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 판서 정인지가 영릉 지문을 지어 바치다
예조 판서 정인지(鄭麟趾)가 영릉(英陵) 지문(誌文)을 지어 바쳤다. 그 글에 말하기를,
"삼가 상고하건대, 왕후(王后)의 성은 심씨(沈氏)이니, 청송(靑松) 세가(世家)이다. 황증조(皇曾祖)의 휘(諱)는 용(龍)이니 고려(高麗) 증 문하 시중(門下侍中) 청화 부원군(靑華府院君)이고, 황조(皇祖)의 휘(諱)는 덕부(德符)인데,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을 도와 두 번 시중(侍中)이 되었고, 우리 공정왕(恭靖王) 때에 이르러 의정부(議政府) 좌정승(左政丞)이 되어 청성백(靑城伯)을 봉(封)하였고, 황고(皇考)의 휘(諱)는 온(溫)이고, 황비(皇妣) 안씨(安氏)는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하였는데,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시호(諡號) 소의공(昭懿公) 천보(天保)의 딸이다.
홍무(洪武) 을해 9월 기미(己未)에 양주(楊州) 사제(私第)에서 왕비를 낳았다. 왕후가 나서부터 정숙하고 완만(婉娩)하여 오직 덕(德)을 행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출합(出閤)061) 하실 때에, 태종 대왕(太宗大王)께서 훌륭한 문족(門族)에서 뽑아 배필을 구하는데, 영락(永樂) 무자년에 왕후(王后)가 장차 계(筓)062) 하게 되자, 덕행(德行)으로 용의(容儀)로 와서 빈(嬪)이 되어, 경숙 옹주(敬淑翁主)를 봉하였고, 공경하여 양궁(兩宮)을 섬기어 두텁게 사랑을 받았다. 가실(家室)의 마땅한 날 내전(內殿)에 정위(正位)하였다. 인자하고 검소하여 엄숙하고 옹화(雍和)한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왕후가 나아오고 물러갈 때에 전하(殿下)께서 반드시 일어서시니, 그 공경하고 예로 대하심이 이와 같았다. 정유년 가을 9월에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고쳐 봉하였다. 무술년 여름에 문무 백관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저궁(儲宮)이 덕스럽지 못하니, 청컨대 어진이를 가리어 세자를 세우소서.’ 하였다. 태종 대왕께서 그대로 좇으시어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께 갖추 아뢰어서 전하를 책립(冊立)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삼고, 왕후를 봉하여 경빈(敬嬪)을 삼았다. 이해 가을 9월에 전하가 태종(太宗)의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하고, 12월에 왕후를 봉하여 공비(恭妃)를 삼았다. 신축년 가을 9월에 태종 문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특별히 단견(段絹)을 내리고, 이로부터 홍희(洪熙) 선덕(宣德) 사이에 금단(錦段)·사라(紗羅)의 하사(下賜)가 여러 번 이르렀다. 임자년 정월에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중궁(中宮)에서 아름다운 칭호가 있는 것은 예전 법이 아니라.’ 하여, 5월에 왕비로 고쳐 봉하였다.
왕후가 인자하고 어질고 성스럽고 착한 것이 천성(天性)에서 나왔는데, 중궁(中宮)에 정위(正位)한 뒤로는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조심하여 빈잉(嬪媵)을 예(禮)로 접대하고, 아래로 궁인(宮人)이 미치기까지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은혜를 가하지 않음이 없으며, 후궁(後宮)이 나아와서 뵙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위로하고 용납하는 것을 가하며, 만일 상감께서 총애하신 자는 특별히 융성한 대우를 주어, 지극한 정[至情]이 사이가 없으며, 낳으신 여러 아들을 모두 후궁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시니, 후궁이 또한 마음을 다하여 받들어 길러서 자기 소생보다 낫게 하였으며, 또 일을 위임하여 의심하지 않고 맡기시니, 후궁이 또한 지성껏 받들어 순(順)히 하여 감히 게을리 함이 없었다. 이 때문에 빈(嬪)·잉(媵)이하가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부모 대접하듯이 하였다. 서출(庶出)의 자식 보기를 모두 소생 아들과 같이 하였으며, 어선(御膳)이 나오면 반드시 몸소 살펴보아 힘써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국모(國母)로 있은 지 29년 동안에 경계(儆戒)의 도움이 있고, 연안(宴安)063) 의 사사(私事)가 없었으며, 한 번도 친척을 위하여 은혜를 구하지 않았으며, 또 절대로 바깥 일에 참여하지 않고, 비록 궁중에서 날마다 쓰는 자디잔 일이라도 반드시 위로 들리어 감히 임의로 하는 일이 없었다. 