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권을 남용한 병조 판서 이선의 벼슬을 파면하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형증(李亨增)이 아뢰기를,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선(李宣)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을 제 역마 3필을 지인(知印) 황재중(黃在中)에게 주어 전라도에 보내어 표전지(表箋紙)와 백자기(白磁器)를 구하여 왔었는데, 교대할 때에 재중(在中)이 표전지(表箋紙) 12장만을 갖다 바친지라, 새로된 유수(留守)가 생각하기를 당초에 말 여러 필을 가지고 갔었으니 이 물건만이 아닐 것이고 반드시 실어 온 물건이 있었을 텐데 숨기는 것이라 하여, 국문하였으나 실정을 잡지 못하였으므로 사헌부에서 잡아다 문초하온즉, 재중(在中)이 말하기를, ‘처음에 면주(緜紬) 3필을 가지고 가서 표전지(表箋紙) 12장을 샀사옵고, 그 나머지는 전라 감사(全羅監司)와 절제사(節制使) 및 남원 부사(南原府使) 등이 증여한 유둔(油芚)·안총(鞍籠)·백자기(白磁器) 등 물건이온데, 이미 먼젓번 유수(留守) 이선(李宣)에게 전하였습니다.’ 하오니, 청하옵건대 전라 감사(全羅監司) 등은 모두 국문해야겠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이미 알았노라."
하고, 이튿날 형증(亨增)을 불러 이르기를,
"이제 선(宣)에게 물을 것은 어떠한 일이며, 선이 자복한 것과 자복하지 않은 것은 어떠한 일이냐."
하니, 형증이 아뢰기를,
"개성에 부자가 대개 80인이온데 각각 부자 한 사람씩을 천거하게 하여 천거되지 못한 자 50인에게 각각 면포 3필씩으로 총계 1백 50필을 징수(徵收)하고, 또 4사람이 부자 명단에서 삭제되기를 요구한즉 모두 면포 5필씩으로 총계 20필을 징수하였삽고, 또 부자 함우지(咸羽之)가 단자(緞子) 3필로 뇌물을 바치고 면제되기를 요구하였다가 일이 발각되매 곧 그 물건을 몰수하고 또 면포 10필을 징수하였사오매, 우지(羽之)의 사위도 또한 부자의 명단에 든 것을 집이 빈한한 것으로 사양하므로 또한 면포 10필을 징수하여 몹시 가혹하고 각박하오며, 또 방위를 피한다 칭탁하고 용암사(龍巖寺)·송림사(松林寺)·광명사(廣明寺) 등 절로 옮겨 거처하면서 개성부(開城府)로 하여금 여러 달을 공억(供億)하게 하고, 공작색(工作色)060) 을 설치하여 여러가지 물건을 사사로이 만들어서 감고(監考)하는 아전들과 구실아치들에게 주며, 또 부중(府中)의 단자(緞子)로써 지붕 있는 가마를 만들며, 부락 백성들의 술을 사서 쓰고도 그 술값을 주지 않아서 갈려갈 때에 부락 백성들이 그의 처에게 욕설을 하였으며, 사람을 전라도에 보내어 자기(磁器) 등속의 물건을 구해 왔으며, 무녀(巫女) 진주(眞珠)로 하여금 집안에 출입하게 하여 비첩(婢妾)과 서로 질투하기에 이르고, 무녀로 더불어 간통한 정상이 이미 드러나 있사오니, 이것이 그 대략이옵고 이미 자복한 것은 면포(綿布) 징수한 일, 공작색(工作色) 설치한 일, 자기(磁器) 구해 들인 일들이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송사를 결단함에는 모름지기 사면(赦免) 이전인가 이후인가를 가려야 하는데, 이런 일이 사면 이전의 것들이 아니냐."
하매, 형증(亨增)이 대답하기를,
"모두 사면 이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몇 가지 일은 비록 사면 후에 있는 것일지라도 다 자기 일에 수입으로 한 것이 아니니, 자기(磁器) 등속의 일 이외에 나머지는 모두 묻지 말라."
하매, 사헌부(司憲府)에서 다시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들으니, 이선(李宣)이 유수(留守)가 되어 지나치게 강경하고 명석하므로 백성에게 원망을 샀다 하는데,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들의 호소함을 믿고 다스릴 것이냐. 자기(磁器) 등속의 일도 모두 물론하고 싶으나, 선(宣)이 이미 승복한 것이라니 우선 심문하게 하되, 만일 그 밖의 일들을 가지고 맘대로 추국하면 내 마땅히 너희들을 문책하리라. 내가 국문하라고 명한 일도 날새 아뢰어 물어 본 뒤에 초안을 작성하라."
하니,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이제 사헌부(司憲府)에 이선(李宣)을 치죄(治罪)하지 말라고 명하시오니, 신들은 생각하옵기를 애매한 일이라면 모르옵거니와, 무녀를 간통한 일 같은 것은 특히 여러 사람의 입에 전파되었을 뿐 아니오라 실정의 형적(形迹)이 심히 현저하온지라, 율문(律文)에 부락민의 계집을 간통한 것만으로도 죄가 되옵는데, 하물며 이 일은 국상(國喪)의 대소상(大小祥)과 담제(禫祭) 이전에 있은 것이오매, 다른 때의 부락 여자 간통과의 비교가 아니므로 징치(懲治)하지 아니함은 불가하옵니다. 만일에 선(宣)을 원망하는 자가 이런 말을 꾸며 내어 한 것이라면 선(宣)이 어찌 발명하려 하지 않겠나이까. 선(宣)이 만일 발명된다면 부락민의 고소한 죄를 또한 징치(懲治)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니, 모름지기 국문할 것을 청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선(李宣)이 지나치게 억세어서 부자 백성들이 원망을 품었다가 이제 과연 이 일이 있게 된 것이고, 또 이것이 처음부터 고소한 자가 없이 사헌부의 풍문에서 나왔으니, 마침내는 비록 사실이 아닐망정 어찌 사헌부와 서로 말썽을 할 것이랴. 대저 일을 다스리는데는 대체를 가지고 함이 필요하고 천박하게 하여서는 아니 되나니, 오늘에 원망하는 백성의 말을 믿어 가지고 선(宣)에게 죄를 준다면 뒷날에 누가 능히 강직하고 명석하고서 부호(富豪)의 술책에 빠지지 않을 자가 있을 것이냐. 내 이런 까닭으로 해서 논죄하지 말게 하고, 다만 자기(磁器) 등속의 일은 선(宣)이 이미 승복하였으니 시험삼아 심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도 또한 선(宣)을 미워하는 자의 꾸며 낸 말이니 끝내는 논죄하지 말게 하겠노라."
