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상기는 천자로부터 서인에까지 귀천의 구분이 없음을 김문 등이 상서하다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김문(金汶)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붕어(崩御)하매, 이미 하관(下棺)하자, 대공(大功)은 15일만 입고, 소공(小功)은 14일만 입고, 시마(緦麻)는 7일만 입었는데, 호씨(胡氏)029) 가 논평하기를, ‘효문제(孝文帝)는 소인(小仁)에 빠져서 상기(喪期)를 단축시키고 예절을 폐하였으니, 진실로 죄가 있다. ’고 하였습니다. 3년의 상복은 생존한 사람의 효심(孝心)을 다하게 하는 것이니, 또한 아버지가 명령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문제(文帝)의〉 유조(遺詔)에 말한 것은 이민(吏民)에게 이른 것인데, 태자(太子)는 뒤를 이은 임금이니 어찌 이민이겠습니까마는, 경제(景帝)가 이 글을 함부로 사용하여 3년의 상기를 단축시켜 군친(君親)에게 박대하였으니, 그 죄가 더욱 큰 편입니다. 주(周)나라 임금 옹(邕)이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3년의 상기는 천자(天子)에까지 미치지마는, 다만 군국(軍國)의 사무가 중대하니 모름지기 조정에 나와서 정사는 청단(廳斷)하게 하고, 최마(衰麻)030) 의 절차와 점려(苫廬)031) 의 예절은 모두 이 제도에 따라서 망극(罔極)한 슬픔을 펴도록 하고, 백관(百官)들은 마땅히 유령(遺令)에 의거하여, 이미 장사를 지내고 난 뒤에는 상복을 벗고 마침내 3년의 제도를 펴게 하고, 오복(五服)032) 의 안에서도 또한 예절에 의거하게 하라. ’’하였는데, 호씨가 논평하기를, ‘한나라 문제가 상기를 단축시킨 이후에, 능히 과단성 있게 3년의 상기를 실행한 사람은 다만 진(晉)나라 무제(武帝), 위(魏)나라 효문제(孝文帝), 주나라 고조(高祖)뿐이니, 얻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춘추(春秋)의 의리는 현자(賢者)에게 구비함을 요구하게 되니, 주(周)나라 고조가 3년의 제도를 마치게 한 것은 가장 현명한 행실이 되지마는, 그러나 공통된 상기(喪期)의 뜻을 미루어 밝힘이 오복(五服)의 안에서 그치게 되고 여러 신하들에게는 미치지 않않으니, 세상 사람을 가르쳐 군신(君臣)의 의리를 나타내게 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고조(高祖)가 배우지 못한 데다가, 좌우(左右)에서 옛일을 상고한 신하가 이를 보좌해 이루게 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영락(永樂) 5년 7월에 명(明)나라 왕후가 붕어(崩御)하니, 12월 20일에 태종 황제(太宗皇帝)께서 백의(白衣)·각대(角帶) 차림으로서 조회를 받고, 온 조정의 관원은 소의(素衣)를 입게 하고, 소연(素輦)을 타고 궐내(闕內)에 들어갔으며, 또 본조(本朝)033) 의 세자가 문화전(文華殿)에 나아가니, 중관(中官)이 영지(令旨)를 전하기를, ‘지금 최질(衰絰)을 입고 계시니 뵐 수 없다.’ 하였으며, 한부 전하(漢府殿下)가 밖에서 궐내로 들어가는데 그 최질의 제도가 《문공가례(文公家禮)》와 같았으며, 6년 정월 초1일에 황제께서 소복 차림으로써 조하(朝賀)를 받는데, 소연을 타고 궐내로 들어갔으며, 또 세자(世子)가 황후의 빈전(殯殿)에 제사하는데, 참최(斬衰)를 입은 사람 수십 명이 그 뒤에 서서 있었습니다.
