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법의 폐단을 논한 이계전 등의 상소가 있어 이를 의논하다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 이계전(李季甸)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 등은 생각하옵건대, 국가에서 답험(踏驗)의 법이 정(情)에 따라서 경(輕)하게 하고 중(重)하게 할 수 있어, 오랜 동안 큰 폐단이 되어 왔으므로, 이에 공법(貢法)을 세웠으니, 신 등이 처음에 이 제도를 보고 또한 아름다운 법으로 생각하였사오나, 시험한 지 수년에 백성의 원망과 탄식이 날로 깊어지니, 아마도 백성을 편케하는 좋은 법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지난번에 아홉 가지 일을 조목조목 상언(上言)할 때에 공법(貢法)을 첫째로 들어서 진달(陳達)하였던 것입니다. 명하여 의정부(議政府)에 내리시어 의논하여 그 제도를 변경하였으나, 오히려 말할 것이 있어 다시 좁은 소견을 가지고 천청(天聽)을 번독(煩瀆)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재택(裁擇)하소서.
1. 삼등전(三等田)에 구등 년분(九等年分)의 법을 행하는 것이 그 제도가 심히 상밀(詳密)하오나, 그러나 우리 나라의 땅은 산천(山川)이 험조(險阻)하고, 높고 마른 땅과 낮고 젖은 땅이 꼬불꼬불하여, 한 구역의 밭에도 비옥하고 척박한 것이 혹 다르고, 수리(數里)의 땅에도 우로(雨露)가 고르지 아니하니, 비록 상지상(上之上)의 해라도 반드시 하지하(下之下)의 농사가 있을 것이고, 비록 하지하(下之下)의 해라도 또한 반드시 상지상(上之上)의 농사가 있을 것입니다. 한 도(道)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한 고을에 이르러서도 모두 그러하고, 한 고을[邑]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한 촌락·한 동리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이와 같으니, 어찌 연분(年分)을 정하여 일례(一例)로 세(稅)를 거둘 수 있습니까. 비록 하지하(下之下)의 해에 있어도 그 농사가 만일 상지상(上之上)에 속한다면, 답험(踏驗)할 때의 1결(結)에 대한 30두(斗)의 세(稅)를 바치는 것이 가한데, 다만 하지하(下之下) 연분(年分)의 4두(斗)의 세(稅)만 바치니 너무 경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맹자(孟子)가 말한 ‘많이 취(取)하여 학정(虐政)이 되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비록 상지상(上之上)의 해를 당하더라도 그 농사가 만일 하지하(下之下)에 속하는 자는 하지하(下之下)의 세(稅)를 바치는 것이 가한데, 으레 상지상(上之上) 연분(年分)의 20두(斗)의 세(稅)를 거두니 너무 중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맹자(孟子)가 말한 ‘꾸워서 보충한다. ’는 것입니다. 너무 경하게 하는 것도 불가하지마는, 너무 중한 것은 더욱 불가합니다. 1년 중에 한 도(道), 한 고을[邑], 한 촌락[村], 한 동리[里] 안에서 대맥(大貊)·소맥(小貊)·대걸(大桀)·소걸(小桀)의 도(道)가 부산스럽게 병형(竝行)하니, 이것이 어찌 백성을 편하게 하는 좋은 법이겠습니까. 이른바 ‘공법(貢法)보다 더 좋지 않은 것이 없다. ’는 것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세(稅)를 거두는 경중(輕重)이 적당함을 얻지 못하면, 비록 9등 연분(九等年分)의 법을 행하더라도 적당함을 잃는 데에 무슨 구제가 되겠습니까.
1. 재해(災害)로 상(傷)한 것이 연속하여 5결(結) 이상이라야 곧 면세(免稅)를 허가하니, 대저 한 사람의 밭이 5결을 연속한 것이 적고, 다른 사람의 밭에 사이[間]하여 있는 것이 많습니다. 가령 5결의 밭을 5분(分)하여 경작할 경우에, 네 사람의 밭은 모두 재상(災傷)을 입었는데, 한 사람의 옆 밭이 실(實)하였기 때문에, 네 사람에게 의례(依例)로 그 세(稅)를 거두는 것은 대단히 불가합니다. 한 사람의 밭이 5결이 연속되어 있는데, 1복(卜)의 실(實)로 4결 99복(卜)의 세(稅)를 아울러 바치는 것도 또한 불가합니다. 또 재상(災傷)을 입은 밭을 그 주인이 수령(守令)에게 고(告)하면, 수령이 살펴본 연후에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감사가 핵실(覈實)하여 계달(啓達)한 연후에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살피니, 그 절차가 매우 복잡한데 살펴보는 기간은 심히 촉박합니다. 만일 한 현(縣)으로 말하더라도 재상(災傷)을 고하는 자가 사면(四面)에서 답지(沓至)하는데, 수령된 사람은 부서(簿書) 기회(期會)의 급한 것과 사명(使命) 영송(迎送)의 번거로움으로 인하여 일일이 두루 둘러볼 시간이 없습니다. 작은 현(縣)의 수령도 오히려 불가능하거든, 하물며 땅이 넓고 일이 번극(煩劇)한 자이겠습니까. 수령이 용렬하고 게으른 자는 말할 것도 없지마는, 자상(慈詳)하고 개제(愷悌)하여 봉공(奉公)에 부지런한 사람이라도, 사세(事勢)를 두루 살펴보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사세가 불가능한 바가 있으면 비록 친히 살펴보는 법이 있더라도 사람을 시켜서 대신 보지 않을 수 없게 되니, 시켜 보낸 사람이 과연 국가에서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뜻을 인식하여, 사랑하고 미워하고, 보아주고 물리치고 하는 사정(事情)이 없겠습니까. 답험(踏驗)하는 위관(委官)은 오히려 공차(公差)한 사람이니, 다른 고을 사람을 혹 사정(私情)에 따르는 일이 있더라도, 너무 높였다 낮췄다 하는 데는 이르지 않지마는, 지금 차송(差送)하는 사람은 곧 모두 그 고을 사람이니, 사정(私情)을 따르고 뜻을 방자히하여 낮췄다 높였다하고, 기경(起耕)한 것과 묵[陳]은 것을 바꾸고, 손상[損]하고 결실[實]한 것을 전도(顚倒)하는 것이 위관(委官)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어찌 국가에서 알겠습니까.
국가에서 생각하기로는, 수령이 살피고, 감사가 핵실하고, 경차관이 복심(覆審)하여 일일이 살펴보아 두세 번에 이르면, 재상(災傷)을 입은 땅이 반드시 면세(免稅) 되지 않는 것이 없으리라 한 것입니다. 대개 수령은 한 고을의 일만을 맡고 있어도 오히려 두루 둘러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감사이며 하물며 경차관이겠습니까. 재상을 입은 사람이 양식을 싸 가지고 와서 고장(告狀)을 내고서도, 마침내 면세를 받지 못한 자가 많으니, 전년(前年)의 경상도(慶尙道) 경차관(敬差官)의 일이 그것입니다. 백성의 병이 되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답험(踏驗)의 법은 비록 사정(私情)에 따라서 높이고 낮추는 폐단이 있지마는, 밭마다 조사하니, 어찌 전손(全損)된 밭을 가지고 전실(全實)된 것으로 할 리야 있겠습니까.
