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직제학 김문의 장사에 부의하다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김문(金汶)의 장사(葬事)에 부의(賻儀)하는데 관곽(棺槨)과 쌀 10석, 종이 70권을 썼다. 문(汶)의 자(字)는 윤보(潤甫)인데, 세계(世系)가 본디 한미(寒微)하여,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어머니가 무당노릇을 하여 감악사(紺嶽祠)에서 먹고 지냈다."
고 하였다. 문(汶)은 침작하고 중후(重厚)하여 말이 적고, 젊어서는 학문을 즐겨 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와서 여러 번 옮겨 주부(注簿)가 되었고, 을묘년에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으로 뽑혀 직제학(直提學)까지 승진하였다. 경서(經書)와 자사(子史)에 연구하여 궁달(窮達)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학문은 통달하면서도 고루하지 아니하며, 박학(博學)하면서도 능히 정심(精深)하여서, 의리(義理)의 의심날 만한 것이나 전고(典故)의 상고할 만한 것을 묻는 자가 있으면, 즉시 대답해도 문득 맞으므로, 당세(當世)가 모두 탄복했으며, 임금도 또한 중(重)히 여겼다. 그러나 능히 저술(著述)을 하지 못하여 무릇 글을 지으려면 반드시 동료에게 지어 달라고 하였다. 사람됨이 아집적(我執的)이고 권모술수(權謀術數)가 있어, 밖으로는 청렴하고 정숙한 것 같으나, 안으로는 실상 욕심이 많으며,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아부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였다. 정인지(鄭麟趾)가 일찍이 문(汶)에게 대면하여 말하기를,
"학문이란 심술(心術)을 바르게 함을 가장 귀(貴)히 한다."
하니, 문(汶)이 부끄러워하고 한스럽게 여겨, 제자(弟子) 매좌(梅佐)를 데리고 뜰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며 밤새도록 자지 아니하였다. 병인년에 집현전(集賢殿)에서 항소(抗疏)로써 시사(時事)를 하나하나 들어서 논(論)할 적에 문(汶)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아니하였으며, 또 집의(執義) 정창손(鄭昌孫) 등이 언사(言事)로써 옥(獄)에 갇혔을 적에 온 집현전이 예궐(詣闕)하여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문(汶)만이 홀로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여론이 비루하게 여겨 말하기를,
"김문(金汶)은 육경(六經)을 통하였으나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하였다. 이에 이르러 문(汶)을 명하여 사서(四書)를 역술(譯述)하게 하고, 특별히 자급을 승진시켜 바야흐로 장차 뽑아 쓰려고 하였는데, 중풍(中風)으로 폭사(暴死)하였다. 문(汶)이 항상 금중(禁中)에 있을 적에 그 배운 것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전해 주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자못 한스럽게 여기었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119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5책 54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戊戌/賻集賢殿直提學金汶葬用棺槨米十石、紙七十卷。 汶字潤甫, 系本寒微, 人言其母業巫, 食紺嶽祠。 汶沈厚寡言, 少嗜學, 登第入成均館, 累遷注簿。 歲乙卯, 選爲集賢殿修撰, 陞至直提學。 於經書子史, 靡不硏窮。 其爲學也, 通而不固, 博而能精, 義理之可疑、典故之可考, 有問之者, 響應輒中, 當世服之, 上亦重之。 然不能著述, 凡作文, 必借僚友。 爲人有城府(機井)〔機穽〕 , 外似廉靜, 內實多慾, 侫己者悅, 其不付者嫉之。 鄭麟趾嘗面謂汶曰: "爲學, 正心術爲貴。" 汶慙恨, 率弟子梅佐, 庭立仰天, 終夜不寐, 丙寅, 集賢殿抗疏論列時事, 汶稱疾不出。 又執義鄭昌孫等以言事繫獄, 擧殿詣(關)〔闕〕 請赦, 汶獨不與, 時論鄙之曰: "金汶六經, 掃地矣。" 至是命汶譯四書, 特陞資, 方將擢用, 而中風暴死。 汶恒在禁中, 使其學不傳於學者, 人頗恨之。
- 【태백산사고본】 37책 119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5책 54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