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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120권, 세종 30년 6월 21일 을해 1번째기사 1448년 명 정통(正統) 13년

일본국 사신 정우의 진향을 받을 것인가 여부를 논란하다

세자가 계조당에서 조참을 받으니, 일본국 사신 중 정우 등이 반열에 따랐다. 당 안에서 인견하고 임금의 뜻을 선유(宣諭)하여 위로하고, 조계청(朝啓廳)에 사연(賜宴)하였다. 이날 이른 아침에 정우(正祐) 등이 먼저 근정전 뜰에 나아가 국서(國書)를 드리고, 예를 행하기를 절차와 같이 하였다. 그 국서에 이르기를,

"일본 국왕 원의성(源義成)은 글을 조선 국왕 전하께 받드나이다. 두 나라 중간에 바닷길이 만리나 되는데, 이웃나라의 화호(和好)가 변치 않아서 하늘과 물이 한결같이 푸릅니다. 왕년에 서남 연해(沿海)의 이민(吏民)들이 자주 소요(騷擾)하여 음문(音問)이 막히고 끊어졌으니,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제 중 문계(文溪)를 보내어 권련(卷戀)의 뜻을 이르고, 비박(菲薄)하고 세쇄한 물건을 별폭(別幅)에 갖추오니, 채납(採納)하시면 다행하겠습니다. 우연히 풍랑이 순한 때를 만나 간청이 있습니다. 이곳 한 선찰(禪刹)에 전법륜장(轉法輪藏)이 화재에 걸리어 송상전(誦上殿)에 삼보(三寶)의 수(數)를 궐하였으니, 법보(法寶) 7천 권을 돌아오는 편에 부치시면 어떠합니까. 생각하옵건대 우리 나라의 교법(敎法)이 유통하면 어찌 귀국의 청평(淸平)하고 선리(善利)함이 아니겠습니까. 초가을이 조금 차니 때를 순히 하여 보중(保重)하소서. 갖추지 못합니다. 정통(正統) 12년 8월 일."

이라 하였고, 별폭(別幅)에,

"채화선(彩畫扇) 2백 파(把), 흑칠 초병대도(黑漆鞘柄大刀) 10파(把), 연위견(練緯絹) 20단(段), 향(香) 50근, 호초(胡椒) 3백 근, 염초(焰硝) 20근, 상어피(沙魚皮) 20편(片), 생뇌(生腦) 20근, 교어피(鮫魚皮) 50편, 주칠목거완(朱漆木車椀) 1백 10사(事), 백납(白鑞) 1백 근, 소목(蘇木) 1천 근."

이라 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정우(正祐)가 일찍이 말하기를, ‘진향(進香)을 위하여 왔다.’ 하였는데, 지금 온 글을 보니 다만 화호를 강(講)하고 경판(經版)을 청구하는 일만 있고, 진향(進香)한다는 말은 없으며, 또 제문(祭文)을 보니 정우가 명을 받아서 하는 말이요, 국왕의 글이 아니니 사람을 시켜 정우에게 이 뜻을 말하여 물을 것인가, 알지 못하는 체하고 말하지 말 것인가. 정부와 예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라. 또 그 가져온 예물이 모두 다 초솔(草率)하여 전날의 비교가 아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허후(許詡)를 불러 의논하니, 후(詡)가 아뢰기를,

"진향하는 일을 정우가 어찌 거짓말을 하였겠습니까. 실은 왕이 아는 것일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일본 국왕이 나이 바야흐로 14세이니 어려서 일을 알지 못할 것이고, 일을 의논하는 신하가 또한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 먼 나라 사람이 진향(進香)하는 것을 의심 나는 일 때문에 거절하고 진향하지 못하게 하면 불가할까 합니다. 또 섬 오랑캐가 예의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일일이 예로 책망할 수가 있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먼 곳 사람이 진향하는 것이 국가의 아름다운 일이다. 어찌 저지하겠는가. 회례(回禮)를 하고 않는 것과 강석덕(姜碩德)이 서로 보고 안 보는 것을 경은 정부에 의논하라."

