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의 성균관·집현전의 녹관 겸임을 지적하는 성균 사성 김구의 상서문
성균 사성(成均司成) 김구(金鉤)가 상서하기를,
"삼가 보옵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성경(聖敬)의 날로 향상하는 덕(德)으로 써 계속 밝고 정일(精一)한 공부를 다하셔서, 한 생각이 시종(始終)하도록 항상 학문에 있사오니, 그 위에서 몸소 실행하여 아래에서 눈으로 보고 감동하게 한 것이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종실(宗室)의 자제(子弟)들이 부귀(富貴)한 집에서 생장하여 학문에 게을리 할까 염려하시어, 종학(宗學)을 창립(創立)하여 대군(大君) 이하로 종척(宗戚)의 자제들에 이르기까지 입학(入學)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 하시니, 비록 삼대(三代)005) 의 성세(盛世)일지라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습니다. 그 처음 세울 초기에 있어서는 김돈(金墩) 같은 이가 경연(經筵)에 시강(侍講)하는 관직으로써 맨 먼저 박사(博士)가 되고, 무릇 그의 동료(同僚) 하관(下官)들은 모두 성균관(成均館)과 집현전(集賢殿)의 녹관(祿官)으로 겸임(兼任)하게 되니, 그 인선(人選)에 참예하게 된 사람은 사람들이 우러러보기를 신선(神仙)에 오른 것 같았습니다. 사도(師道)의 존엄한 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알 수가 있었으니, 몇 해가 되지 않았는데도 입학한 종친(宗親)들이 거의 40여 명에 이르게 되므로, 4, 5명의 교관(敎官)으로서는 그 직무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그 인원을 증가시키게 되어, 이에 혹은 군직(軍職)으로써 겸임하게 되니, 이에 박사의 관직이 전보다 조금 달라졌습니다. 임술년에 성상(聖上)께서 그 폐단을 깊이 아시고서 성랑(省郞)006) 2원(員)과 다른 동반(東班)의 현관(顯官)으로써 겸임시켜, 그 제도를 아주 새롭게 하여 문풍(文風)을 진기(振起)시켰으니, 대개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학(道學)을 존중하는 성대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몇 달이 되지 아니하여 변경시켜 그전대로 하는 폐단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니, 비록 본디는 종학을 위하여 설립하였으나, 성균(成均)의 녹관도 또한 다른 임무를 임명하여, 무릇 부사직(副司直)을 겸무하면서 교관을 겸임한 사람이 6인이 되었습니다. 신(臣)이 가만히 보옵건대, 군직을 띠고 채찍끝[鞭末]을 잡고서 여러 군(君)들을 수종(隨從)하는 사람이 혹시 있게 되므로, 명칭을 사표(師表)하 하여 성경(聖經)을 강설(講說)하고 스승이 좌석에 앉아 있으며, 이에 추종(騶從)하는 하례(下隷)들과 더불어 관직을 같게 하니, 신은 이것이 아마 관직을 설치한 본의(本意)가 아닌 듯합니다.
대저 사람의 귀하고 천한 것은 비록 재주와 행실이라고 하지마는, 실상은 작위(爵位) 때문인데, 작위가 높지 않으면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러보지 않으니, 사람들이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능히 겸손한 마음으로 학문을 받겠습니까. 《예기(禮記)》에 ‘무릇 학문하는 방법은 스승을 높임이 어려우니, 스승이 높아지면 도(道)가 높아지고, 도가 높아지면 사람들이 학문을 존경하므로, 《대학(大學)》의 예절에는, 비록 천자(天子)에게 가르치더라도 북면(北面)을 하는 사람이 없다. ’고 한 것은 대개 이를 이른것입니다. 근년 이후로는 무릇 박사가 된 사람은 벌열(閥閱)에 관련이 있으면 이를 하기를 즐겨 하지 않으며, 비록 혹시 하더라도 몇 달이 되지 않아서 옮기게 되고, 조금 경학(經學)을 아는 사람도 한번 군직에 임명되면, 비록 3, 4년이 지나더라도 감히 혹 옮기지 못하게 되니, 진실로 가르치는 노고가 본래 인정(人情)의 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데, 또 군직으로써 섞어 놓아 당세(當世)의 경멸하는 바가 된 까닭입니다. 이로 말미아아 후진(後進)의 무리들은 다투어 서로 좋지 못한 일을 흉내내어, 경사(經史)를 널리 읽고 사장(詞章)만 전적으로 힘쓰는 사람은 후일의 대성(臺省) 낭관(郞官)이 될 사람이니 쓸 만한 선비라 하며, 만일 경학(經學)에 전심하고 의리(義理)에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말하기를, ‘전일의 박사로서 교수(敎授)하던 사람이라.’ 