1. 정전(正田)에 묵은 것이 있으면 전과(全科)를 수세(收稅)하는 법은 백성들이 고의로 경작하지 않는 것을 미워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의 하늘은 밭에 있어서, 경작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는데, 어찌 힘들이는 것을 꺼리어 고의로 묵히겠습니까. 그리고, 경작하지 않는 것은 뜻이 있는 데가 있는 것입니다. 대저 백성이 농사를 하는 것은 위로는 부세(賦稅)의 공봉(供奉)에 충당하고, 아래로는 사육(事育)의 밑천을 삼자는 것인데, 만일 척박한 땅에 소출이 심히 적으면 한 몸의 생활을 영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부세(賦稅)의 바칠 것도 오히려 부족하니, 무엇 때문에 1년내 힘써 일하여 손(損)만 있고 이익이 없는 일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예전에 1년 묵히고 2년 묵히는 밭이 있었으니, 반드시 그 지력(地力)이 쉬어야 될 밭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사상(死喪)이나 질역(疾疫)의 연고로 인력(人力)이 부족한 것이니, 이런 것이 모두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므로, 인정(仁政)에서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또 그 세(稅)를 받아서 민생(民生)을 곤(困)하게 하겠습니까. 이것이 또한 불편하기가 심한 것입니다.
1. 우리 나라의 토지가 척박하여 비록 힘써서 갈고 심더라도 수확이 많지 않아서, 백성의 생업이 심히 어려운데, 매양 추성(秋成)을 당하여 햇곡식이 겨우 오르면, 각사(各司)의 공물(貢物)을 방납(防納)한 사람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값을 거두어서, 백성이 이미 침어(侵漁)를 받았는데, 의창(義倉)의 환상[糴米]과 사채(私債)를 받는 사람이 또 따라서 독촉하니, 농사지어 수확한 것이 이미 떨어지게 됩니다. 봄에 미쳐 서울로 올라가는 세(稅)를 바친 연후에 비로소 주창(州倉)에 바치는 세를 거두는데, 백성이 이미 저축한 것이 없어서 전택(田宅)까지 팔아서 바치고, 혹은 의창의 환상을 얻어서 바칩니다. 만일 완납을 하지 못하면 수령이 반드시 엄중한 견책을 받기 때문에, 그 징수 독촉의 엄한 것과 편달(鞭撻)의 참혹한 것에 백성의 고초(苦楚)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물며, 근년 이래로 여러 번 흉년을 만나서, 서울로 올리는 세도 오히려 의창에서 꾸어서 충당하였으니, 더구나 주창(州倉)에 바치는 것이겠습니까. 지난 해에 이같이 하고 금년에 또 이와 같이 하여, 묵고 묵은 것이 서로 겹치어 여러 해를 바치지 못하니, 의창(義倉)의 저축이 날로 줄어집니다. 또 사채(私債)와 공물(貢物)의 값이 또한 모두 답지하여 쌓이니, 이로부터 이후로 비록 두어 해의 풍년이 있어도 마침내 갚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설사 세(稅)의 경중(輕重)이 모두 실정에 맞더라도 민생이 오히려 넉넉지 못한 것을 근심하거든, 하물며 공법을 행함에 있어서 경하게 바치는 자는 적고 중하게 바치는 자는 많으니, 백성의 근심과 탄식이 어느 때나 쉬겠습니까.
신 등은 생각하옵건대, 유자(有子)가 말하기를, ‘백성이 넉넉지 못하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넉넉하랴.’ 하였으니, 백성이 넉넉지 못하여 날로 곤궁하게 되는 것은 실로 군상(君上)의 근심입니다. 처음에 이 법을 세울 때에, 첫째는 시험하는 것이라 하였고, 둘째는 백성을 이롭게 한다 하였는데, 입법(立法)한 이래로 백성의 근심하고 원망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만세(萬世)가 되도록 오래 행할 수 있는 법이겠습니까. 요사이 의염(義鹽)에 대한 일을 사람들이 다투어 비난하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굳이 고집하였으니, 만일 전하(殿下)의 강단(剛斷)이 아니었다면 생민(生民)의 병폐가 한량이 있었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염법(鹽法)은 모두 가까운 땅에 시험하였기 때문에 그 폐단이 쉽게 드러났지마는, 공법(貢法)은 먼 도(道)에만 행하니 그 폐단이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만일 반드시 행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선 하삼도(下三道)는 정지하고, 먼저 경기(京畿) 한 도에 시험하여 두어 해를 행하여 보면, 공법의 편(便)코 편치 않은 것과 민심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논변(論辯)을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참 잘한 말입니다. 선유(先儒)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바야흐로 공법이 있지 않았을 때에는 공법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미 공법이 시행된 뒤에는 좋지 못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하였습니다. 지금 좋지 못한 실상이 이미 증험되었는데, 어째서 굳이 지키고 변하지 않습니까. 하나의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 하나의 해(害)를 없애는 것만 같지 못하고, 하나의 일[事]을 내는 것이 하나의 일을 감(減)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공법이 본래 좋지 못한데, 우리 나라의 밭에는 더욱 불편하기 때문에 절목(節目)이 비록 매우 상세하나 마침내는 백성을 병들게 합니다. 만일 그대로 인습하고 고치지 않으면, 생민(生民)의 곤고(困苦)와 병폐가 장차 끝이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불쌍히 여기시와 작은 백성의 곤고를 펴주시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또 신 등이 전날에 올린 글 중에 시행하지 않은 조목으로서, 수령(守令)의 탐오(貪汚)하는 풍습, 법관(法官)의 징속(徵贖)하는 일, 대간(臺諫)의 원의(圓議)하는 폐단 같은 것을 다시 상의(商議)하여 시행하게 하시면, 또한 신 등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하였다. 글을 올리니 임금이 보고 말하기를,
"집현전(集賢殿)에서 두 번 글을 올렸는데, 어째서 김문(金汶)의 이름이 없는가."
하고, 드디어 계전(季甸)과 응교(應敎) 어효첨(魚孝瞻)·예조 판서(禮曹判書) 정인지(鄭麟趾)·도승지(都承旨) 황수신(黃守身)을 내전(內殿)에서 인견하고 친히 하교(下敎)하기를,
"옛날에 내가 경연(經筵)에 임(臨)할 때에는 항상 집현전 관원을 보고 매양 내 심회(心懷)를 말하고, 저들도 또한 가진 포부를 개진(開陳)하였는데, 근래에는 몸이 질병에 걸리어 오래 접견(接見)하지 못하였으니, 나의 심회를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 상소(上疏)하여 공법(貢法)의 폐단을 논(論)한 것도 나의 입법(立法)한 본의(本意)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일을 말하려고 불러 온 것이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입법한 것이 많은데, 밝지 못한 소치(所致)로 그 종말에 반드시 후폐(後弊)가 있을 것을 연구하지 못하였다. 전폐(錢幣)·호패(戶牌)·수차(水車)·아악(雅樂) 같은 것들을 낱낱이 들기 어렵다. 입법할 때에 만일 그 종말을 미리 헤아려서 살펴 처리하였던들,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여 보면, 옛적의 인군(人君)은 겨우 약관(弱冠)이 넘어서 일을 헤아려 밝게 판단하여 공업(功業)을 이룬 이가 있는데, 저들은 어떻게 그러하였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능하지 못하다. 손실(損實)의 법은 우리 나라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실은 전조(前朝)에서 행한 법인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인습하여 행하였다. 처음 손실(損實)의 법을 행하던 당초에 백성들이 대단히 편하게 여기었고, 나도 어렸을 때에 역시 생각하기를, 이 법(法)은 곧 은(殷)나라의 철법(徹法)이고 주(周)나라의 정전(正田)의 제도라 여겼는데, 오래되매 그 폐단이 점점 심하였다. 이에 말하는 자가 많아서 공법의 의논이 비로소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곧 시행하지는 않았는데, 그 뒤에 신개(申槪)가 비로소 건의(建議)하여 공법을 행하고자 하였다."
