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 집의 정창손이 불사를 정지시키기를 상소하였다
사헌부 집의(執義) 정창손(鄭昌孫)이 상소하기를,
"불교가 괴탄(怪誕)하고 환망(幻妄)하여 나라를 미혹시키고 조정을 그릇되게 하는 것은, 사책(史策)을 상고해 보면 실패한 자취가 명백합니다. 그러하오나 역대의 군신(君臣)들이 그 그릇된 점을 깨닫지 못하고서 숭신(崇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진실로 보응(報應)의 설(說)과 화복(禍福)의 논(論)이 사람의 마음에 깊이 들어간 때문입니다. 간혹 뛰어나게 자주성(自主性)을 가진 위(魏)나라 태무제(太武帝)와 당(唐)나라 무종(武宗)과 같은 분이 있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불교를 도태시켰으나, 얼마 안 가서 이를 고치게 되니, 식자(識者)들이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또 우리 동방(東方)으로써 말한다면,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이단(異端)이 매우 성행(盛行)하여 부처를 섬기기를 더욱 근실하게 하였으므로, 패란(敗亂)이 서로 잇달아 일어나고 나라도 또한 떨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초기에 이르기까지 예전의 나쁜 풍습이 완전히 제거되지 못하였었는데, 태종(太宗)의 영명(英明)하고 위단(威斷)하오심은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훨씬 나으시어, 드디어 사사(寺社)를 혁파(革罷)하고, 또 토전(土田)과 노비(奴婢)를 회수하였으니, 공덕(功德)의 성대함이 천고(千古)에 뛰어났던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시매 능히 전대(前代)의 공렬(功烈)을 준행(遵行)하여 더욱 불교를 배척하시니, 공경(公卿)·대부(大夫)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기일(忌日)를 만나게 되면, 다만 집에서 제사만 지내고 부처에게 가지 않는 사람이 자못 많이 있게 되어, 사설(邪說)이 점점 없어지고 세도(世道)가 바른 길로 돌아온 지가 거의 3, 40년이나 되었습니다. 지난번 흥천사(興天寺)에서 경찬(慶讚)하는 날로부터 불법(佛法)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시기에 시종(侍從)과 대간(臺諫)이 번갈아 장소(章疏)를 올리고 대궐을 지키면서 힘껏 간(諫)하였사오나, 천의(天意)를 돌이키지 못하였으니, 조야(朝野)에서 지금까지 실망(失望)하고 있습니다. 금년 봄에 또 왕비의 병환이 위중한 날을 당하여 중들을 불러 모아서 다시 정근재(精勤齋)를 베풀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였으니, 비록 정도(正道)는 아니지마는 전하께서 신(神)에게 제사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절박한 지정(至情)에서 끝까지 정성을 쓰지 않음이 없었으나, 마침내 조금도 수명이 연장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 일로 미루어 생각하면 불교를 믿을 것이 못됨은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고 대간(臺諫)에게 명령하시기를, ‘동궁(東宮)과 여러 대군(大君)이 왕비를 위하여 명복(冥福)을 빌고자 한다. ’고 하시니, 신 등이 명령을 듣고 몹시 놀라서 힘을 다하여 옳지 않음을 진술하였사오나,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신 등이 무상(無狀)하여 굳이 간(諫)해서 처음에 그치게 하지 못하고 시일을 미루어 지금까지 이르러 잠잠히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다면, 신 등이 비록 온 집안이 도륙(屠戮)되더라도 직무를 게을리 한 죄를 메울 수 없겠습니다.
