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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111권, 세종 28년 3월 25일 임진 1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소렴하다. 전을 차리다

소렴(小斂)하였다.

내시(內侍)가 소렴상(小斂牀)을 서계(西階)의 서쪽에 진설(陳設)하고, 지의(地衣)와 욕석(褥席)을 펴고 먼저 염매[絞]의 횡포(橫布) 세 개를 아래에 펴서 온 몸을 서로 잡아매는 데에 대비하고, 다음에 종포(縱布) 한 개를 그 위에 펴서 머리과 발을 가리는 데에 대비하며, 염매[絞]는 백세저포(白細苧布)를 사용하여 그 양쪽 끝을 쪼개고, 다음은 포금(布衾)인데, 금(衾)은 겹을 사용하고, 다음은 포의(布衣)인데, 혹은 뒤집어 놓기고 하고, 혹은 거꾸로 놓기도 하나, 다만 방정(方正)을 취(取)하고, 상의(上衣)만은 거꾸로 놓지 않는다. 합계 19칭(稱)이다. 이를 들고 서계로 올라가니, 나인이 전해 들어서[傳擧]서 시체의 남쪽에 둔다. 이에 석전(夕奠)을 옮기고, 나인(內人)이 손을 씻고 함께 시체를 들어 소렴상에 옮긴다. 먼저 베개[枕]를 버리고, 그 첩의(疊衣)를 펴서 그 머리를 깔게 하고는, 이내 양쪽 끝을 말아서 양쪽 어깨의 빈 곳에 채우고, 또 옷을 말아 양쪽 정강이에 끼워서 그 방정을 취(取)한 뒤에, 남은 옷으로 시체를 덮고, 오른쪽 옷섶을 왼쪽 옷섶의 위로 여미되, 옷고름을 매지는 않으며, 금으로써 싸고 염매[絞]로 잡아매지 않으며, 그 얼굴을 가리지 않고 따로 금으로써 덮다. 왕세자가 서향(西向)하여 시체에 기대어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며, 대군(大君) 이하는 왕세자의 뒤에서 서향하여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며, 공주(公主) 이하는 동향(東向)하여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왕세자는 별실(別室)로 물러나와서 삼[麻]으로 머리[髮]을 묶고, 대군 이하도 또한 물러나와서 삼으로 머리를 묶으며, 공주 이하는 별실에서 북상투[髽]를 쫓는다. 내시가 시상(尸牀)을 전중(殿中)으로 도로 옮기고, 빙반(氷盤)을 시상 밑에 놓고서야 전(奠)을 차린다. 【유사(攸司)가 찬(饌)을 올리매, 상식(尙食)이 그 소속을 거느리고 이를 전해 받들어 영좌(靈座) 앞에 드리고, 향로·향합과 초[燭]를 설치한다. 또 준(尊)을 지게문 밖의 왼쪽에 설치하고, 잔(盞) 세개를 준소(尊所)에 둔다. 왕세자가 들어와 자리에 나아가 부복하고 곡하기를 슬프게 하고, 대군(大君)·제군(諸君)과 공주 이하가 모두 들어와서 자리에 나아가 곡하기를 슬프게 한다. 상식이 향안(香案) 앞에 나아가서 상향(上香)하고, 또 술 석 잔을 따라서 연달아 안(案) 위에 드린다. 】


  • 【태백산사고본】 35책 111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59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壬辰/小斂:

    內侍陳小斂牀於西階之西, 施地衣褥席。 先布絞之橫者三於下, 以備周身相結; 次布縮者一於其上, 以備掩首及足。 絞用白細苧布, 析其兩端。 次布衾, 衾用複。 次布衣, 或顚或倒, 但取方正, 唯上衣不倒, 摠十九稱。 擧之, 昇自西階, 內人傳擧, 置于尸南乃遷。 夕奠, 內人盥手, 共擧尸遷于小斂牀, 先去枕而舒其疊衣, 以藉其首, 仍捲兩端, 以補兩肩空處。 又捲衣挾其兩脛, 取其方正, 然後以餘衣掩尸, 左衽不紐, 裹之以衾而未結以絞, 未掩其面, 別覆以衾。 王世子西向, 憑尸哭擗。 大君以下在王世子之後, 西向哭擗, 公主以下東向, 亦如之。 王世子退于別室, 以麻括髮, 大君以下亦退括髮, 公主以下髽于別室。 內侍還遷尸牀于殿中, 設氷盤于牀下, 乃設奠。 【攸司進饌, 尙食帥其屬, 傳奉奠于靈座前, 設香爐香合竝燭。 又設尊於戶外之左, 置盞三於尊所。 王世子入就位, 俯伏哭盡哀。 大君諸君及公主以下俱入就位, 哭盡哀。 尙食詣香案前上香, 又酌酒三盞, 連奠于案。】


    • 【태백산사고본】 35책 111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59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