하고, 인하여 정인지(鄭麟趾)를 불러 말하기를,
"경 등이 중시(重試)하던 해에 또한 제목을 내어 책문(策問)하였고, 또 경이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있을 때에 글을 올려 청하였으므로, 내가 드디어 뜻을 결단하여 행한 것이다. 지금 거의 10년이 되었는데, 그 효과는 보지 못하고, 이해(利害)에 대한 말이 분분(紛紛)하다. 나의 본의(本意)는 많이 거두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손실(損實)의 법이 사정(私情)에 따라 경(輕)하게 하고 중(重)하게 하여, 말류(末流)의 폐단이 장차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이 법을 행하고자 한 것이다. 내가 만일 곧 잊어버려서 덮어두고 하지 않으면 나의 병든 몸에도 좋겠다. 다만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몸이 수고로움을 당하여 편안한 것을 뒷사람에게 물려주라.’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잊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집현전의 상소(上疏)에 5결(結)을 연복(連伏)한다는 말이 있으니, 내가 그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겠다. 너희들은 말하여 보라."
하니, 계전(季甸)이 대답하기를,
"5결이 연복한 밭을 가령 다섯 사람이 경작하는데, 네 사람의 밭은 모두 재상(災傷)을 입었는데 한 사람이 옆 밭[旁田]의 결실[實] 때문에, 네 사람에게 똑같이 그 세(稅)를 거두고, 한 사람의 밭이 5결이 연복되었는데, 1부(負)의 결실로 4결 99부(負)의 세를 아울러 바치며, 작은 백성의 밭이 1, 2결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 많은데, 경작하는 1, 2결의 땅이 모두 재상(災傷)을 입어도 국가에서 반드시 그 세(稅)를 받는다면, 백성이 장차 무슨 물건으로 부세(賦稅)를 충당하며, 장차 무슨 물건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기르겠습니까. 백성의 근심과 탄식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법은 결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폐단은 참으로 그러하지마는, 그러나 5결(結) 미만(未滿)인 재해지(災害地)를 반드시 일일이 두루 돌아본다면, 이것은 손실(損實)의 법과 다름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상소(上疏)에 말하기를,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넉넉지 못하겠는가.’ 하였고, 또 연전(年前)의 상소(上疏)에도 또한 ‘공법을 세워서 국고(國庫)를 채운다. ’고 말하였는데, 내가 어찌 많이 거두기 위하여 이 법을 행하는 것인가. 집현전(集賢殿)의 선비 같은 사람들도 내 뜻을 알지 못하니, 하물며 기타 사람들이겠는가."
하였다. 계전(季甸)이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많이 거두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옛날 신이 처음 벼슬하기 시작하였을 때에, 국가에서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각각 공법(貢法)의 편하고 편치 않은 것을 개진(開陳)하라 하였는데, 신이 생각하기를 행할 만하다 하였고, 공법이 처음 행할 때에도 또한 끝내 폐단이 없이 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두어 해 뒤에 백성이 근심하고 탄식하는 자가 있고, 폐단이 있는 것을 말하는 자가 또한 많으니, 신이 비로소 의심한 지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신의 가형(家兄)이 경상도 감사가 되었는데, 신의 어미가 따라가서 있으므로, 신의 형이 시켜서 상경(上京)하는 사람이 반드시 와서 신을 보고 어미의 안부(安否)를 전하고 돌아가기 때문에, 오는 사람을 신이 반드시 보는데, 보면 반드시 공법의 편하고 편치 않은 것을 묻습니다. 모두 대답하기를, ‘공법이 불편하다. 재해(災害)를 입은 밭이 하나도 수확하지 못하여도 세(稅)는 모두 바쳐야 하니, 백성이 폐해를 받는 것이 지극하다.’ 합니다. 또 경주(慶州)에 사는 중추원 녹사(中樞院錄事) 김계조(金繼祖)가 왔기에, 신이 또 물으니 대답하기를, ‘공법이 불편하다. 매년 결실[實]이 없는데 세(稅)는 그대로 있으니, 백성이 심히 괴롭게 여긴다. 지난 해에는 더욱 심하여 모두 의창(義倉)의 쌀을 환자[還上] 내어 도로 주창(州倉)에 바쳐 세(稅)에 충당하였기 때문에, 주창에 바친 것이 대개는 묵은 쌀이다. 국가에서 거짓인가 사실인가를 알고자 하면, 사람을 시켜 가서 햅쌀과 묵은 쌀의 많고 적은 것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하오나, 이 무리들의 말을 오히려 다 믿을 수는 없다 하였는데, 지금 사인(舍人) 노숙동(盧叔仝)이 경상도에 가서 근친(覲親)하고 돌아왔기에, 신이 보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경주(慶州)에 우리 일가들이 사는데 나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재해를 입은 밭을 빈 세[虛稅]만 바쳤으니, 실로 마음이 아프다」고 하였다.’ 합니다. 숙동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사람이니, 이것은 반드시 사실일 것입니다. 법의 좋지 못한 것이 이보다 다 심할 수 없으니, 이 법은 마침내 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법이 폐단은 계전의 말이 사실이다."
하였다. 인지(麟趾)가 아뢰기를,
"이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하오나, 이것이 실상은 공법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세후(歲後)에 세(稅)를 거두기 때문입니다. 경기(京畿)에도 또한 이미 있었습니다. 지금 경기에 한 고을이 세(稅)를 거두지 못한 것이 3백 석에 이르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세전(歲前)에 수납(收納)하였으면 어찌 이런 폐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효첨(孝瞻)이 아뢰기를,
"만일 세전에 수납하였다 하더라도 백성이 결실이 없는 밭에 대하여 있는 것을 털어서 세(稅)를 충당하여 바치고 나면, 먹을 것이 없으니, 국가에서 만일 백성의 죽는 것을 내버려두고 구제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마는, 만일 반드시 구제하여야 한다면, 또 도로 주창(州倉)의 쌀을 내어 진휼하여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니, 그 폐단이 실상은 다른 것이 없으니, 이것은 공법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고, 수신(守身)은 아뢰기를,
"집현전에서 말한 것이 참으로 옳으나, 이왕 이미 시행하였으니 금년에는 행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다. 효첨이 또 아뢰기를,
"공법을 행하지 못할 것이 있으니, 옛날로부터 제왕(帝王)이 곤궁한 백성을 사랑하고 은혜롭게 하여, 한 남자와 한 여자라도 자기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백성의 임금이 더불어 그 공(功)을 이룰 수 없는 것이요, 신하의 도리로 말하면, 한 사람이라도 자기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자신이 밀쳐서 개천 가운데에 넣은 것같이 하는 것입니다. 또 환과 고독(鰥寡孤獨)이 네 사람들은 천하의 궁한 백성이어서 고(告)할 데 없는 자인데, 문왕(文王)이 정사를 행하고 인(仁)을 베풀어 반드시 이 네 백성들에게 먼저 하였으니, 그렇다면 궁한 백성을 은혜로 불쌍히 여기는 것은 제왕(帝王)의 중요한 도(道)입니다. 지금 공법을 행함에 있어서 좋아하는 자가 많고, 좋아하지 않는 자가 또한 반은 되는데, 좋아하는 자는 부유한 사람이고, 좋아하지 않는 자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부유한 자의 밭은 비옥한 것이 많고, 가난한 자의 밭은 척박한 것이 많은데, 부유한 자는 한 밭이 비록 손(損)이더라도 한 밭은 반드시 실(實)이지마는, 가난한 자는 그 밭이 본래 척박하여 조금만 재상(災傷)을 만나면 전연 수확하지 못하고, 비록 풍년을 만나더라도 더 결실하지도 않습니다. 금년에 이와 같고 명년에 또 이와 같으면, 궁한 백성은 일생 동안 다시 소생할 기약이 없으니, 그 고통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유한 사람은 괜찮지마는, 이 고독한 사람이 불쌍하다 하였습니다.
