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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112권, 세종 28년 5월 13일 경진 2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산릉 도감으로부터 석실 축조에 대한 건의를 받다

산릉 도감(山陵都監)이 아뢰기를,

"석실(石室)의 양방석(兩旁石)·북우석(北隅石)·문역석(門閾石) 밑에 흙을 파서 평평하게 하고, 숯가루[炭末]는 빼고 다만 삼물(三物)059) 로 두께가 1척쯤 되게 채워서 다진 뒤에 지석(支石)을 배열하고, 그 지석사이에도 역시 삼물(三物)로 메워 쌓고, 그 위에 박석(薄石)을 놓고 양방(兩旁)의 등석(等石)을 세우고, 또 석실(石室) 바깥 사면(四面)에 지석(支石)을 제하고 삼물(三物)을 써서 주회(周回)를 빙 돌려 쌓고, 개석(蓋石)위에는 두께를 4척 쌓고, 또 숯가루를 써서 주회(周回)에 두께 5촌으로 둘러 쌓고, 개석(蓋石)과 가치개석(加置蓋石)에는 돌의 높고 낮은 것을 따지지 않고 각각 그 돌위에 삼물(三物)과 숯가루의 두께를 위에서 정한 척수(尺數), 촌수(寸數)와 같이 쌓아서, 물이 흘러 정류(停留)할 곳이 없게 한 연후에, 만석(滿石) 둘레 안에는 오로지 본토(本土)를 써서 단단히 쌓아 섬원점개석(剡圓苫蓋石)에 이르고, 4면을 쌓을 때에는 숯가루의 성질이 부허(浮虛)하여 높이 쌓기가 어려우니, 석실(石室) 사면석(四面石) 밖에 삼물(三物)의 두께 4척을 계산하여 한 축판(築板)을 세우고, 숯가루의 두께 5촌을 계산하여 또 축판(築板)을 세우고, 【두 축판의 두께가 합계 5촌이다. 】 두 축판의 안에는 동자목(童子木)을 써서 괴어 바쳐서 그 가운데를 비게 하고, 방석(旁石)과 내판(內板) 사이에는 삼물(三物)로 다지고, 외판(外板) 바깥과 땅 사이에는 본토(本土)를 써서 단단히 다진 연후에, 두 축판을 빼내고 숯가루를 써서 그 가운데에 메워 다지어, 이렇게 쌓아 올리고 【자[尺]는 영조척(營造尺)을 쓴다. 】 또 석실(石室)안의 바닥에는 동망(銅網)을 꽉 차게 깔고, 동망의 4면에는 철차정(鐵叉釘)으로 누르고, 석체(石砌)를 그 위에 놓고, 석체 안에는 황토(黃土)와 세사(細沙)로 단단히 쌓고, 석체(石砌) 밖에는 본토(本土)와 거친 모래로 서로 섞어 매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112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책 673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註 059]
    삼물(三物) : 석회(石灰)·세사(細沙)·백토(白土).

○山陵都監啓: "石室兩旁石北隅石門閾石下, 掘土平正, 除炭末, 只將三物, 厚一尺許築實後, 排列支石。 其石間, 亦用三物塡築, 上置薄石, 以立兩旁等石。 又石室外四面, 除支石, 用三物周回合築於蓋石上, 厚四尺。 又用炭末, 亦周回合築, 厚五寸。 其蓋石及加置蓋石, 不計石之高低, 各從其石上。 三物與炭末, 厚如上所定尺寸築之, 使其水勢傾注, 無停留之處, 然後於滿石圍內, 專用本土堅築, 至剡圓苫蓋。 右四面築時, 炭性浮虛, 高築爲難, 從石室四面石外, 計三物厚四尺, 立一築板, 計炭末厚五寸, 又立築板。 【兩板厚, 幷計五寸。】 兩板之內, 用童子木支撑, 虛其中。 旁石與內板間, 用三物, 外板之外, 專地間用本土堅築, 然後去其兩板, 用炭末塡築其中。 如此築上, 【尺用營造尺】 又石室內底滿布銅網, 其網四面, 用鐵叉釘鎭之, 置石砌於其上, 石砌內, 用黃土細沙堅築, 石砌外, 用本土與麤沙相雜塡之。

從之。


  • 【태백산사고본】 36책 112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책 673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