곤의(壼儀)가 심히 발라서 덕화(德化)가 밖에 흘렀으며, 여러 아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반드시 의방(義方)으로 하여 인지(麟趾)·종사(螽斯)의 경사가 있었다. 대개 하늘이 성인(聖人)을 내매, 반드시 어진 배필을 지어서 지극한 다스림[至治]을 이루나니, 주(周)나라의 태사(太姒)는 풍아(風雅)에 파영(播詠)되어 천고(千古)에 빛났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이미 지극한 덕과 지극한 다스림으로 문왕(文王)의 뒤를 따랐는데, 왕후께서 또 이와 같은 덕과 행실이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지은 배합이 되어서,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예전에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정통(正統) 병인 3월 초10일에 왕후께서 병환이 드시매, 전하(殿下)께서 낮과 밤으로 임(臨)하여 보시고, 동궁(東宮) 이하가 옆에서 친히 탕약(湯藥)을 받들어, 무릇 의료(醫療)와 기도(祈禱)에 극진한 정성을 드리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이달 24일 신묘에 별궁(別宮)에서 승하하시니, 춘추(春秋)가 52세이다. 안으로는 궁첩(宮妾)과 밖으로는 대소 신료(臣僚)에서 복례(僕隷)에 이르기까지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하늘이 어찌하여 아름다운 덕은 후하게 주시고, 오직 수고(壽考)는 주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아아, 슬프다. 전하께서 어진 보좌를 일찍 잃으심을 슬퍼하시어 애도(哀悼)를 이기지 못하여, 백의(白衣)와 소선(素膳)으로 30일을 마치시고, 책(冊)과 시호(諡號)를 내리시어 소헌 왕후(昭憲王后)라 하고, 영릉(英陵)을 헌릉(獻陵) 서강(西崗)에 다스리어, 궁(宮)은 같이 하고 실(室)은 달리 하여 동쪽 실(室)에 편안히 모시었으니, 이것은 예(禮)이다.
왕후께서 8남(男) 2녀(女)를 낳으셨는데, 맏아들은 아무 【문종(文宗)의 어휘(御諱). 】 이니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고, 다음은 아무 【세조(世祖)의 어휘(御諱). 】 이니 수양 대군(首陽大君)을 봉하고, 다음은 이용(李瑢)이니 안평 대군(安平大君)을 봉하고, 다음은 이구(李璆)이니 임영 대군(臨瀛大君)을 봉하고, 다음은 이여(李璵)이니 광평 대군(廣平大君)을 봉하였는데 2년 먼저 졸(卒)하였고, 다음은 이유(李瑜)이니 금성 대군(錦城大君)을 봉하고, 다음은 이임(李琳)이니 평원 대군(平原大君)을 봉하였는데 1년 먼저 졸(卒)하였고, 다음은 염(琰)이니 영흥 대군(永興大君)을 봉하였고, 맏딸은 정소 공주(貞昭公主)인데 일찍 졸(卒)하였고, 다음은 정의 공주(貞懿公主)인데, 광덕 대부 안맹담(安孟聃)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왕세자빈 권씨(權氏)는 증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전(專)의 딸인데, 원손(元孫)과 평창 군주(平昌郡主)를 낳고 일찍 졸(卒)하였고, 사칙(司則) 양씨(楊氏)는 딸 하나를 낳았고, 궁인(宮人) 장씨(張氏)는 아들 하나를 낳았고, 정씨(鄭氏)도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수양(首陽)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윤번(尹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숭(崇)이니 도원군(桃源君)을 봉하고, 딸은 모두 어리다. 안평(安平)은 증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을 낳았는데, 맏은 우직(友直)이니 의춘군(宜春君)을 봉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임영(臨瀛)은 증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左議政) 최승녕(崔承寧)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맏은 주(澍)이니 오산군(烏山君)을 봉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광평(廣平)은 중군 호군(中軍護軍) 신자수(申自守)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금성(錦城)은 증 의정부 좌의정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 들었고, 평원(平原)은 증 의정부 좌의정 홍이용(洪利用)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고, 영흥(永興)은 사재 부정(司宰副正) 송복원(宋復元)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정의 공주(貞懿公主)는 4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하였다. 