하고, 마침내 그 벼슬을 파면하기만 하였다. 선(宣)은 어미가 태조(太祖) 후궁의 딸인데, 선(宣)이 어려서부터 궁중에서 양육되어 심히 총애를 받았었다. 이로 말미암아 비록 여러 번 중한 죄를 범하였어도 임금이 모두 용서하고 곧 도로 임용하였었다. 그가 개성(開城)에 있을 때 백성들이 가혹한 정치에 못견디어 이사간 사람이 열에 서넛 푼수는 되었다. 단사관(斷事官) 양계원(楊繼元)과 경력(經歷) 유지(庾智), 도사(都事) 유종식(柳宗植), 교수관(敎授官) 김탁(金鐸)도 또한 전라도 수령들의 준 물건을 받았으므로 모두 파직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116권 6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7면
- 【분류】사법(司法)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상업(商業) / 공업-사영수공(私營手工)
- [註 060]공작색(工作色) : 모든 물건을 만드는 공장.
○戊辰/司憲掌令李亨增啓曰: "兵曹判書李宣爲開城府留守, 給鋪馬三匹于知印黃在中, 求表箋紙與白磁器於全羅道。 及見代, 在中只將表箋紙十二張納府, 新留守以爲: ‘初以數馬而行, 非只爲此物也, 必有駄來之物而諱之。’ 鞫而未得其情。 本府執致訊之, 在中曰: ‘初齎緜紬三匹而去, 買得表箋紙十二張, 其餘則乃全羅監司、節制使、南原府使等所贈油芚、鞍籠、白磁器等物也, 已傳於前留守李宣也。’ 請將監司等, 幷加鞫問。"
上曰: "予已知之。" 翼日, 召亨增曰: "今問宣者何事? 宣之所服與不服者何事?" 亨增曰: "開城富居凡八十人, 令各望富居一人, 未得望者五十人, 各徵緜布三匹, 摠一百五十匹。 又有四人求削富居案, 竝徵緜布五匹, 摠二十匹。 又有富居咸羽之欲以段子三匹, 納賂求免, 事覺, 卽沒其物, 又徵緜布十匹。 羽之壻亦籍富居, 辭以家貧, 亦徵緜布十匹, 甚爲苛刻。 又稱爲避方, 移寓龍巖、松林、廣明等寺, 使其府連月供億, 設工作色, 私造雜物, 以贈監考衙吏及任使者。 且以府中段子, 造有屋轎子, 嘗沽用部民酒, 不給其直。 遞還之時, 部民詬罵其妻, 遣人全羅道, 求磁器等物, 使巫女眞珠出入家內, 至與婢妾相妬, 與巫相奸之狀已著, 此其大略也。 其已服者, 徵布工作磁器等事也。"
上曰: "凡決訟, 須辨赦之前後, 此事無乃赦前乎?" 亨增曰: "皆在赦後。" 上曰: "此數事, 雖在赦後, 皆非入己事也。 磁器等事外, 餘皆勿問。" 憲府更請, 上曰: "予聞李宣爲留守, 過於剛明, 聚怨于民, 其肯信怨民之訴而治之乎! 磁器等事, 欲竝勿論, 然宣已承服, 姑令推之。 若將此外事, 擅自推鞫, 予當咎爾等矣。 雖予命鞫之事, 日來啓稟, 然後以成其案。" 司諫院啓: "今命憲府勿治李宣, 臣等以爲曖昧之事則已矣, 若奸巫女, 非特播諸人口, 情迹甚著。 律文奸部民女, 尙有罪, 況此事在國喪祥禫之前, 非他奸部女之比, 不可不懲。 若怨宣者羅織爲此言, 則宣豈不欲發明乎! 宣若發明, 部民告訴之罪, 亦不可不懲, 請須鞫之。"
上曰: "李宣過剛, 富民怨恣, 今果有此事。 且此初無所告者, 而出於憲府風聞, 終雖不實, 豈可與憲府相卞乎! 大抵治事, 要得大體, 不可淺薄。 今日將信怨民之言, 加罪於宣, 則後誰肯剛明而不陷於豪右之術者哉! 予爲此故, 乃令勿論, 但磁器等事, 宣已承服, 試令推問。 然此亦疾宣者所構之辭, 終欲勿論。"
竟只罷其職。 宣母, 太祖後宮出也。 少養於宮中, 甚見寵, 由是雖屢犯重罪, 上皆原之, 旋卽任用。 其在開城, 民苦苛政, 徙者什三四焉。 斷事官楊繼元、經歷庾智、都事柳宗植、敎授官金鐸, 亦受全羅守令所贈, 皆罷。
- 【태백산사고본】 37책 116권 6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7면
- 【분류】사법(司法)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상업(商業) / 공업-사영수공(私營手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