삼가 듣자옵건대, 불교를 존숭(尊崇)하여 이금(泥金)으로서 불경을 쓰게 하고, 불경의 겉에는 황금으로써 그리고, 번당(幡幢)은 주옥(珠玉)과 비취(翡翠)로써 장식하여 사치를 할 대로 다하고, 의발(衣鉢)·공장(供帳)과 여러가지의 수용(需用)을 구비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켜 곡식과 재물을 허비한 것이 이루 기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근년에는 연사(年事)가 해마다 풍년이 들지 못하고, 금년에는 수재(水災)·한재(旱災)·충재(蟲災)가 있어 재변(災變)이 거듭 이르게 되어, 황해도와 강원도의 백성들은 생업(生業)이 탕진(蕩盡)되었으므로, 지게미와 쌀겨[糟糠]도 충분히 먹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근심하여 아침에 저녁 일을 예측하지 못하는데, 무뢰배(無賴輩)인 중들은 10명, 또는 1백 명이 떼를 지어 좋은 의복과 좋은 음식으로써 백성의 고혈(膏血)을 착취하며, 종실(宗室)과 귀척(貴戚)들은 우러러 받들어 시주(施主)하여 혹시 뒤질까 염려하게 되니, 후일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저들이 비록 나라를 복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더라도, 지금 흉년을 당하였으니 오히려 마땅히 정파(停罷)해야 될 것인데, 하물며 절대로 이런 이치가 없는 것이겠습니까.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고명(高明)하신 성학(聖學)으로서 어찌 불교에 미혹하여 이러한 신봉(信奉)하는 행사를 만들어 복상(福祥)을 기원하겠습니까. 다만 세자의 성효(誠孝)가 천성에서 나왔음으로써 전하께서 그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감히 이 일을 하게 되었지마는, 신 등은 가만히 생각하기를, 천만세(千萬世)의 후에는 역대(歷代)의 불교를 좋아한 군주와 더불어 사책(史策)에 이름이 함께 전하게 될 것이니, 신 등은 매우 두려워하며 매우 원통히 여깁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강단(剛斷)을 크게 돌리시어 사교(邪敎)를 제거하되, 의심하지 마시고 빨리 정파(停罷)하기를 명하신다면, 유학(儒學)에 매우 다행하겠사오며 국가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소(疏)가 올라가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도승지 황수신(黃守身)·우승지 박중림(朴仲林)을 내전(內殿)에서 불러 보시고, 조종(祖宗)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찬경(讚經)을 피람(披覽)한 예(例)와 지금 대간(臺諫)이 와서 간(諫)하는 일을 말씀하시고, 또 말하기를,
"대간(臺諫)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대신(大臣)들도 모두 이와 같은데, 무릇 일을 가부(可否)를 의논할 때에는 ‘옳습니다. ’고 하였다가, 후일에는 ‘그릅니다. ’고 하니, 내가 만약 말한 사람이 아무라고 가리킨다면 부끄러울 것이니, 이로써 감히 말을 내지 않는다."
하였다. 대개 우의정 하연(河演)을 가르킨 것이다. 황수신 등이 밖으로 나가니, 임금이 또 수양 대군(首陽大君)으로 하여금 장령(掌令) 강진(康晉)에게 이르기를,
"불경을 써서 피람(披覽)하라는 일로써 대간(臺諫)에게 전지(傳旨)한 지가 지금 벌써 7, 8월이 되었다. 전일에 정부에서 불사(佛事)를 정지시키기를 청하더니 이튿날 사헌부에서 또 말하게 되니, 이것은 반드시 정부의 말을 듣고 와서 계(啓)하면서,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뒤진 것을 싫어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배표(拜表)할 때에 각 관사(官司)의 관리들이 사고가 있는 것으로 인하여 비로소 이를 알게 되었다. ’고 하며, 간원(諫院)에서도 또한 말하기를, ‘다만 수륙재(水陸齋)를 베푼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며 불사(佛事)를 하는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마땅히 바른 도리로써 행해야 될 것인데, 먼저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임금을 속이니, 이와 같은 간사하고 불초(不肖)한 사람은 내가 용납할 수 없다. 