처음에 인지(麟趾)가 초(草)를 갖추어 올리니, 임금이 보고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지문(誌文)은 후세에 함께 보는 것인데, 지금 왕비가 간청하고 알현하는 사사(私事)가 없고, 아랫사람에게 미치는 은혜가 있어, 의심하고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이 뜻으로 인지(麟趾)에게 일러 아울러 싣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112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77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어문학-문학(文學) / 재정-진상(進上)
- [註 061]
○禮曹判書鄭麟趾製《英陵誌》以進。 其文曰:
謹按王后姓沈氏, 靑松世家。 皇曾祖諱龍, 高麗贈門下侍中、靑華府院君。 皇祖諱德符, 相高麗 恭愍王, 再爲門下侍中, 至我恭靖王朝, 以議政府左政丞, 封靑城伯。 皇考諱溫。 皇妣安氏, 封三韓國大夫人, 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諡昭懿公 天保之女。 以洪武乙亥九月己未, 生王后于楊州之私第。 王后生而淑婉, 維德之行。 我殿下之出閤也, 太宗大王妙選令族以求配。 永樂戊子之歲, 王后將筓, 以德以容, 乃得來嬪, 封敬淑翁主。 敬事兩宮, 篤承眷愛, 宜家之日, 正位于內, 曰慈曰儉, 致肅雍之美。 后之進退, 殿下必起立, 其見敬禮如此。 丁酉秋九月, 改封三韓國大夫人。 戊戌夏, 文武百官上書言: "儲宮不德, 請擇賢以建世子。" 太宗大王從之, 具奏于太宗文皇帝, 冊殿下爲王世子, 封王后爲敬嬪。 是年秋九月, 殿下受太宗內禪卽位, 十二月, 封后爲恭妃。 歲辛丑秋九月, 太宗文皇帝遣使特賜段絹。 自是洪熙、宣德之間, 錦段紗羅之賜累至。 歲壬子正月, 有司言: "中宮有美稱, 非古也。" 五月, 改封王妃。 后慈良聖善, 出於天性, 正位中宮之後, 益自謙謹, 禮接嬪媵, 下及宮人, 無不撫愛加恩, 後宮有進見者, 必加慰納, 若所寵引者, 特贈隆遇, 至情無間, 所生諸子, 皆令養之。 後宮亦盡心奉育, 過於己出。 又委之以事, 任之不疑, 後宮亦披誠奉順, 無敢懈怠。 由是嬪媵以下, 愛敬如待父母, 視庶出之子, 皆如所生。 御膳進則必躬自省視, 務盡誠敬, 母儀二十九年之間, 有儆戒之助, 無宴安之私。 一不爲親戚求恩, 又絶不與外事。 雖宮中日用纖細事, 必上聞, 無敢擅爲。 壼儀克正, 化流于外。 敎誨多男, 必以義方, 乃有麟趾螽斯之慶。 蓋天生聖人, 必作賢匹, 以成至治。 周之太姒, 播詠風雅, 焜耀千古, 今我殿下, 旣以至德至治, 追踵文王, 而王后又有如是之德之行, 允爲天作之合, 而文王后妃, 不獨專美於前矣。 正統丙寅三月初十日, 王后感疾, 殿下日夜臨視, 東宮以下侍側, 親奉湯藥, 凡醫療禱祀, 無所不用其極。 是月二十四日辛卯, 薨于別宮, 春秋五十二。 內而宮妾, 外而大小臣僚, 以至僕隷, 莫不痛哭。 天胡厚是懿德, 獨不壽考而至於斯歟! 嗚呼痛哉! 殿下悲其早失良佐, 不勝哀悼, 以白衣素膳, 終三十日, 降冊諡曰昭憲王后。 治英陵于獻陵之西崗, 同宮異室, 安庴于東室, 禮也。 王后誕八男二女。 元子曰 【文宗御諱】 冊封王世子, 次曰 【世祖御諱】 封首陽大君, 次曰瑢, 封安平大君, 次曰璆, 封臨瀛大君, 次曰璵, 封廣平大君, 先二年卒。 次曰瑜, 封錦城大君, 次曰琳, 封平原大君、先一年卒。 次曰琰, 封永興大君。 女長貞昭公主, 早卒。 次貞懿公主, 下嫁光德大夫安孟聃。 王世子嬪權氏, 贈議政府左議政專之女, 生元孫及平昌郡主而早卒。 司則 楊氏生一女, 宮人張氏生一男, 鄭氏生一男, 皆幼。 首陽娶中樞院使尹璠之女, 生一男二女。 男曰崇、封桃原君〔桃源君〕 , 女皆幼。 安平娶贈議政府左議政鄭淵之女, 生二男一女。 長曰友直, 封宜春君, 餘皆幼。 臨瀛娶贈議政府右議政崔承寧之女, 生三男一女。 長曰澍, 封烏山君。 餘皆幼。 廣平娶中軍護軍申自守之女, 生一男, 幼。 錦城娶贈議政府左議政崔士康之女。 平原娶贈議政府左議政洪利用之女, 無子。 永興娶司宰副正宋復元之女。 貞懿公主生四男二女, 皆幼。
初, 麟趾具草以進。 上覽之, 謂承政院曰: "誌文, 乃後世所共見。 今王妃絶干謁之私, 有逮下之恩, 無所疑忌, 其以此意諭麟趾, 使幷載之。"
- 【태백산사고본】 36책 112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77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어문학-문학(文學) / 재정-진상(進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