍照之亂, 寧滅國而無悟也, 吁可哀哉!

天啓我朝, 太宗以天縱聖學, 生於佛氏滋蔓千百年之後, 一朝闢之廓如而不疑也, 所謂功不在下也。 其光明正大之心之事, 三韓耳目, 孰不聞之見之! 近日《龍飛御天歌》之作, 亦以闢佛爲太宗之盛德, 而列於詩章曰: "滿國酷好, 聖性獨闢。 百千佛刹, 一朝革之。" 係以陳戒後王之辭曰: "裔戎之邪說, 怵誘以罪福, 此意願毋忘。" 所以顯揚前烈而垂訓後世者也。

夫歌詩之作, 將欲被之管絃, 用之朝廟, 用之鄕黨, 以化成邦國, 傳萬世而勿隳也。 今制作甫定, 絃誦未洽, 而殿下不思繼志貽謀之道, 先怵邪說, 遽創佛寺於宮城之側, 又從而爲之辭曰: "爲祖宗復舊耳。" 臣等唯見其太宗斥之於前, 殿下復之於後, 其不幾於掩太宗之美德而反累以崇佛之名乎? 安在其爲爲祖宗也? 是周公之禮樂, 不待伯禽, 而大本已壞, 乃欲鏗鏘於朝廟, 洋洋於里閭, 欲誰欺歟? 以是而求後嗣之鑑, 不亦倒乎? 此臣等之尤憤鬱而不已者也。 伏望鑑前代覆車之轍, 遵太宗去邪之意, 不吝改過, 亟寢成命, 則繼述之孝、燕翼之道, 不勝幸甚。

不報。 碩祖等啓曰: "以一家言之, 不可作寺於家之旁近, 以遺子孫, 況爲天下國家之計者, 其可作寺於宮廟之側, 以爲後嗣法乎! 臣等諫之雖切, 而但曰已知, 以延日月, 欲及其成, 則曰業已成矣, 不可壞也。 然臣等之意以爲雖其已成, 必須壞之, 況當其未成而罷之, 則從諫之美, 亦彰矣。"

上曰: "業已成矣, 不可壞也者, 非吾言也。 爾等何以預度而恐動之歟?" 碩祖等又啓曰: "終當得請而除去耳。 宮城之傍, 乃有凶穢之物, 臣子安可忍視而終不除去乎!"


  • 【태백산사고본】 38책 12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5책 87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