하였다. 처음에 정우흥천사(興天寺)에 붙여 있을 때에 석덕이 오래 상종하였는데, 이번에 와서 청하여 보고자 하므로, 이 의논이 있는 것이다. 후(詡)가 정부에 의논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모두 말하기를, ‘예조 낭청(禮曹郞廳)과 강맹경(姜孟卿)을 보내어 예조 당상의 말로 힐문하면 그 실정을 알 것입니다. 회례(回禮)하는 일은, 전에 우리 사신이 갔을 때에 박하게 대접하였고, 또 왜속(倭俗)에서 말하기를, 「조선(朝鮮) 사신이 오기만 하면 우리 왕이 죽는다.」 하니, 이것은 조선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오니, 저쪽에서 깊이 꺼리니 회례사를 반드시 보낼 것이 없고, 우선 사람을 시켜 묻기를, ‘옛날에 엄광(嚴光)이 왔을 때에 회례하고 않을 것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금 길이 막혀서 사람을 시켜 회례할 수가 없으니 우리가 가는 편에 부치는 것이 좋다.」 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귀국이 또한 안정(安靖)하지 못하니 회례하는 일을 어떻게 하랴.’ 하고, 석덕(碩德)이 서로 보는 일은, 인신(人臣)이 의리가 사사로 사귐이 없으니 석덕이 비록 서울에 있더라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밖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저쪽에서 만일 두 번 청하거든 마땅히 외방에 있는 것으로 대답하소서.’ 하였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라서 강맹경(姜孟卿)과 정랑 권기(權琦)를 보내어 정우(正祐)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온 것은 오로지 진향(進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새 임금이 귀국의 동궁(東宮)이 습위(襲位)한 것을 듣고 또 통신을 하지 못한 지가 이미 7년이 되었으므로 오로지 강화(講和)를 위하여 온 것이다. 내가 포소(浦所)에서 보낸 서계(書契)를 보면 알 것이다."

하였다. 맹경이 말하기를,

"포소에서 보낸 서계와 나와 서로 얘기한 것이 모두 진향(進香)이라는 말이 있었고, 또 내가 당인(唐人)에게 묻기를, ‘왜 서계에 기록하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오로지 진향의 큰 일을 위하여 오기 때문에 나머지 일은 적지 않았다.’ 하였는데, 관인(官人)의 말이 어째서 선후가 서로 어긋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오로지 통신(通信)을 위하여 오다가 박다도(博多島)에 이르러 종금(宗金)에게 듣고서야, 왕후(王后)께서 승하(昇遐)하신 것을 알고는 국왕에게 품하였더니, 국왕이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이어서 사람을 시켜 제문(祭文)을 갖추어 진향하겠으나, 너도 중을 거느리고 가서 진향하고 품경(稟經)하라.’ 하였오. 전물(奠物)은 종금(宗金)이 갖추어 주고 왕의 곳에 치보(馳報)하게 하였소. 그대가 나더러 처음 말을 변하였다고 하지마는, 말이 많으면 어찌 같지 않은 것이 없겠는가."

하매, 맹경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귀국에 치제(致祭)할 때에 우리 전하께서 친히 제문을 하였고, 중국에서 우리 나라에 치제하는 데도 황제가 친히 제문을 하였는데, 이웃나라에 치제하면서 사신이 제문을 하는 일이 어디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 말은 그렇다. 우리 나라 전 임금이 죽었을 때에 귀국에서 혹은 치제하고 혹은 아니하였다. 지난번에 윤인보(尹仁甫)가 돌아올 때에 전 왕이 죽은 것을 알고도 귀국에서 또한 치제하지 않았다. 지금 온 글에 치제의 뜻을 논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화호(和好)를 계속하기 위하여 와서, 길흉(吉凶)이 사의(事宜)가 다르기 때문에 적지 않은 것이다. 나더러 거짓말을 하였다고 하는 것인가. 종금(宗金)은 비록 우리 나라 사람이지만 깊이 귀국의 은혜를 입어서 여러 번 내조(來朝)하였고, 연하여 자제를 보내니, 이것으로 인하여 반드시 그 사실을 들었을 것이다. 만일 내 말을 믿지 않거든 회답하는 글에 아울러 이 일을 기록하면 거짓이 아닌 것을 알 것이다."

하였다. 맹경이 돌아와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향(進香)하는 것은 큰 일이니 어찌 국왕이 알지 못하겠는가. 마땅히 진향하게 하여야 한다."