임금과 신하는 의리로써 합하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도(道)가 합하지 않으면 떠나게 되는데, 만약 나로써 합하지 않는다고 여겨서 몸을 떠나게 된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신하가 되어 임금을 속임이 이 지경에 이른다면 용납해 참고 있겠는가. 다만 이단(異端)의 일로 인하여 간신(諫臣)을 처벌한다면 여러 사람이 반드시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혐의를 피하는 일은 현명한 사람은 하지 않는 법인데, 내가 비록 부덕(不德)한 사람이지만, 임금이 되어 간사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보고서도 혐의를 피하고자 하여 처벌하지 않는다면, 어찌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정사(政事)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정창손·강진과 지평(持平) 조욱(趙頊)·유맹부(柳孟敷), 사간원 우사간(右司諫) 변효경(卞孝敬), 지사간(知司諫) 정지담(鄭之澹), 헌납(獻納) 원내인(元乃仁)·박윤창(朴允昌), 정언(正言) 윤배(尹培)·김통(金統)을 의금부에 내리고, 이내 좌부승지(左副承旨) 이사철(李思哲)에게 명하여 가서 이들을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114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책 70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상-불교(佛敎) / 과학-천기(天氣) / 왕실-국왕(國王) / 사법-재판(裁判) / 역사-고사(故事)
○司憲府執義鄭昌孫等上疏曰:
佛氏之所以怪誕幻妄, 迷國誤朝, 稽諸史策, 覆轍昭昭。 然歷代君臣, 莫覺其非, 靡不崇信者, 誠報應之說、禍福之論, 入人深也。 間有卓然自主如魏帝、唐宗銳意沙汰, 未幾改之, 識者恨焉。 又以吾東方言之, 爰自新羅, 以及高麗, 異端盛行, 事佛彌勒, 敗亂相繼, 國亦不振, 逮至國初, 舊染之習, 猶未頓除。 恭惟太宗, 英明威斷, 高出百王, 遂革寺社, 又收土田臧獲, 功德之盛, 卓越千古。 我殿下嗣服, 克遵前烈, 尤加排斥, 自公卿大夫至於庶人, 如遇父母忌日, 只行家祭, 不歸于佛者, 頗多有之。 邪說稍息, 世道歸正, 垂三四十年于玆矣, 曩因興天慶讃之日, 佛法復萌。 當是之時, 侍從臺諫, 迭上章疏, 守闕力爭, 未回天意, 朝墅至今缺望。 今春又當王妃大漸之日, 招集緇流, 再設精勤, 盡誠祈禱, 雖非正道, 然以殿下靡神不擧迫切至情, 無所不用其極也, 竟不少延, 賓天斯迫。 由是觀之, 佛不足信, 斷可知矣。 殿下尙不覺悟, 命臺諫若曰: "東宮及諸大君欲爲王〔妃〕 追薦冥福。" 臣等聞命驚駭, 力陳不可, 未蒙兪允。 臣等無狀, 不能固諍止之於初, 遷延至今, 減默不言, 臣等雖闔門屠戮, 未足以塞曠職之罪。 伏聞尊崇竺敎, 泥金寫經, 經背畫以黃金, 幡幢飾以珠翠, 窮極侈麗。 衣鉢供張, 凡百所需, 無不備具, 大作佛事, 靡穀費財, 不可殫記。 近年歲比不登, 今年水旱蟲蝗, 災變荐臻, 黃海、江原之民, 生業蕩盡, 不厭糟糠, 萬口顒顒, 朝不慮夕。 無賴僧徒, 百十爲群, 美衣玉食, 浚民膏血; 宗室貴戚, 瞻奉捨施, 惟恐或後, 後日之弊, 可勝言哉? 彼雖福國利民, 今當歲歉, 尙宜停罷, 況萬萬無此理乎? 臣等竊念殿下高明聖學, 豈惑於佛, 作此崇奉, 以祈福祥也? 直以聖子誠孝, 出於天至, 殿下重違其意, 敢爲此擧。 臣等竊謂千萬世之後, 與歷代好佛之主同垂於史策, 臣等深竊懼焉, 深竊痛焉。 伏望殿下廓回剛斷, 去邪勿疑, 亟命停罷, 斯道幸甚, 國家幸甚。
疏上, 上大怒, 引見都承旨黃守身、右承旨朴仲林于內, 語祖宗賓天之後, 讃經披覽之例與今臺省來諫之事。 且曰: "非止臺諫, 當今大臣, 皆若此。 凡事當議可否之時則曰可, 後日曰否, 予若指言某也則可愧矣, 是以不敢發言也。" 蓋指右議政河演也。 及守身等出, 上又使首陽大君謂掌令康晋曰: "以寫經披覽, 傳旨臺諫, 今已七八月矣。 前政府請止佛事, 明日憲府亦言之, 是必聞政府之言而來啓。 自嫌後於人, 詭曰: ‘拜表時, 因各司官吏有故而始知之。’ 諫院亦言: ‘但聞水陸, 未知爲佛事。’ 予謂人臣愛君, 欲格君心, 當以直道行之, 而先懷詐諼以欺君, 如此憸小不肖之人, 吾不能容也。 君臣以義合, 故道不合則去, 若以予爲不合, 引身而去, 則予何言哉? 人臣而欺君至此, 其可容忍乎? 但因異端之事而罪諫臣, 衆必疑之, 然避嫌, 賢者不爲。 予雖不德, 旣爲人君, 見姦詐不直之人, 欲避嫌而不之罪, 則豈可謂好善惡惡之政乎?" 遂下昌孫、晋及持平趙頊ㆍ柳孟敷、司諫院右司諫卞孝敬、知司諫鄭之澹、獻納元乃仁ㆍ朴允昌、正言尹培ㆍ金統于義禁府, 仍命左副承旨李思哲往鞫之。
- 【태백산사고본】 36책 114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책 70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상-불교(佛敎) / 과학-천기(天氣) / 왕실-국왕(國王) / 사법-재판(裁判)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