또 신이 성상(聖上)의 덕택으로 토전(土田)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비록 좋은 밭은 아니지마는, 그 중에 아름다운 것도 있습니다. 노비(奴婢)를 시켜 경작하는데, 한 밭이 비록 결실을 못하더라도 한 밭은 반드시 결실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손실(損實)의 법을 행할 때에는 1결에 쌀 30두를 바쳤는데, 지금은 비록 상등(上等) 밭이라도 상상년(上上年)에 다만 20두의 세를 바치니, 그 이익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의 한 몸의 이익으로 말한다면 어찌 공법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반드시 행하지 말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성상의 뜻을 받아서 궁한 백성을 구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 공법을 행하는 것이 국가에서 만일 다만 간사한 사람에게 속지 말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만이지마는, 과연 성상의 하교와 같이 백성을 편하게 할 계책을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공법은 단연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국가의 법에 한 백성이 주려 죽더라도 오히려 놀랍게 여기어 감사(監司)와 수령(守令)과 감고(監考)가 견책을 입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하물며, 지금 공법이 만일 행한다면 장차 한 주린 백성의 죽는 것 같은 것이 몇 천 명이 될지 알수 없습니다. 만일 이 법이 행하여짐으로 인하여 혹 한 백성이 주려 죽게 된다면, 큰 일을 꾀하는 사람은 작은 폐단을 따질 수 없다고 오히려 말할 수 있지마는, 지금 국가의 궁한 백성이 반은 되니, 성인(聖人)이 한 백성의 주려 죽는 것을 중하게 여기는 생각으로써 어찌 크게 놀랍고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는 말이 참으로 옳다. 그러나, 손실(損實)의 폐단이 저와 같으니, 공법을 세워서 후세(後世)로 하여금 오히려 유지하고 따를 것이 있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효첨(孝瞻)이 대답하기를,
"무릇 법령을 행함에 있어서 다만 기강(紀綱)이 엄숙하고 밝게 할 뿐입니다. 만일 기강이 밝지 못하다면 비록 공법을 쓰더라도 폐단에 무슨 구제가 되겠습니까. 지금 성명(聖明)의 때를 다하여서도 오히려 간악한 아전[姦吏]이 술책을 써서 기경(起耕)한 밭을 묵은 밭으로 하여, 죄를 당하는 자가 끊이지 않으니, 오늘날에 비록 공법을 세워서 방지하는 규범(規範)을 만들어 후세에 물려 주더라도, 만일 기강이 밝지 못한 때를 만나서,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여, 간신(奸臣)이 권세를 쓰게 되면, 반드시 하루아침에 방범(防範)을 무너뜨리고 할 것이니, 그렇다면 공법이나 손실법이나 무얼 가릴 것이 있습니까. 만일 말류(末流)의 폐단을 생각한다면 공법과 손실법이 실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찌 공법 같이 좋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원하옵건대, 반드시 공법을 파(罷)하소서."
하였다. 이에 임금이 한참 말이 없다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 법이 정히 폐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다만 손실(損實)의 폐단이 저와 같으므로, 자손(子孫)을 위하는 계책이 곧 그 청(請)을 따르지 못하고 불러서 내 뜻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이 오히려 내 마음에 그리 맞지는 않으니 마땅히 다시 생각하겠다."
하고, 임금이 또 말하기를,
"집현전의 전일 상소에 말한 수령(守令) 육기(六期)의 법은 허 정승(許政丞)의 청으로 인하여 세운 것인데, 그 체대(遞代)의 빈삭(頻數)한 것과 과궐(窠闕)을 충차(充差)하는 등의 일은 차치 물론(且置勿論)하고라도, 하등(下等)을 맞아서 파직된 자도 세월이 오래지 않아서 곧 다시 수령이 되고, 상등(上等)을 맞아서 온 사람도 또 오래지 않아서 다시 나가 수령이 되니, 이것으로 본다면, 비록 다시 3년의 법을 세운다 하더라도 전에 쓴 자를 곧 다시 쓰게 되니, 오래 맡기[久任]는 것은 한가지이다. 또 고소(告訴)를 금(禁)하는 것은, 옛날에 일찍이 내연(內宴)으로 인하여 허 정승(許政丞)이 나에게 청하기를, ‘전조(前朝)의 신하가 보탑실리왕(普塔失里王)을 상국(上國)에 고소하여, 상국에서 왕을 잡아 돌아가도, 한 사람도 나서서 구원하는 자가 없었으니, 우리 나라 풍속이 박(薄)하고 악(惡)하기가 이와 같으니, 부민(部民)의 고소하는 풍습을 자라게 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내가 여러 재상(宰相)에게 물으니, 박은(朴訔) 정승은 ‘가합니다.’ 하고, 유정현(柳廷顯) 정승은 말이 없이 불긍(不肯)하였고, 목진공(睦進恭)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감사(監司)의 직임을 지냈사와 갖춰 아는데, 이 법은 참으로 행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므로, 감히 경솔히 쉽게 입법(立法)하지 못하였는데, 그 뒤에 허 정승이 낙천정(樂天亭)에서 풍정(豐呈)을 드리던 날에 울면서 태종(太宗)께 청하니, 태종께서 좋게 여기어 곧 이 법을 세우도록 명령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생각하기를, 이 법이 마침내 폐단이 없이 거행될 수 있을까 하였었다. 그 뒤에 수령(守令)이 불법(不法)한 자가 많으므로, 조정 의논이 암행(暗行)을 보내어 찰방(察訪)하고자 하여, 내가 허 정승에게 물으니, 허 정승이 말하기를, ‘만일 군명(君命)으로 하문(下問)하신다면 가합니다.’ 하였다. 이것은 허 정승이 쉽사리 발언(發言)하고 중(重)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이에 암행 찰방(暗行察訪)을 보내었더니, 찰방(察訪) 이종규(李宗揆) 등이 도리어 폐단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뒤로는 암행 찰방을 보내는 것을 드디어 폐하였다. 지금도 또한 거행할 수 없다. 다만 행대 감찰(行臺監察)을 보내는 일을 전일에 의논하는데, 정 판서(鄭判書)는 말하기를, ‘행대(行臺)의 행하는 것이 급속(急速)하여 실정을 파악할 시간이 없다. ’고 하였다."
하니, 인지(麟趾)가 대답하기를,
"신의 뜻은 시일을 경과하여 돌아오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수신(守身)에게 이르기를,
"형대를 파견하여 보내는 일을 다시 마련하여 시행하게 하라."
하고, 임금이 또 말하기를,
"언관(言官)의 일에 이르러서는 상소(上疏)의 뜻이 또한 좋다. 의논이 합하지 않는 자는 제거(除去)한다니, 그런 폐단이 있는가."
하니, 인지·수신이 대답하기를,
"이 풍습은 전조(前朝)의 말년에 있었는데 지금은 실상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조정에서도 한두 사람이 일찍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내가 언로(言路)가 장차 막힐까 염려하여, 과궁(寡躬)의 잘못[闕失]을 지적하여 말한 것은 비록 중도(中道)를 잃었더라도 또한 죄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즉위한 이래로 일을 말한 것으로 죄를 당한 자는 적다. 간혹 있어도 또한 별다른 연고는 없었다. 지금 상소의 뜻은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다만 새 법을 경솔히 쉽게 만들기가 어렵다."
하였다. 수신이 아뢰기를,
"상소 가운데 또한 법관(法官)이 속죄(贖罪)한 물건을 쓰지 말 것을 말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헌사(憲司)에서 범죄한 물건을 잡아서 추문(推問)할 때에 아래 백성이 비방하기를, ‘자기가 쓰고 싶어서 그런다. ’고 하였다 한다. 법관으로서 장도(贓盜)의 물건을 앉아서 먹는 것은 참으로 옳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인지가 아뢰기를,
"이런 예(例)가 많습니다. 병조(兵曹)의 소금[鹽], 예조(禮曹)의 진봉지(進奉紙), 호조(戶曹)의 지가(紙價)가 모두 이런 예(例)입니다."
