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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06권, 세종 26년 11월 16일 신묘 2번째기사 1444년 명 정통(正統) 9년

집현전에 명하여 장차 중궁의 모친이 죽었을 때 중궁의 상례에 대해 의논하게 하다

임금이 진양 대군(晉陽大君) 이유(李瑈)에게 명하여 집현전에 전지하기를,

"중궁(中宮)의 아버지가 죄를 받아 죽었는데, 처자(妻子)는 관노비(官奴婢)가 되고, 태종(太宗)께서 의를 끊어 친척으로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 중궁으로 하여금 상례를 행하지 못하게 하셨다가, 뒤에 태종의 유언(遺言)으로써 그 어머니를 천안(賤案)에서 삭제하여, 설날이 되면 중궁이 혹 그 집에 거둥하여 헌수(獻壽)도 하고, 혹 궁중에 맞아 들여 모자간의 예절을 행하기도 하였는데, 지금 그 모친의 병이 위독하니, 만약 상사가 난다면 중궁이 상례를 어떻게 행할 것인가. 고전(古典)에 상고하여 의논해서 올리라."

하니, 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 직전(直殿) 김문(金汶)·이계전(李季甸),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노숙동(盧叔仝) 등이 의논하기를,

"신들이 삼가 상고하오니 한(漢)나라 상관 걸(上官桀)·상관 안(上官安)의 종족이 멸망당할 때에 황후(皇后)는 나이 적어 공모에 참여하지 아니했으므로 폐위되지 않았는데, 황후의 모친이 죽으매 무릉(茂陵)의 동곽(東郭)에 장사하고, 그 원읍(園邑)에 2백 집을 두어 장승(長丞)으로 받들어 지키게 하고, 황후가 자기 사사 종들을 시켜서 의 무덤을 수호하게 하였습니다. 그윽이 생각하오니, 부인이 남편의 집에 시집가면 그 친정 어버이를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오며, 더구나, 지금 지존(至尊)께서는 이미 의리로써 사은(私恩)을 끊어서 예절을 차릴 수 없사온데, 중궁은 지존과 한몸으로서 종묘(宗廟)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면서 어떻게 혼자서 그 모친의 상례를 행하겠습니까. 전일(前日)에 태종께서 하신 처치는 권변(權變)으로서 중용에 맞는 것이니,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전(致奠)하는 일 같은 것은 한(漢)나라 상관 황후(上官皇后)의 사사 종들로 뫼를 지키게 한 고사(故事)에 의하여 사사로 그 정례(情禮)를 표하게 되면 거의 사은(私恩)과 공의(公義)가 함께 맞아서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기년상(期年喪)은 대부(大夫)에까지 이른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상복(喪服)은 기년(期年) 이하는 제후(諸侯)에서 끊고 대부(大夫)에서 강등(降等)한다.’ 하였고, 《의례(儀禮)》상복도(喪服圖)에는 ‘방계(傍系)의 기복(期服)은 끊는다.’ 하였고, 《두씨통전(杜氏通典)》에는 ‘동진(東晉)왕삭지(王朔之)가 묻기를, 「지존(至尊)이 왕후의 부친에 복(服)이 있는가.」하니, 범영(范寗)이 대답하기를, 「왕이 천하(天下)에 대한 것과 제후가 나라 안에 대한 것이 그 뜻이 다를 것이 없다.」하였는데, 지금도 그 말을 대개 준용할 만하다.’ 하였고, 또 ‘효무 황제(孝武皇帝) 태원(太元) 원년(元年)에 왕 진군(王鎭軍)이 죽으니 복제(服制)를 3일로 하였다.’ 하였고, 또 《개원례(開元禮)》에는 황후가 친부모가 죽으면 거애(擧哀)하고 시마 3월(緦麻三月)의 복(服)으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윽이 《중용(中庸)》《의례(儀禮)》에 있는 것으로 상고하건대, 황후 부모의 상례에 대하여 삼대(三代)153) 이전에는 필시 그에 관한 제도가 없었고, 진(晉)나라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3일복(三日服)의 의논이 있었고, 또 당나라 때에 거애(擧哀)와 시마(緦麻)의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통전(通典)》에 의하면 공족(公族)의 죄악에 복을 끊는다는 의논이 있고, 한나라 상관 황후는 사사 종들로 하여금 걸(桀)안(安)의 무덤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것은 아무리 지친이라도 죄악이 있어서 의리가 끊어졌으므로 정례(情禮)를 펴지 못한 것입니다. 지난 날 초상 때에 이미 종사(宗社)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끊어서 친척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그 정례(情禮)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중궁께서 평일에 모친을 만나 본 것은 일시적 사사 은정이매, 의리에 해될 것이 없겠으나, 복제와 장례에 있어서는 일이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것이니 앞과 뒤를 달리 했다 같게 했다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왕세자가 우의정 신개(申槪)·좌찬성 하연(河演)·도승지 이승손(李承孫)·집현전 직제학 신석조(辛碩祖)·직집현전 김문(金汶)·이계전(李季甸)·응교 노숙동(盧叔仝)·수찬 양성지(梁誠之) 등을 불러 보고 임금의 분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심 정승(沈政丞)154) 이 죄를 받은 뒤에 그의 친족은 다 노비에 몰입(沒入)하고, 그 집을 몰수하였더니, 그 뒤에 대신들이 그 집과 재물을 돌려주기를 청하므로 태종께서 허락하셨고, 또 태종께서 내리신 유교(遺敎)가 있어서, 병진년에 가뭄으로 인하여 심씨의 관비(官婢)된 문서를 삭제해 주자고 말하는 이가 있기에 허락하였으니, 그 죄는 이미 완전히 씻어졌다. 지금 만약 외고집으로 법에 얽매여서 상례(喪禮)를 행하지 못하면 너무 박하지 아니한가. 그러니 중궁의 상례 행할 제도를 의논하여 올리라."