하니, 아아, 하지 않으면 그만두더라도, 어찌 대체(大體)에 밝으면서도 세상의 쓰임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심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작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성려(聖慮)에서 결단하시어 무릇 교관이 된 사람은, 그 반은 모두 성균관의 실직(實職)으로, 그 반은 혹은 집현전의 녹관으로써 관품(官品)에 따라 충원 임명하여, 이를 성법(成法)으로 정하고, 만약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헌사(憲司)에서 규찰하여 죄를 다스리게 한다면, 다만 제자(弟子)된 사람만이 그 학업을 공손히 받을 뿐만 아니라, 박사된 사람도 그 직책을 다하기를 생각할 것이니, 후진의 선비들도 또한 모두 본받게 되어, 성상의 유교를 숭상하고 도학을 존중하는 덕이 비록 오래 되더라도 쇄퇴(衰頹)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집현전의 설치는 본래 경연을 위한 것이므로, 다른 직무로써 이를 겸임시킬 수가 없다고 하지마는, 신은 망령되이 생각하옵기를, 육경(六經)을 강론(講論)하여 명칭을 왕자(王子)의 사부(師傅) 하면서 집현전의 관직으로써 종학에 나누어 가르치게 한다면, 어찌 옳지 아니함이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하옵건대, 지난날에 교지를 내리기를, ‘무릇 왕자를 길에서 만나면 3품 이하의 관원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두 손을 마주잡고 서게 하나, 사부에게는 이러한 예(例)를 적용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성상께서 사유(師儒)을 존경하는 덕이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박사의 직책은 점점 이 지경이 이르게 되니, 신이 이로써 성상의 본심이 아닌 것을 알겠습니다. 신은 훈고(訓詁)의 천박한 학문[末學]으로써 처음으로 사예(司藝)에 임명되어 외람히 사석(師席)에 있은 지가 10여 년이 되었는데, 요즈음 또 특별히 성상의 은혜를 입어 개월(箇月)이 차기 전에 3품으로 발탁 임명되었으므로, 분수를 헤아리매 정도를 넘었으니 다시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박사의 관직이 처음과 끝이 점차 달라져서, 경학에 부지런하여 박사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이로 말마암아 적게 되는 까닭으로, 감히 어리석은 심정을 진술하오니, 삼가 성성의 재가를 바라옵니다."
하니, 이조에 내려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111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49면
- 【분류】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왕실-종친(宗親) / 인사(人事)
○壬午/成均司成金鉤上書曰:
伏覩主上殿下以聖敬日躋之德, 盡緝熙精一之功, 一念終始, 常在於學, 其所以躬行於上而使之觀感於下者, 可謂至矣。 猶慮宗室子(第)〔弟〕 生長富貴, 怠於學問, 創立宗學, 自大君以下至于宗戚子弟, 莫不入學, 雖三代之盛, 蔑以加矣。 當其始立之初, 有若金墩以侍講經筵之官, 首爲博士, 凡其僚下, 皆以成均集賢祿官兼差, 得與其選者, 人望之如登仙, 師道之尊, 不言可知。 不數年而入學宗親, 幾至四十有餘, 四五敎官, 難堪其職, 增多其員, 乃或以軍職兼差。 於是, 博士之官, 少異於前矣。 歲在壬戌, 聖上深知其弊, 以省郞二員及他東班顯官兼差, 一新其制, 振起文風, 蓋崇儒重道之盛心也。 然不數月而變, 因仍之漸, 至於今日, 雖本爲宗學而設立成均錄官, 亦授他務, 凡以攝副司直而兼敎官者六人。 臣竊觀帶軍職執鞭末而隨從諸君者, 容或有之, 名爲師表, 講說聖經, 坐於皐比, 而乃與騶從之隷同官, 臣恐非設官之本意。 大抵人之貴賊, 雖曰才行, 實由爵位。 爵位不尊, 則人不敬慕, 人無敬心, 則其能遜志受學乎? 《記》曰: "凡學之道, 嚴師爲難。 師嚴則道尊, 道尊則人敬。 學大學之禮, 雖詔於天子, 無北面者。" 蓋謂此也。 近年以來, 凡爲博士者, 支連閥閱, 則莫肯爲之, 雖或爲之, 不數月而遷。 稍知經學者, 一授軍職, 則雖過三四載, 莫敢或遷, 誠以訓(誥)〔詁〕 之勞, 本非人情之所欲, 又雜以軍職而爲當世之所輕故也。 由是後進之輩, 爭相効尤, 涉獵經史, 專務詞章者, 則以爲他日臺省郞官可用之士也; 一有專心經學, 沈潛義理者, 則乃曰異日博士敎授之人也。 嗟夫! 不爲則已, 豈有明體而不堪適用哉? 然使人心至於如此, 非細故也。 伏惟聖上斷自聖慮, 凡爲敎官者, 其半皆以成均實職, 其半或以集賢錄官, 隨品充差, 定爲成法, 如有違者, 憲司糾理, 則非徒爲弟子者敬受其業, 爲博士者思盡其職, 後進之士, 亦皆則効, 而聖上崇儒重道之德, 雖久而不替矣。 或以集賢之設, 本爲經筵, 不可以他務兼之也。 臣妄謂講論六經, 名爲王子之師傅, 而以集賢之官, 分敎於宗學, 何有不可? 臣伏思向日敎下: "凡遇王子於道路, 三品以下, 皆下馬拱立, 至於師傅, 不在此例。" 聖上尊尙師儒之德, 至於此極, 而博士之職, 漸至於此, 臣以此知非聖上之本心也。 臣以訓詁末學, 始授司藝, 濫居師席, 十有餘年, 近又特蒙上恩, 未滿箇月, 擢拜三品, 揆分踰涯, 復有何望? 但以博士之官, 終始漸異。 勤於經學, 願爲博士者, 由是而少, 故敢陳愚衷, 伏惟聖裁。
下吏曹議之。
- 【태백산사고본】 35책 111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49면
- 【분류】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왕실-종친(宗親)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