하매, 이에 임금이 조금 의심하였다. 효첨이 아뢰기를,
"신 등의 청하는 것은 법관으로서 앉아서 장도(贓盜)의 물건을 먹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속죄(贖罪)로 받는 것을 법관이 자용(自用)하는 것을 달게 여기기 때문에, 불시(不時)로 받아내어 폐해가 백성에게 미치오니, 만일 자용(自用)하지 못하게 하면 백성의 폐해가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효첨이 또 아뢰기를,
"이것뿐 아닙니다. 무릇 범죄하여 도망중에 있는 자의 수속(收贖)도 법관이 으레 그 사람의 족속(族屬)에게 받아서, 비록 소원(疏遠)한 자라도 이름이 관련만 되는 자는 반드시 받으니, 지금 법이 비록 죽을 죄라도 부자·형제의 친속(親屬)에도 오히려 미치지 않는데, 하물며 속죄(贖罪)의 징수를 소원한 족속에게까지 넘쳐 미치게 하니, 인정(人情)에 어그러지고 천리(天理)를 거스리는 것이 심합니다. 말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만일 속(贖)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악(惡)을 징계할 수 있느냐.’ 하는데, 이것은 심히 그렇지 않습니다. 저 악한 일을 하여서 범죄한 자는 비록 그 부자·형제에게 받더라도 징계될 것이 없는데, 그 소원한 족속에게 받는 것이 무슨 징계가 되겠습니까. 하물며, 원(元)나라 율(律)에 종[奴]이 상전(上典)의 집에 있으면서 범죄하였으면 상전의 집에서 받고, 상전의 집에 있지 않고 범죄하였는데 다른 받을 만한 자가 없으면 징수를 면제하였습니다. 예전에도 징수를 면제하는 법이 있었으니, 지금의 속(贖)을 받는 일이 어찌 반드시 부득이한 일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범죄하여 수속(收贖)하는데 아무 곳에서 받는다. ’는 말[語]을 본 일이 있는데, 실려 있는 글[文]을 알지 못하겠다. 혹시 《당률소의(唐律疏議)》가 아닌가. 집현전에서 옛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라."
하고, 인하여 수신(守身)에게 이르기를,
"이 일도 또한 마련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인지(麟趾)에게 이르기를,
"음양(陰陽)·지리(地理)를, 내가 그 방술(方術)을 좋아하지 않아서 스스로 장한 체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근래에 그 설(說)이 아울러 일어나서, 분분(紛紛)하여 통일이 되지 않으니, 어떤 것을 좇아야 할지 곤란하다. 지난 해 제군(諸君)의 길례(吉禮) 때에 음양(陰陽)의 법으로는 여러 방서(方書)가 모두 흉(凶)하여, 신랑·신부가 나고 들고 앉고 설 곳이 없었고, 또 옛날 도읍을 정한 뒤에 유한우(劉旱雨)가 말하기를, ‘이 도읍에는 문(門)을 지을 곳이 없다.’ 하였는데, 태종(太宗)께서 서서히 물으시매, 한우(旱雨)가 차츰 아무 곳에는 문을 지을 만하다고 말하였다. 나중에는 한우가 말한 문(門) 지을 곳이 과연 한둘이 아니었다. 땅을 보는 무리들은 마음을 쓰는 것이 공정하지가 못하여, 비록 생각하는 것이 있어도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난날에 성원군(星原君)의 일도 고문[拷訊]까지 당한 뒤에 그 죄를 면하였고, 정광원(鄭廣元)은 유자(儒者)이고 해당관(該當官)인데도, 그 일을 듣고 말하지 않았다. 또 옛날 돈의문(敦義門)을 지을 때에 지금 낸 길은 곧은 길인데, 다만 이숙번(李叔蕃)의 문전(門前)으로 나가기 때문에, 인덕전(仁德殿)의 앞길을 내고 문(門)을 지었었는데, 내가 즉위한 뒤에 인덕전(仁德殿)께서 수강전(壽康殿)에 거둥하는 날, 이야기 계제로 인하여 깨닫고 곧 그 문을 고쳐 짓게 하였다. 그러나, 태종께서도 끝내 그 까닭을 아시지 못하였다. 인주(人主)도 술수 가운데에 떨어지는 일이 없지 못한 모양이니, 지금 지리(地理)에 대한 여러 서적을 고루 보아서 같고 다른 것을 상고하여, 그 긴요한 말을 뽑아서 간략하게 책을 만들어서 준용(遵用)하기에 편하게 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하였다. 인지(麟趾)가 아뢰기를,
"복희(伏羲) 선천도(先天圖) 팔괘위수(八卦位數)와 문왕(文王) 후천도(後天圖) 팔괘위수(八卦位數)가 모두 바꾸어 놓아서 같지 않으나, 각각 의리(義理)가 있습니다. 지리 제서(地理諸書)도 그 설(說)이 비록 같지 않으나, 또한 각각 이치가 있어서 버리고 취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팔괘(八卦)의 상(象)이 봉두(峯頭)에 죽 보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팔괘의 상이 봉두에 죽 보이다니 어찌 그럴까. 다만 버리고 취하기가 어렵거든 중원(中原)에서 물어 오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인지가 아뢰기를,
"중원에서도 이 글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효첨(孝瞻)이 아뢰기를,
"그 괴상하고 탄망(誕妄)한 설(說)은 드러내어서 쓰지 말게 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설(說)이 으레 다 괴이하고 허탄하니 어떤 것을 택하겠는가."
하였다. 효첨이 아뢰기를,
"옛날에 우리 태종(太宗)께서 음양(陰陽)의 설(說)이 와위(訛僞)가 너무 심하다 하여, 그 괴탄(怪誕)한 글을 서운관(書雲觀)으로 하여금 모두 불사르게 하고, 드디어 《장일통요(葬日通要)》를 만들어 세상에 행하였습니다. 지금 지리서(地理書)를 보면 명현(名賢)의 저술이 아니고, 모두 범상하고 용렬한 무리가 만든 것이어서, 과연 성상의 말씀과 같이 모두 괴탄(怪誕)합니다. 인주(人主)가 만일 다 불사르고 쓰지 말고자 하면 또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부득이하여 쓴다면, 그 중에 더욱 괴탄하여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또한 많이 있으니, 조목조목 적어서 쓰지 말게 하면, 무엇이 불가할 것이 있습니까. 또 그 무리들이 서로 그르게 여기어 취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런 등의 조목은 쓰지 않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장일통요(葬日通要)》가 만들어진 뒤로부터 장기(葬期)의 한계가 정하여져서, 지금은 어기는 자가 없다. 효첨이 말한 바, 그 무리들이 서로 그르게 여기는 것은 쓰지 말자는 설(說)이 진실로 옳다. 다만 그 글을 불사르고 쓰지 않으려면 장지(葬地)를 전연 택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국장(國葬)에는 오히려 가서 산머리[岵頭]를 찾으니 행할 수 있겠는가."