하니, 신개 등이 아뢰기를,

"죄를 받은 뒤에 태종의 유교를 받들어 이미 그 죄를 용서하고 천적(賤籍)까지 삭제하였으며, 또 부인(夫人)의 직첩(職牒)까지 받아서 대궐에도 출입하였으니, 신들은 중궁중께서 행상(行喪)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옵니다."

하고, 이승손김문 등의 의논은 전(前)과 같았다. 노숙동이 다시 아뢰기를,

"그 죄가 비록 씻어졌다 해도 선왕께서 이미 끊으셨으니, 중궁은 지존(至尊)과 일체(一體)로서 종묘를 모시고 제사로 받드시는 터이어늘, 지존께서 그 정례(情禮)를 다하지 못하시는데 중궁께서 어떻게 행할 수 있사오리까."

하였다. 세자가 이런 말을 가지고 위에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숙동 등이 강상(綱常)으로써 말하는 것은 이치가 있을 듯하나, 그러나, 그것은 변통성 있는 의리를 생각지 아니한 것이 아닌가. 중궁이 상례를 행하는 것이 바로 정리(情理)에 합치되는 것이다. 대저 어미가 아비에게 쫓겨나면 마땅히 복(服)을 강등(降等)함은 예로부터 제도가 있는 것이니, 대부인(大夫人)이 비록 용서를 받지 못하고 천안(賤案)에서 삭제되지 못했다 할지라고, 중궁이 그 어버이가 아니라고 끊을 수 있겠는가. 그리 할 수가 없는 것이니 상례를 행하는 것이 옳겠다. 다시 의논해 보라."

하니, 신개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옵니다."

하고, 이승손·김문 등은 아뢰기를,

"아비에게 쫓겨난 것과 임금에게 죄를 얻은 것이 그 사이에 차이가 있사오나, 그러나, 천안에서 삭제되지 못하였으면 평인(平人)이라면 오히려 상례를 행할 수 있겠으나, 중궁은 지존의 배필이시니 지존과 한몸이온데, 대부인이 태종께 득죄하였은즉 아비에 쫓겨난 어미와 다를 것이 없사오니, 상례를 행함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세자가 다시 그대로 위에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장(國葬)이나 거애(擧哀)나 조상(弔喪) 같은 행사들은 나로서 하지 않겠으나, 중궁은 마땅히 복을 입어야 할 것이다."

하고, 집현전에 명하여 황후로서 상례(喪禮) 행하는 옛 제도를 상고하여 올리게 하고, 이어서 의정부에 명하여 다시 의논하여 올리게 하니, 영의정 황희가 의논하기를,

"이미 죄를 용서하였으니 왕비는 의리상 상례를 행하여야 하며, 국장으로 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나이다."

하고, 하연(河演)·황보인(皇甫仁)·권제(權踶)·이숙치(李叔畤) 등이 의논하기를,

"상례를 행하는 것이 옳으며, 국장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106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책 594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

  • [註 153]
    삼대(三代) : 하(夏)나라·은(殷) 나라·주(周) 나라.
  • [註 154]
    심 정승(沈政丞) : 중궁의 부친 심온(沈溫).

