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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120권, 세종 30년 4월 27일 임오 1번째기사 1448년 명 정통(正統) 13년

휘덕전 진향과 장경을 청하는 일본 국사의 글

선위사(宣慰使) 강맹경(姜孟卿)이 보고하기를,

"일본국 사신이 이미 내이포(乃而浦)에 이르렀는데, 휘덕전(輝德殿)에 진향(進香)하는 것과 장경(藏經)을 청하는 것으로 왔습니다."

하였다. 그 일본 국사의 글에 이르기를,

"일본 정사(正使) 문계(文溪)·정우(正祐)는 재배 돈수(頓首)하고 조선국 예조의 제위(諸位) 각하(閣下)에 장(狀)을 올립니다. 소승(小僧)이 장년 때에 대국(大國)에 와서 놀아 좌우(左右)의 알아주심을 입어 의복과 안마(鞍馬)를 주심이 실로 많았습니다. 풍악(楓岳)의 금선(金仙)의 자취를 등반할 뿐 아니라, 또한 대조(大朝)의 문물(文物) 의관(衣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으니 무슨 다행함이 이보다 지나겠습니까. 이후 28년 동안 마음에 새기어 잊지 않고 자나 깨나 생각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살피시기를 빕니다. 우리 왕이 불행하게도 수년 동안에 부모가 계속하여 훙서(薨逝)하고 게다가 변방이 소요하여 도로가 통하지 못하고, 원의성(源義成)이 비록 형의 뒤를 이어서 위에 올랐으나, 나이 아직 어리어 음신(音信)을 계속하지 못하니 나라 사람들이 만족하지 않으옵니다. 지난해 정묘년 8월에 특히 소승을 택하여 수호(修好)의 명령으로 맡기었는데, 전대(專對)의 재주가 없으므로 유실(遺失)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전률(戰慄)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정묘년 중추(仲秋)에 우리 왕경(王京)을 하직하고 무신년 4월 초승에 대국 지경에 들어오기까지 이미 아홉 달을 지냈으니 역려(逆旅)가 오래다 하겠고, 종자(從者)들의 노고가 가지가지인 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실 것이니, 어질게 사랑하여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태상 황후(太上皇后)께서 지난해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은 들었으나, 두 나라 중간에 큰 물결이 만리나 되어서 그 당시에 서로 위문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밀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소승을 명하여 월우(月宇) 아래에 공경하여 약제(禴祭)를 드리게 하므로 작은 배를 장비하여 토의(土宜) 약간을 실었으니, 흉사(凶事)와 구별하자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조 숙배(大朝肅拜)한 뒤에 날을 가려 두세 사람이 삼가 존묘(尊廟)에 나아가 불경을 풍연(諷演)하여 명복을 빌게 하소서. 이것은 우리 왕의 명령을 소승이 가지고 온 것이니 양찰(亮察)하소서.

태평흥국남선사(太平興國南禪寺)는 우리 나라의 제일 선찰이어서 왕과 신하가 더욱 높이고 공경하는데, 지난번에 화재(火災)로 법보(法寶)가 다 회신(灰燼)이 되었으니 위와 아래가 의귀할 곳을 잃었습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대장경(大藏經) 7천여 권을 얻어 돌아가는 배에 부쳤으면 합니다. 우리 왕의 글 가운데에 이미 자세히 말하였으니, 미리 좌우에게 알리어서 괴이하게 여기시지 말게 하소서. 강남(江南) 출신 두 사람은 조문서(趙文瑞)·시강(柴江)인데 그 벼슬은 모두 정5품입니다. 오래 일본 지경에 나그네로 있었습니다. 선덕(宣德) 연간과 정통(正統) 원년에 한두 번 본방(本邦)에 사신와서 나라 일을 통하였는데, 천자(天子)의 대궐 앞에 친히 용안(龍顔)을 절하여 은택이 심히 두터왔습니다. 또 일본에 오는 것을 조서로 허락하였으므로 우리 왕이 역시 예로 대접합니다. 이에 대국의 풍속을 흠앙(欽仰)하여 나를 따라 내조(來朝)하였으니, 좌우로 만일 한 번 접견하면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열국(列國)이 회동(會同)하는 잔치에 주인이 재물(宰物)을 삶아서 손의 자리를 풍부하게 하기를 명하는 것은 예(禮)이나, 예라는 것은 그 적합함을 따르는 것입니다. 대개 불자(佛者)의 도(道)라는 것은 살생을 하지 않는 계(戒)의 제일이 됩니다. 내가 비록 사명(使命)은 욕되게 하였지마는, 본시 사문(沙門)이고, 종자도 혹은 중, 혹은 속인인데, 속인은 가사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군자(君子)는 포주(庖廚)를 멀리 하는 것이니, 새로 우리를 위하여 살생하는 것 같은 것은 일체 금지하고, 부득이하여 쓰려면 오직 산 포와 산 생선이면 가하니, 청하옵건대 먼저 포주에 신칙하여 알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대개 상고(商賈)의 교역(交易)을 업(業)으로 하는 자가 사사로 외국에 올 수가 없기 때문에, 매양 사자가 있으면 따라서 오는 것이 예전부터 그러하옵니다. 이번 이 배 가운데 실은 것은 고객(賈客)이 약간명이고 토산물이 몇 짐 되옵는데, 모두 왕경(王京)에 들어가서 팔고자 하오나, 지금 농시에 만일 육지로 행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나귀로 싣고 말로 운반하고 하여, 민력을 허비할까 염려되오니, 대현(大賢)의 정치하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 또 백성을 수고롭히는 것을 꺼리어 바다 모퉁이에 그쳐 두어서 교역하는 데에 불리하게 하면, 상고하는 사람의 멀리 온 마음을 절망하게 하는 것이니, 역시 대국에서 먼 곳 사람을 회유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저의 생각으로는 오직 배로 행하는 것이 가할까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대국에서는 백성을 쉬게 하는 정사를 얻고, 먼 곳 사람은 교역의 뜻을 이룬다면 일거(一擧)에 두 가지 이익이 있으니 또한 좋지 않습니까. 제공은 생각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120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5책 63면
  • 【분류】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

