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종실록119권, 세종 30년 3월 7일 임진 1번째기사 1448년 명 정통(正統) 13년

장성과 읍성을 쌓는 순서에 대해 의논하다

좌의정 하연(河演)·우의정 황보인(皇甫仁)·좌찬성 박종우(朴從愚)·우찬성 김종서(金宗瑞)·좌참찬 정분(鄭苯)·우참찬 정갑손(鄭甲孫)을 불러 이르기를,

"장성(長城)과 읍성(邑城)은 다 적을 방어하는 갖춤이라, 가히 편벽되이 폐할 수 없으나, 다만 아울러 거행할 수 없으니, 장성(長城)을 완전히 쌓은 뒤에 읍성(邑城)을 쌓을 것인가, 읍성을 쌓은 뒤에 장성 쌓기를 마칠 것인가."

하니, 연(演)·종우(從愚)·종서(宗瑞)·분(苯)이 아뢰기를,

"만일 쥐나 개와 같은 작은 좀도둑이 쳐들어오면 비록 벽성(壁城)이라도 오히려 지킬 수 있사오나, 만일 대적(大賊)을 만나면 소보(小堡)의 백성들이 모두 읍성(邑城)에 모이게 되오니, 마땅히 돌로써 넓게 쌓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의지할 데가 있게 해야 할 것이니 먼저 읍성을 쌓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하고, 갑손(甲孫)이 아뢰기를,

"장성(長城)은 공사가 거의 완성되어 가니 중도에 폐할 수 없습니다. 또 경원(慶源)·회령(會寧)·경흥(慶興)의 읍성(邑城)은 모두 이미 돌로 쌓았으며, 다만 종성(鍾城)온성(穩城)이 비록 벽성(壁城)이라고 하나 심히 견고하게 쌓았고, 또 함정과 구덩이가 있사오니, 마땅히 장성 쌓기를 끝마쳐야 합니다."

하고, 인(仁)이 아뢰기를,

"회령평(會寧平)은 곧 적로(賊路)로서 가장 긴요한 곳이오니 모름지기 이곳을 방색(防塞)한 연후에 읍성(邑城)을 돌로 쌓아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읍성을 돌로 쌓으면 백성의 힘이 부족하여 비록 10년을 가도 능히 쌓지 못할 것 같다. 옛적에 하경복(河敬復)이 이르기를, ‘목책(木柵)도 또한 족히 적을 막을 수 있다. ’고 했는데, 경 등은 ‘목책은 능히 대적을 막을 수 없으니 돌로 쌓는 것만 못하였다. ’고 하니, 만일 그렇다면 비록 백성의 힘이 부족하더라도 반드시 모름지기 대거(大擧)해서 돌로 쌓아야 하지만, 만일 목책(木柵)도 오히려 족히 적을 막을 수 있다면 적로(賊路)의 요해처(要害處)에만 장성(長城) 쌓기를 마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진실로 타당합니다. 종성(鍾城)온성(穩城)의 읍성(邑城)은 진실로 마땅히 돌로 쌓아야 되오니, 양읍(兩邑)의 백성은 장성(長城) 쌓는 부역에 나가지 말게 하고 각각 읍성(邑城)을 목책(木柵) 밖에다 쌓게 하면 일거(一擧)에 양전(兩全)할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119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5책 53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건설-토목(土木)

    ○壬辰/召左議政河演、右議政皇甫仁、左贊成朴從愚、右贊成金宗瑞、左參贊鄭苯、右參贊鄭甲孫謂曰: "長城邑城, 皆禦敵之具, 不可偏廢, 但不可竝擧也。 長城畢築後, 乃築邑城乎? 邑城築後, 畢築長城乎?" 從愚宗瑞曰: "若鼠竊狗盜, 雖壁城猶可守之, 若遇大賊, 則小堡之民, 須聚邑城, 當廣築以石, 使民有所倚, 先築邑城爲便。" 甲孫曰: "長城事功幾成, 不可中廢。 且慶源會寧慶興邑城, 皆已石築, 但鍾城穩城, 雖曰壁城, 然甚堅築, 又有坑坎, 當畢築長城。" 曰: "會寧平, 乃賊路最緊之處, 須防塞此處, 然後石築邑城。" 上曰: "若石築邑城, 民力不足, 雖至十年, 似不能。 昔河敬復云: ‘木柵, 亦足禦敵。’ 卿等以爲: ‘木柵不能禦大賊, 莫如石築。’ 若然則雖民力不足, 必須大擧。 若木柵猶足禦敵, 則賊路要害, 畢築長城如何?" 僉曰: "上敎允當。 鐘城穩城邑城, 固當石築。 兩邑民, 勿赴長城之役, 各築邑城於木柵之外, 一擧兩全矣。"


    • 【태백산사고본】 37책 119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5책 53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건설-토목(土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