하니, 효첨이 대답하기를,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산 사람의 사는 곳도 반드시 장풍(臟風)하여 살 만한 곳을 씁니다. 하물며, 내 부모의 체백(體魄)을 의탁하는 곳을, 신이 어찌 사통오달(四通五達)한 땅을 쓰고, 둘러싸서 편안할 만한 땅을 택(擇)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눈으로 헤아려서 마땅하면 쓰고, 화복(禍福)의 설(說)은 쓰
지 않는 것이 가합니다. 신이 옛날 아비를 장사지낼 때에, 다만 신의 아비가 명(命)한 땅을 쓰고 지리(地理)의 설(說)은 쓰지 않았으며, 또 신이 어렸을 때에는 혹 하지 못하였으나, 등과(登科)한 이래로는 집안에서 음사(淫祀)를 금(禁)하여 끊어서, 노복(奴僕)까지라도 모두 금(禁)합니다. 그러하오나, 신의 집의 화복(禍福)이 다른 집의 음사(淫祀)를 존숭(尊崇)하여 믿고 장지(葬地)를 조심스럽게 택하는 자와 비교하면, 오히려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판서(判書), 이 말을 들어 봐."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이 선비가 그 아비를 과연 어떠한 땅에 장사하였는가. 산수(山水)가 과연 둘러싸지 않았는가?"
하니, 효첨이 아뢰기를,
"신이 아비의 유명(遺命)을 써서 문정(門庭)의 앞 봉우리[前峯]에 장사하였는데, 이것은 판서가 이미 일찍이 보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인지에게 이르기를,
"그러한가."
하니, 인지가 대답하기를,
"신이 그 땅을 보았는데, 과연 물이 쏟히려고 하는 땅 같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렇게 장사하면 어떠한가."
하니, 인지가 대답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장사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김사청(金士淸)도 역시 그 집 북쪽 땅에 장사하였습니다. 그러하오나, 경기(京畿)에는 쓸 만한 땅이 없으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날 해가 질 때에 들어가서 파(罷)하고 나오니 밤이 이미 2경(更)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112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79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역사-고사(故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甲寅/集賢殿直提學李季甸等上書曰:
臣等竊惟國家以踏驗之法, 任情輕重, 積年巨弊, 乃立貢法。 臣等始觀其制, 亦以爲美, 試(險)〔驗〕 數年, 民之怨嘆日深, 恐非便民之良法也。 是以臣等前者條上九事之時, 以貢法居一而陳之, 命下議政府, 議更其制, 然尙有可言者, 更將管見, 以煩天聽, 伏惟聖裁。
一, 三等田行九等年分之法, 其制甚悉, 然我國之地, 山川險阻, 原隰回互, 一區之田, 肥磽或異; 數里之地, 雨露不齊, 雖曰上上之年, 必有下下之農, 雖曰下下之年, 亦必有上上之農矣。 非惟一道爲然, 至於一邑皆然。 非惟一邑, 至於一村一里, 亦皆如是, 豈可槪定年分, 一例收稅乎? 雖在下下之年, 其爲農若在上上者, 則納其踏驗之時, 一結三十斗之稅可矣, 而只納下下年分四斗之稅, 不其太輕乎? 此孟子所謂多取之而不爲虐者也。 雖當上上之年, 其爲農若在下下者, 則納其下下之稅可矣, 而例收上上年分二十斗之稅, 不其太重乎? 此孟子所謂稱貸而益之者也。 太輕, 固不可也, 太重, 尤不可也。 一年之中, 一道一邑一村一里之間, 大貊小貊大桀小桀之道, 紛紛竝行, 是豈便民之良法哉? 所謂莫不善於貢者, 恐謂此也。 收稅輕重, 未得其宜, 則雖行九等年分之法, 何救於失中乎?
一, 災傷連五結以上, 方許免稅。 大抵一人之田連卜五結者寡, 而間在他人之田者多矣。 假令五結之田, 五人耕之, 而四人之田, 盡被災傷, 以一人旁田之實而四人例收其稅, 甚不可也。 一人之田連卜五結, 而以一卜之實, 幷納四結九十九卜之稅, 亦不可也。 且災傷之田, 其主告于守令, 守令審視, 然後報于監司, 監司覈實啓達, 然後遣敬差以審之, 其節目甚煩, 而審視之期甚迫。 若以一縣言之, 告災傷者四面沓至, 爲守令者以簿書期會之急、使命迎送之煩, 固無一一遍閱之暇矣。 小縣之守, 尙且未能, 況地廣而事劇者乎? 守令之慵且懶者, 固不足論, 雖其慈祥豈悌而勤於奉公者, 勢有所不能遍觀矣。 勢有所不能, 則雖有審視之法, 不能不差人以代視之, 所差之人, 其果能體國家恤民之意而無愛憎前却之私者乎? 踏驗委官, 猶是公差他邑之人, 雖或徇情, 不至於太爲高下, 今之差人, 卽皆其邑人也, 徇私肆意, 以爲低昻, 起陳換易, 損實顚倒, 有甚於委官者矣。 是豈國家之所知也? 國家之意以爲守令審之, 監司覈之, 敬差覆之, 一一審視, 至于再三, 災傷之地, 必無不施矣。 夫守令, 但任一邑之事耳, 尙未能遍觀, 況監司乎? 況敬差乎? 災傷之人, 贏糧告狀, 而終不得免者多矣。 前年慶尙敬差之事是已。 爲民之病, 可勝言哉? 踏驗之法, 雖有徇情高低之弊, 然每田而閱之, 豈有以全損之田爲全實之理乎?
一, 正田有陳全科收稅之法, 惡其民之故爲不耕也。 然民天在田, 不耕則無食, 豈憚於勤力而故令陳荒也? 其不耕者, 意有在也。 大抵民之爲農, 上以充賦稅之供, 下以爲事育之資。 若其磽薄, 所出甚少, 則非唯不足以資一己之生, 賦稅之納, 尙未贍焉, 何故終歲勤動, 肯爲有損無益之事乎? 不爾則古有一易再易之田, 必其地力之可休者也。 不爾, 則必其死喪疾疫之故、人力之不足者也。 凡此皆出於不得已, 而仁政之所宜恤也。 況於又徵其稅, 以困民生乎? 是又不便之甚者也。