하고, 후(詡)에게 명하여 정부에 의논하니, 가 와서 아뢰기를,

"모두 말하기를, ‘진향은 국왕이 아는 것이겠지만 그 차유(差謬)가 한 가지가 아니니, 바른 도리로 헤아려 본다면 받지 않는 것이 가하나, 다만 이해 관계로 말한다면, 받지 않으면 우리를 한하는 마음이 있을까 두려우니 받는 것이 편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당인(唐人) 시강(柴江) 등이 서계도 없이 다만 사신을 따라왔으니, 지금 사(使)와 부사(副使)의 종자(從者)의 예로 대접하고 나온 뜻은 묻지 말고, 스스로 말하는 것을 기다려서 묻는 것에 따라 대답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제문에 이르기를,

"남섬부주(南贍部洲) 일본국 정사(正使) 사문(沙門) 문계 건탁(文溪乾琢)은 공경하여 나라의 명령을 받고 정성스럽게 비박(菲薄)한 전을 조선 귀국(朝鮮貴國) 선태상 황후(先太上皇后) 존묘(尊廟) 아래에 갖추어 동맹(同盟)하여 서로 구휼하는 정성을 고하고, 삼가 승려(僧侶)를 거느려 소리를 같이하여 대불정(大佛頂) 만행수(萬行首) 능엄신축(楞嚴神祝)에서 모인 선리(善利)를 풍연(諷演)하여, 받들어 존묘(尊廟)의 장엄(莊嚴)한 갚을 땅을 삼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생사류(生死流)에 처하여 여주(驪珠)011) 는 홀로 창해(蒼海)에 빛나고, 열반안(涅槃岸)012) 에 걸어앉아 계륜(桂輪)013) 은 외롭게 푸른 하늘에 밝아서, 후손에게 음덕을 내리고 국가가 길이 태평하소서. 우(右)는 삼보(三寶)014) 가 증명하고 제천(諸天)015) 이 통감하기를 엎드려 청합니다. 삼가 소(疏)를 드립니다."

하였는데, 건탁(乾琢)은 곧 정우(正祐)이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120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5책 75면
  • 【분류】
    외교-왜(倭) / 왕실-의식(儀式) / 무역(貿易)

  • [註 011]
    여주(驪珠) : 여의주(如意珠).
  • [註 012]
    열반안(涅槃岸) : 영구히 모든 인연을 떠나서 불생 불멸(不生不滅)의 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함.
  • [註 013]
    계륜(桂輪) : 달[月].
  • [註 014]
    삼보(三寶) : 불(佛)·법(法)·승(僧).
  • [註 015]
    제천(諸天) : 삼계(三界) 이십팔천(二十八天)을 제천(諸天)이라고 한다. 즉 청정 광결(淸淨光潔)하고 최승 최존(最勝最尊)한 신계(神界)를 말함.

○乙亥/世子受朝參于繼照堂日本國使僧正祐等隨班, 引見于堂內, 宣上旨勞之, 賜宴于朝啓廳。 是日早朝, 正祐等先詣勤政殿庭, 獻國書行禮如儀。 其書曰:

日本國源義成奉書朝鮮國王殿下。 兩國中間, 海程萬里, 隣好不渝, 天水一碧。 頃年, 西南沿海吏民數擾, 音問阻絶, 不勝愧怍也。 今遣僧文溪, 致眷戀之意, 菲瑣物件具別幅, 採納爲幸矣。 偶逢利涉之時, 有懇請, 此方一禪刹轉法輪藏, 嬰八人災, 誦上殿闕三寶數, 以法寶七千卷付回便何? 惟弊邦敎法流通, 豈非貴國淸平善利乎! 抄秋稍寒, 順時保重。 不宣。 正統十二年八月日。

別幅: 彩畫扇二百把, 黑漆鞘柄大刀一十把, 練緯絹二十段, 香五十觔, 胡椒三百觔, 焰硝二十觔, 沙魚皮二十片, 生腦二十觔, 鮫魚皮五十片, 朱漆木車椀一百一十事, 白鑞一百觔, 蘇木一千觔。