○上命晋陽大君 , 傳旨集賢殿曰:

中宮之父以罪伏誅, 妻子役爲官奴婢, 太宗絶不爲親, 使中宮不得行喪。 後以太宗遺敎, 削其母賤案, 歲時, 中宮或幸其第獻壽, 或迎入宮中, 行母子之禮。 今其母病劇, 脫有大故, 中宮行喪何如? 其稽古典, 擬議以聞。

直提學辛碩祖、直殿金汶李季甸、應敎鄭昌孫盧叔仝等議曰: "臣等謹按 上官桀, 宗族旣滅, 皇后以年少不與謀, 得不廢。 皇后母死, 葬茂陵東郭, 置園邑二百家長丞奉守, 皇后自使私奴婢守塚。 竊謂婦人內夫家, 則不得顧其私親, 況今至尊, 旣以義斷恩, 不得爲禮。 中宮與至尊一體, 承宗廟奉祭祀, 豈可獨行其喪禮哉? 前日太宗處置, 變而得中, 不可易也。 若其致奠等事, 乞依上官皇后自使奴婢守塚故事, 私展其禮, 庶乎私恩公義, 兩全而無憾矣。 《中庸》曰: ‘期之喪, 達于大夫。’ 註: ‘喪服, 自期以下, 諸侯絶, 大夫降。’ 《儀禮喪》 《服圖》: ‘諸侯絶旁期。’ 杜氏 《通典》: ‘東晋王朔之問: 「至尊爲后之父, 有服否?」 范寗答曰: 「王者之於天下, 諸侯之於一國, 義無以異。 今謂粗可依準孝武 泰元元年鎭軍薨, 服制三日。」’ 《開元禮》: ‘爲皇后父母擧哀, 制緦麻三月之服。’ 竊以《中庸》《儀禮》考之, 后父母之喪, 三代以上, 必無其制, 至始有服三日之議。 又有擧哀緦麻之制, 然《通典》, 有公族罪惡絶服之議。 上官皇后使私奴婢守塚。 是則雖至親, 苟有罪惡, 義已絶矣, 不得伸其情。 前日之喪, 旣以得罪宗社, 絶不爲親, 不得盡其情禮, 若中宮平日覲省, 一時私恩, 固無害義, 至於服制禮葬, 事關大體, 不宜前後異同。" 王世子引見右議政申槪、左贊成河演、都承旨李承孫、集賢殿直提學辛碩祖、直集賢殿金汶李季甸、應敎盧叔仝、修撰梁誠之, 傳(有)〔旨〕 若曰:

政丞受罪後, 其親屬, 皆沒爲奴婢, 又籍其家。 厥後大臣請還給家財, 太宗從之, 且太宗遺敎在焉。 至丙辰, 因旱有言削沈氏賤案者, 予乃從之, 其罪已蕩滌矣。 今若一拘於法, 不得行喪, 則無乃薄乎? 其中宮行喪之制, 擬議以聞。

等曰: "受罪後承太宗遺敎, 已赦其罪。 且削賤籍, 又受夫人爵牒, 出入禁闥。 臣等謂中宮行喪爲便。" 承孫等議如前。 叔仝更啓曰: "其罪雖云蕩滌, 祖宗已絶之。 中宮與至尊一體, 承宗廟奉祭祀, 至尊不得盡其禮, 則中宮安可行之哉?" 世子將是言以啓, 上曰: "叔仝等以綱常言之, 似有理, 然無乃不稽變通之義乎? 中宮行喪, 正合情理。 大抵母見黜於父, 則當降服, 古有其制。 大夫人雖不蒙赦, 賤案未削, 中宮其可絶不爲親乎? 是不可爲也, 行喪可矣, 其更議。" 等曰: "上敎允當。" 承孫等曰: "見黜於父與得罪於君, 固有間矣。 然賤案未削, 則平人猶可行喪也。 中宮配至尊, 與至尊一體, 而大夫人得罪於太宗, 則無異見黜於父之母也, 行喪不可。" 世子更啓, 上曰: "若國葬及擧哀弔喪等事, 予不爲也, 中宮則當服矣。" 命集賢殿, 考皇后行喪古制以啓, 仍命議政府, 更議以聞。 領議政黃喜議: "已赦其罪矣, 王妃義當行喪, 國葬亦無不可。" 河演皇甫仁權踶李叔畤等議: "行喪可也, 國葬不可。"


  • 【태백산사고본】 34책 106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책 594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