一, 我國土地塉薄, 雖力耕種, 所收不多, 民業甚艱。 每當秋成, 新穀才登, 各司貢物防納之人, 沿戶收價, 民旣受侵, 而義倉糴米與夫私債徵納之人, 又從而督之, 耕農所獲, 已至於懸罄矣。 及乎春月, 納其上京之稅, 然後始收州倉所納之稅, 民旣無儲, 至賣田宅以納之, 或糴義倉以納之。 若未畢納, 則守令必受重譴, 故其徵督之嚴、鞭韃之慘, 民之痛楚, 有不可忍言者矣。 況近年以來, 屢遭凶荒, 上京之稅, 尙貸義倉而充之, 況州倉之所納乎? 往年如是, 今年又如是, 陳陳相因, 累年未納, 義倉之儲, 日至於耗, 且其私債貢價, 亦皆沓積。 自此以往, 雖有數年之豐稔, 竟莫之償矣。 縱使稅之輕重, 皆適於實, 民生尙憂不贍, 況貢法之行, 輕納者少而重納者多, 赤子之愁嘆, 何時而息乎? 臣等竊謂有子曰: "百姓不足, 君誰與足?" 百姓不足而日至於困窮, 實君上之憂也。 初立此法, 一則曰試驗, 二則曰利民。 立法以來, 民之愁怨如此, 豈萬世經久可行之法哉? 近日義鹽之事, 人爭非之, 而議者堅執, 若非殿下之剛斷, 則生民之病, 容有極乎? 然鹽法幷施於近地, 其弊易露, 貢法只行於遠道, 其弊難知。 若必以爲可行, 則姑停下三道, 先試於京畿一道, 行之數年, 則貢法之便否、民心之好惡, 不待論辨而自見矣。 善乎! 先儒蘇軾之言曰: "方其未有貢也, 以貢爲善也, 及其旣貢, 而後知其有不善也。" 今不善之實, 旣已驗矣, 乃何固守而不變乎? 興一利, 不如除一害; 生一事, 不如減一事。 貢法本未爲善, 而尤不便於我國之田, 故節目雖甚詳, 終必至於病民矣。 若因仍不改, 生民之困瘁, 將無有紀極矣。 伏惟殿下俯察哀矜, 以紓小民之困, 不勝幸甚。 且臣等前日所上之書未行之條, 如守令貪汚之風、法官徵贖之事、臺諫圓議之弊, 更令商確施行, 亦臣等之至願也。
書進。 上覽之曰: "集賢殿再上書, 何無金汶之名乎?" 遂引見季甸及應敎魚孝瞻、禮曹判書鄭麟趾、都承(皆)〔旨〕 黃守身于內殿, 親敎曰: "昔予御經筵之時, 常見集賢殿官, 每說予心懷, 彼亦陳所蘊, 邇來身嬰疾病, 久未接見, 予之心懷, 未能悉知。 今疏論貢法之弊, 不識予立法本意, 欲言其事召來。 予自卽位以來, 立法多矣。 不明所致, 未究其終, 必有後弊, 如錢幣戶牌水車雅樂之類, 難以枚擧。 立法之時, 若預料其終而審處之, 不至如此。 抑思之, 古之人君, 有才踰弱冠, 料事明斷, 以成功業者, 不識彼何能如是哉? 夫我則不能損實之法, 不是我國創始, 實前朝所行之法。 我太祖因而行之, 始行損實之初, 民甚便之。 予在幼時, 亦以爲是法卽殷之徹法、周之井田之制也, 及其久也, 其弊滋甚。 於是言之者多, 貢法之議始起, 然予未卽施行。 厥後申槪始建議, 欲行貢法。" 仍呼鄭麟趾曰: "卿等重試之年, 亦發題策問。 且卿爲忠淸監司, 上書請之, 予遂決意行之。 今幾十年, 未見其效, 而利害之說紛紛。 予之本意, 非爲厚斂, 唯慮損實之法, 任情輕重, 末流之弊, 將不可勝, 故欲行此法耳。 予若便忘之, 置而不爲, 則於予病軀可矣。 但古人云: ‘身當其勞, 以逸遺後。’ 此予之未能忘也。 今集賢之疏, 有連伏五結之語, 予未詳知其意, 爾等言之。" 季甸對曰: "連伏五結之田, 假令五人耕之, 而四人之田, 盡被災傷, 以一人旁田之實, 四人例收其稅; 一人之田連伏五結, 而以一負之實, 竝納四結九十九負之稅。 小民之田, 不過一二結者多矣。 一二結所耕之地, 盡被災傷, 而國家必徵其稅, 則其民將以何物充賦稅, 將以何物養父母育妻子乎? 其民之愁歎, 可勝言哉? 此法決不可行也。
上曰: "此弊誠然矣。 然未滿五結, 災傷之地, 必一一遍閱, 則是與損實之法無異矣。" 又曰: "今上疏云: ‘百姓足, 君孰與不足?’ 且昔年之疏, 亦云: ‘立貢法以充之。’ 予豈爲厚斂而爲是法哉? 有如集賢之儒, 不知予意, 況其他乎?" 季甸對曰: "臣豈謂厚斂哉? 昔臣始仕之時, 國家令百官各陳貢法便否, 臣以爲可行, 及貢法始行之時, 亦意其終無弊而可行也。 數年之後, 民之愁歎者有之, 言其有弊者亦多, 臣始疑之有年矣。 臣家兄爲慶尙道監司, 臣隨母而居, 臣兄所使上京之人, 必來見臣, 候母安否而還, 故所來之人, 臣必見之。 見之則必問貢法便否, 皆答云: ‘貢法不便。 災傷之田, 一不(刈獲)〔刈穫〕 , 皆輸其稅, 民之受弊極矣。’ 又慶州所居中樞院錄事金繼祖之來, 臣亦問之, 答曰: ‘貢法不便矣。 每年無實而稅存, 民甚苦之。 前年尤甚, 率皆糴義倉之米, 還納州倉, 以充其稅, 故前年州倉所納, 率皆陳米。 國家欲知虛實, 差人往視新陳之多寡, 可知其實矣。’ 然此輩之言, 猶或未可盡信。 今舍人盧叔仝歸覲慶尙而還, 臣見而問之, 答曰: ‘慶州, 吾族親居之。 語予云: 「今年災傷之田, 虛納其稅, 實爲痛心。」’ 叔仝, 不妄語人也, 此必信然矣。 法之不善, 莫此爲甚, 此法終不可行也。" 上曰: "貢法之弊, 季甸之言爲實。" 麟趾曰: "此言, 誠不誣矣。 然此實非貢法之致然, 乃歲後收稅之故也。 京畿亦已有之。 今京畿有一邑收稅未收, 至於三百石者, 若歲前收納, 安有此弊?" 孝瞻曰: "縱使歲前收納, 民於無實之田, 罄其所有, 充納其稅, 則無所食矣。 國家若任其死亡而不救則已矣, 若曰必須可救, 則又還出州倉之米以賑之, 乃可救也, 其弊實無異也。 是則非貢法使然而何?" 守身曰: "集賢殿所言, 誠是矣。 然業已爲之, 須於今年行之可矣。" 孝瞻又曰: "貢法之所以不可行者有之。 自古帝王, 子惠困窮, 匹夫匹婦, 不獲自盡, 民主罔與成厥功。 以臣道言之, 一夫不獲其所, 若己推而納之溝中。 且鰥寡孤獨此四者, 天下之窮民而無告者, 文王發政施仁, 必先斯四者。 然則惠恤窮民, 乃帝王之要道也。 今貢法之行, 悅之者多, 而不悅者亦居其半。 其悅之者, 乃富者也, 其不悅者則實貧者也。 而富者之田多膏腴, 貧者之田多塉薄。 富者一田雖損, 而一田必實, 貧者其田本塉薄而少, 如遇災傷, 全不刈穫, 雖在豐年, 亦不加稔。 今年如是, 明年又如是, 則窮民一生, 無復蘇息之期, 其苦奚可勝言! 哿矣富人, 哀此煢獨。 且臣於上德, 得有土田, 非止一二處。 雖非良田, 然間亦有美者, 乃令奴婢耕稼, 一田雖不實, 亦有一田必實。 昔損實之時, 一結納米三十斗, 今則雖上等田, 上上年只納二十斗之稅, 其利可知。 以臣一己之利言之, 安有如貢法? 而臣必欲勿行者, 專以體上意, 欲恤窮民也。 今貢法之行, 國家若徒欲勿爲姦人所欺則已矣, 果如上敎欲爲便民之計, 則貢法亶不可行也。 今國家之法, 一民飢死, 尙且驚駭, 監司守令監考, 無不被責, 況今貢法若行, 將見如一飢民之死者, 不其幾千人矣。 如使此法之行, 或致一民飢且死, 則猶云謀大事者, 不計小弊矣。 今國家, 窮民殆半矣。 以聖人重一民飢死之念, 豈不大可驚懼耶?" 上曰: "所言誠是矣。 