신 등이 그윽이 보건대, 부모의 상기(喪期)는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귀천(貴賤)의 구분이 없이 똑같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도리로써 사사로운 뜻[私意]으로 그것을 단축시키거나 연장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나라 문제가 상기를 단축시킨 이후로 역대(歷代)에서 그대로 따라 하게 되니, 제왕이 마침내 3년의 상(喪)이 없어졌습니다. 삼강(三綱)이 밝지 못한 지가 1천여 년이나 되었는데, 중간에 현명한 군주가 혹은 천성(天性)으로써 바로잡아 이를 시행하게 되면, 여러 신하들은 아첨하고 옛것에 습관이 배여, 그 좋은 점을 능히 순종하지 못하게 되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우리 조정에 상례(喪禮)는 달을 바꾸는 제도[易月之制]를 쓰지 않으며, 아래로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능히 이를 시행하게 되니, 중국에서 매양 우리 나라를 예의의 나라라고 일컫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모든 제작(制作)하는 바가 옛날 것을 따르게 되니, 옛날의 습관을 일신(一新)하여 자손 만세(萬世)의 법을 만들어야 될 것이온데, 또한 상제(喪制)는 인도(人道)의 대절(大節)이니 더욱 구차한 짓을 그대로 따라 행하여 성인(聖人)의 제도를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특별히 성상께서 결단을 내리시어 위로는 동궁(東宮)으로부터 아래로는 백관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최복(衰服)으로써 기년(期年)을 마치고, 심상 삼년(心喪三年)034) 까지 하게 하여 상기(喪紀)를 바로잡고 풍화(風化)를 돈후(敦厚)하게 하시면 만세에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111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59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註 029]호씨(胡氏) : 송(宋) 나라 유학자 호안국(胡安國).
- [註 030]
최마(衰麻) : 최복(衰服).- [註 031]
점려(苫廬) : 거적자리의 여막(廬幕).- [註 032]
오복(五服) : 참최(斬衰)·자최(齊衰)·대공(大功)·소공(小功)·시마(緦麻)의 다섯 상복.- [註 033]
본조(本朝) : 조선.- [註 034]
심상 삼년(心喪三年) : 탈상(脫喪)한 뒤에도 마음속으로 슬퍼하여 상중에 있는 것처럼 3년 동안 근신하는 일.○集賢殿直提學金汶等上書曰:
漢 文崩, 已下棺, 服大功十五日, 小功十四日, 纖七日。 胡氏論曰: "孝文溺於小仁, 短喪廢禮, 信有罪矣。 三年之喪, 所以盡生者之孝心, 又非父之所得令者也。 遺詔所論者, 謂吏民耳, 太子嗣君, 豈吏民歟? 而景帝冒用此文, 乃自斷三年之喪, 薄于君親, 其罪益大矣。" 周主邕詔曰: "三年之喪, 達於天子, 但軍國務重, 須自聽朝。 衰麻之節、苫廬之禮, 率遵玆典, 以申罔極。 百僚宜依遺令, 旣葬而除, 卒申三年之制。 五服之內, 亦令依禮。" 胡氏論曰: "自漢 文短喪之後, 能斷然行三年者, 惟晋 武 帝、魏 孝文、周高祖, 可謂難得矣。 然《春秋》之義, 責備賢者。 周 高祖卒, 三年之制, 最爲賢行。 然推明通喪止於五服之內, 不及群臣, 非所以敎天下著君臣之義也, 由高祖不學, 左右無稽古之臣以輔成之也。 且永樂五年七日, 大明皇后崩, 十二月二十日, 太宗皇帝以白衣角帶受朝, 擧朝素衣乘素輦入內。 又本朝世子詣文華殿, 中官傳令旨曰: "今在衰絰, 不能見。" 漢府殿下自外入內, 其衰絰之制, 同《文公家禮》。 六年正月初一日, 帝以素服受朝賀, 乘素輦入內。 又世子祭皇后殯殿, 服斬衰者數十人立其後。 臣等竊謂父母之喪, 自天子達于庶人, 無貴賤一也。 天經地義, 不容私意有所短長。 自漢 文短喪, 歷代因之, 帝王遂無三年之喪, 三(網)〔綱〕 不明, 千有餘年間, 有賢主或以天性矯而行之, 群臣諂諛, 習常玩古, 不能將順其美, 甚可惜也。 我朝喪禮, 不用易月之制, 下至庶人, 皆能行之。 中國每稱禮義之邦, 靡不以此, 況今凡所制作, 動遵古昔, 一新舊習, 以爲子孫萬世之法? 又況喪制, 人道之大節, 尤不可仍循苟且, 不遵聖人之制。 伏望特垂睿斷, 上自東宮, 下至百寮, 皆令以衰服終期年, 申心喪三年, 以正喪紀, 以敦風化, 萬世幸甚。
- 【태백산사고본】 35책 111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59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註 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