    ○壬午/宣慰使姜孟卿報: "日本國使已到乃而浦, 爲進香輝德殿及請《藏經》而來。" 日本正使文溪正祐再拜頓首, 上狀朝鮮國禮曹諸位閣下:

    小僧壯年遊方於大國, 辱爲左右所知, 衣服鞍馬, 拜賜寔多。 非趐攀楓岳金仙之躅, 抑亦獲覩大朝文物衣冠之美, 何幸過焉! 邇來二十八年, 銘佩不忘, 寤寐思之, 若丐貰察。 我王不幸, 數年之間, 父母繼薨, 矧又邊徼騷然, 道路不通。 源義成雖接兄之武而卽其位, 然歲尙幼矣, 不克嗣音, 國人爲之怏(快)〔怏〕

    去歲丁卯八月, 特擢小僧, 以銜修好之命, 才乏專對, 恐有遺失, 不勝戰慄之至。 丁卯仲秋, 辭我王京, 戊辰孟夏初, 入大國之境, 已經九月, 可謂逆旅日久矣。 從者之輩, 勞苦萬端, 不言而可知也, 仁慈幸甚。 竊承太上皇后, 前年厭世, 兩國中間, 鯨波萬里, 不能當時相恤, 因循至今, 玆命小僧, 虔備禴祭于月宇下, 故裝小船, 以載土宜若干, 所以別凶事。 伏丐大朝肅拜之後擇日, 二三子謹詣尊廟, 諷演佛(俓)〔經〕 , 以祈冥福。 是則我王之命, 而小僧將之, 亮察。

    太平興國南禪寺, 廼我朝第一禪刹, 而王臣尤崇敬之。 頃者鬱攸作變, 法寶盡燼, 上下失所依歸。 唯願獲一《大藏經》七千餘卷, 以付回舶, 我王書中, 已言之詳矣。 預令左右知之, 勿勿怪怪。 江南産二員, 曰趙文端, 曰柴江, 其官則共位于正五品, 久旅域, 宣德中、正統元, 一再使于本邦, 以通國事。 天子殿前, 親拜龍顔, 恩渥甚厚, 詔許又到域, 故我王亦待之以禮。 玆仰大國之風俗, 從余而來朝, 左右若一接見之, 不亦幸乎! 凡列國會同之燕, 主人烹宰物, 命以贍賓筵, 禮也, 然禮隨其宜。

    夫佛者之爲道也, 不殺生戒爲第一。 余雖辱使命, 其是沙門也。 從者或僧亦或俗, 其俗假令雖許食肉, 是故君子遠庖廚。 若新爲殺之, 一切禁焉。 不得已用之, 則惟市脯買魚爲可也。 請先勑廚知之, 幸甚。

    夫商賈之藥, 交易者無由私到外邦, 每有使者從之而來, 自古爾矣。 今此船中所載賈客若干員, 土宜亦若干駄, 咸欲入王京鬻之, 而今農時, 若許陸行, 驢載馬駄, 恐費民力也, 非所以大賢爲政。 若又憚勞民, 止之海隅, 不利市易, 則絶商賈人遠來之心, 亦非所以大國懷遠。 吁! 爲之奈奈何何? 以余計之, 惟舟行爲可也。 若然, 大國得息民之政, 遠人遂交易之志, 則一擧而有二利, 不亦善乎! 諸公圖之。


    • 【태백산사고본】 38책 120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5책 63면
    • 【분류】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