然損實之弊, 旣如彼, 而不可不立貢法, 使後世猶有所持循也。" 孝瞻對曰: "凡法令之行, 但使綱紀明肅而已。 若紀綱不明, 雖用貢法, 何救於弊乎? 今當聖明之日, 猶且姦吏用術, 以起爲陳, 得罪者不絶矣。 今日雖立貢法, 以爲防範, 以遺于後, 若遇紀綱不明之時, 君弱臣强, 奸臣用權, 則必一朝毁其防範而爲之。 然則貢法與損實, 奚擇焉? 若慮末流之弊, 貢法, 損實, 實無異也, 安有不善如貢法哉? 願必罷貢法。" 於是, 上默然曰: "予豈謂此法正無弊也? 但損實之弊如彼, 故爲子孫之計, 未能卽從其請, 召諭予意耳。 然此法猶未克愜於予心, 當更思之。" 上又曰: "集賢殿前日之疏, 守令六期之法, 因許政丞之請而立之。 其遞代之頻、窠闕充差等事, 姑置不論, 其下等而罷者, 歲月未久, 卽復用爲守令, 其上等而來者, 又未久復出爲守令。 以此觀之, 雖復立三載之法, 前所用者, 卽復用之, 其久任一也。 又告訴之禁則昔者嘗因內宴, 許政丞請於予曰: ‘前朝之臣, 訴普塔失里王於上國, 上國執王以歸, 無一人出救者。 我國風俗之薄惡如此, 其部民告訴之風, 漸不可長也。’ 予問於諸宰相, 朴訔政丞曰: ‘可矣。’ 柳廷顯政丞默焉而不肯。 睦進恭曰: ‘臣曾經監司之任, 備知之矣, 此法誠不可行。’ 故未敢輕易立法。 其後許政丞於樂天亭豐呈日, 泣請於太宗, 太宗 善之, 乃令卽立此法。 然諸臣皆以爲: ‘此法, 其終能無弊擧行乎?’ 厥後以守令不法者多, 朝議欲遣暗行察訪, 予問諸許政丞, 許政丞云: ‘若以君命下問則可矣。’ 此則許政丞輕易發言, 似不持重矣。 於是, 乃遣暗行察訪。 察訪李宗揆等反致有弊, 其後暗行察訪之遣, 遂廢矣, 今亦未可擧行也。 但行臺監察發遣之事, 前日議之鄭判書, 則以謂: ‘行臺之行急速, 未暇得實。’" 麟趾對曰: "臣意欲其經時而還耳。" 上謂守身曰: "行臺發遣之事, 更令磨鍊施行。" 上又曰: "至於言官之事, 疏意亦好矣。 議不合者除之, 其弊有之乎?" 麟趾、守身對曰: "此風, 前朝之季有之, 今實無有也。" 上曰: "我朝亦一二人, 曾有之, 今則無之矣。 予慮言路之將塞也, 其指言寡躬闕失者, 則雖或失中, 亦不加罪, 故予卽位以來, 以言事被罪者鮮矣。 間或有之, 亦別有他故也。 今疏意, 予甚嘉之, 但以新法固難輕易爲之。" 守身曰: "疏中亦言法官勿用贖罪之物。" 上曰: "曾聞憲司捕犯罪之物, 推問之際, 下民譏其欲自用也。 以法官而坐食贓盜之物, 誠亦未安。" 麟趾曰: "如此之例多矣。 兵曹之鹽、禮曹之進奉紙、戶曹之紙價, 皆此例也。" 於是, 上稍疑之。 孝瞻曰: "臣等之請, 非特以法官而坐食贓盜之物未便也。 贖罪之徵, 法官甘於自用, 故不時理出, 弊及於民。 如使不得自用, 則民弊除矣。" 上曰: "然矣。" 孝瞻又曰: "非特此也。 凡犯罪在逃者之收贖, 法官例徵其人族屬, 雖至疏遠者, 名爲干連者, 則必徵之。 今法雖死罪, 而父子兄弟之親, 尙不延及, 況以贖罪之徵而濫及疎屬, 其拂人情逆天理甚矣。 說者曰: ‘若不徵其贖, 則何以懲惡?’ 此甚不然。 彼爲惡犯罪者, 雖徵其父子兄弟, 固無足懲, 乃徵其疎屬, 顧何所懲? 況元律奴在主家犯罪, 則徵於主家, 不在主家犯罪, 而無他可徵者, 則免徵? 古亦有免徵之法, 今之贖徵, 豈必不得已之事乎?" 上曰: "予曾見犯罪收贖徵於某處之語, 未知所載之文, 無乃《唐律疏議》乎? 集賢殿, 其詳考古制以聞。" 仍謂守身曰: "此事, 亦宜磨鍊施行。" 上又謂麟趾曰: "陰陽地理, 予非謂不好其術而自賢也。 邇來, 其說竝起, 紛紛不一, 難於適從。 去年諸君吉禮之時, 以陰陽之法諸方皆凶, 無壻婦出入坐立之處。 且昔定都之後, 劉旱雨云: ‘此都無作門之處。’ 太宗徐徐問之, 旱雨漸說某處可作門, 其終旱雨所說作門處, 果非一二。 又相地輩用心不公, 雖有所懷, 不肯出言。 往日星原君之事, 至被拷訊, 乃免其罪。 鄭廣元乃儒者而當該官也, 聞其事, 亦不言之。 又昔作敦義門, 今所出之路, 乃直路也。 但以出於李叔蕃門前之故, 乃出仁德殿前路作門。 及予卽位之後, 仁德殿幸壽康殿之日, 因語次乃覺之, 卽令改作其門。 然太宗終亦未識其故也, 人主不無墮於其術中之理。 今欲令遍閱地理諸書, 考其同異, 採其要語, 簡略成編, 使之便於遵用, 何如?" 麟趾曰: "伏羲 《先天圖》八卦位數, 文王 《後天圖》八卦位數, 皆易置不同, 然各有義理。 地理諸書, 其說雖不同, 亦各有理, 難以去取。 且八卦之象, 列見於峯頭矣。" 上曰: "八卦之象, 列見峯頭, 豈至如是? 但去取旣難, 則於中原問之而來, 何如?" 麟趾曰: "於中原遇其能曉是書者, 亦難矣。" 孝瞻曰: "其怪誕之說, 表而出之, 令勿用之可也。" 上曰: "其說, 例皆怪誕, 何者, 可擇乎?" 孝瞻曰: "昔我太宗以陰陽之說訛僞旣甚, 其怪誕之書, 悉令書雲觀焚之, 遂成《葬日通要》, 以行于世。 今觀地理之書, 不是名賢所著, 乃盡凡庸之徒所爲, 果如上敎, 皆爲怪誕。 人主若欲悉焚勿用, 亦不難矣。 但旣曰不得已而用之, 則其中尤怪誕而易可見者, 亦多有之, 條錄而令勿用之, 有何不可? 且其徒所相非之而不取者有之, 此等之條, 勿用可也。" 上曰: "自成《葬日通要》之後, 葬期之限遂定, 今無違之者。 孝瞻所言, 其徒所相非之者, 勿用之說誠可矣, 但其書欲焚之而不用, 則葬地專不擇之, 而國葬尙於往尋岵頭, 可得行之乎?" 孝瞻對曰: "存亡一也。 生人居處, 必用藏風可居之地, 況吾親托體之處, 臣豈謂宜用四通五達之地而不擇其環抱可安者乎? 但於眼量所宜者則用之, 不用禍福之說可也。 臣昔葬父之時, 但用臣父所命之地, 而不用地理之說。 且臣於少時則或未能, 自登第以來, 於家內禁絶淫祀, 雖至僕隷, 亦皆禁之。 然臣家禍福, 視他家崇信淫祀愼擇葬地者, 猶不相殊。" 上曰: "判書可聽此言。" 仍曰: "此儒葬其父, 果於何如之地乎? 山水果不回抱乎?" 孝瞻曰: "臣用父遺命, 藏於門庭前峯。 此則判書已曾見之矣。" 上謂麟趾曰: "然乎?" 麟趾對曰: "臣見其地, 果如欲瀉之地也。" 上曰: "然則葬之如此, 何如?" 麟趾對曰: "世人如此葬之者亦有之, 金士淸亦於其家北之地葬之。 然京畿則無可用之地, 不得不爾也。" 是日, 日沒而入, 及罷而出, 夜已二鼓矣。
- 【태백산사고본】 36책 112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79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역사-고사(故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