上謂承政院曰: "正祐嘗言: ‘爲進香而來。’ 今觀來書, 但有講和請經之事, 而無進香之語。 且觀祭文, 乃正祐承命之辭, 非國王之文也。 吏人說此意於正祐而問之歟? 抑若不知而不言歟? 其令政府禮曹議之。 且其所進禮物, 竝皆草率, 非復前日之比也, 召禮曹判書許詡議之。" 啓曰: "進香之事, 正祐豈妄言! 實王所知也。 臣謂日本國王年方十四, 少不省事, 議事之臣, 亦不詳審也。 遠人進香, 以疑事阻而不進, 恐不可也, 且島夷不識禮義, 豈可一一以禮責之乎!" 上曰: "遠人進香, 自是國家之美事, 豈宜沮之! 回禮與否、姜碩德相見與否, 卿其議于政府。" 初正祐之寓興天也, 碩德久相從, 今之來, 欲請見之, 故有是議。 議于政府回啓云: "僉曰: ‘遣禮曹郞廳與姜孟卿, 以禮曹堂上之言詰之, 可知其情。 回禮之事, 前此我使之往也, 待之以薄, 且俗云: 「朝鮮使來, 我王便薨, 是朝鮮厭之也。」 彼深忌之, 回禮使不必遣也。 姑使人問之曰: 「昔嚴光之來也, 問其回禮與否, 答曰: 『今道梗, 不可使人回禮, 就付吾行可也。』 今聞貴國亦不安靖, 回禮之事, 何以爲之?」 碩德相見則人臣義無私交, 碩德雖在京城, 猶且不可, 況在外乎! 彼若再請, 當以在外答之。’"

從之, 乃遣孟卿及正郞權琦, 問於正祐, 答曰: "吾之來, 非專爲進香, 我新王聞貴國東宮襲位, 且未得通信已致七年, 故專爲講和而來。 見我在浦書契, 可以知矣。" 孟卿曰: "在浦書契及與我相話, 皆有進香之語。 且吾問: ‘唐人, 何不錄書契?’ 答曰: ‘專爲進香大事而來, 故不錄餘事。’ 官人之言, 何先後相悖歟?" 答曰: "專爲通信而來, 到博多島聞諸宗金, 乃知后升遐, 卽稟于國王, 國王使人云: ‘繼使人備祭文進香, 汝亦率僧而去, 進香稟經。’ 其奠物, 宗金備給, 馳報于王所矣。 君謂我變其初辭, 言多, 豈無不同者乎!" 孟卿曰: "我國致祭貴國, 我殿下親爲祭文; 中國致祭我國, 皇帝親爲祭文, 安有隣國致祭, 使臣爲祭文之理乎!" 答曰: "此言然矣, 吾國前王之薨, 貴國或祭或否。 曩者尹仁甫之還, 知前王之薨, 貴國亦不致祭。 今來書不論致祭之意者, 專以繼好而來, 吉凶異宜, 故不錄耳。 無乃以我爲詐乎? 宗金雖我國之人, 深蒙貴國之恩, 屢自來朝, 連遣子弟, 因此必聞其實。 若不信吾言, 回書幷錄此事, 則可知其非詐矣。" 孟卿回啓, 上曰: "進香大事, 豈國王不知之乎! 宜令進香。" 命議諸政府, 來啓云: "僉曰: ‘進香, 固是國王所知, 然其差謬非一端, 揆諸正道, 不受可矣。 但以利害言之, 不受則恐有恨我之心矣, 受之爲便。’ 又曰: ‘唐人 柴江等無書契, 只隨使而來, 今待以使副從者之例, 不問出來之意, 待其自言, 然後隨問而答。’"

從之。 祭文曰:

南贍部洲 日本國正使沙門文溪乾琢欽奉國命, 虔備菲薄之奠於朝鮮貴國先太上皇后尊廟下, 以告同盟相恤之誠。 謹率僧侶, 同音風演大佛頂萬行首楞嚴神祝, 所鳩善利, 奉爲尊廟莊嚴報地。 伏願處生死流, 驪珠獨耀於蒼海; 踞涅槃岸, 桂輪孤朗於碧天。 覆蔭後昆, 國家永泰。 右伏請三寶証明, 諸天洞鑑。 謹疏。

乾琢, 卽正祐也。


  • 【태백산사고본】 38책 120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5책 75면
  • 【분류】
    외교-왜(倭) / 왕실-의식(儀式) / 무역(貿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