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 성균 주부 이보흠이 올린 성을 쌓는 방책에 대한 상소
겸 성균 주부(兼成均注簿) 이보흠(李甫欽)이 상소하기를,
"험한 것을 베풀어서 백성을 보존하는 것은 국가의 급선무입니다. 방금 성상의 덕이 먼 데까지 입게 하시니, 이적(夷狄)이 손[賓]으로 복종하고, 국가가 한가하고 안팎에 일이 없사온데, 성을 쌓는 역사를 해마다 거행하지 않는 때가 없으니, 참으로 방비가 있게 하여 근심이 없는 도(道)를 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듣자오니 근년에 쌓은 여러 성이 대개는 모두 퇴비(頹圮)되었다 하옵는데, 신이 반복하여 이를 생각하여도 이민(吏民)이 용심(用心)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오년에 성을 쌓는 새 도본(圖本)을 반강(頒降)한 이래로 관리가 입법한 뜻을 알지 못하고 법을 지키는 폐단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그 성을 쌓는 법이 내면(內面)에 돌 16척을 메우고 위에는 계단을 만들되, 박석(薄石)으로 펴게 한 것은 대개 진흙으로만 오로지 쌓으면 쉽게 무너질 것을 염려한 것이요, 처음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옵는데, 신이 일찍이 경상(慶尙) 일도의 여러 성을 지나보오니, 대저 성을 쌓는 땅과 돌을 운반하는 곳이 멀면 거의 30리, 가까우면 10여 리가 되어 백성 수십 명을 사역시키어도 하루에 운반하는 것이 한두 개의 돌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돌성[石城] 1척(尺)을 쌓는데 사람을 6, 7명까지 써도 1, 2년에 축조를 끝내는 일이 없고, 비록 혹시 끝냈더라도 1년만 넘으면 무너지지 않는 것이 없으니 만민이 이 때문에 살 곳을 잃고, 관리가 이 때문에 죄를 얻게 되니, 그 폐단의 한 가지이요, 쌓아서 계단을 만들고 박석(薄石)을 깔면 만일 적을 막을 경우 사람이 쉽게 오르내리며 수비할 수가 없으니 그 폐단의 두 가지이며, 도적이 틈을 타서 한 두개의 돌을 공격하면 내면의 잡석(雜石)은 형세가 저절로 무너져서 도리어 적을 이롭게 하는 바탕이 되니 그 폐단의 세 가지요, 그 위에 덮은 흙이 없기 때문에 한 번만 비가 오면 물이 성기(城基)에 스며들어 곧 무너지게 되니 그 폐단의 네 가지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내면에 돌을 메워 반드시 넓이를 16척이나 하여, 백성의 힘을 거듭 곤하게 한 뒤에야 성을 견고하게 함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외면의 6, 7척은 오로지 큰 돌을 써서 쌓고, 내면의 7, 8척은 섞어서 흙으로 단단하게 쌓되, 다 쌓은 뒤에는 흙 2척을 덮게 하고 그 위에 떼를 입히되, 안으로 향해 경사하게 하여 물이 쉽게 빠지게 하기를 도성(都城)의 제도와 같이 하면, 사람이 오르고 내리기에 편리하여 적을 제어하는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을 쌓을 때를 당하여서는 호지(濠池)의 흙을 파서 성의 내면을 메우면서 쌓으면 반드시 다시 참호(塹濠)를 파는 데에 백성의 힘을 쓰지 않아도 성이 이루어질 때쯤 되면, 호지도 또한 깊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전일에 한 성을 쌓는 공력을 가지고 두세 성을 쌓을 수가 있으니,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 한두 가지로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대저 비가 흙에 들어가는 것이 한두 자[尺]에 불과하니, 돌성 위에 흙 2, 3척을 쌓아서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비록 백년을 지나더라도 반드시 무너지게 될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이를 아는 것은 신의 억측으로 헤아린 것이 아닙니다. 신이 일찍이 군위현(軍威縣)을 지킬 때에, 군위현에 있는 예전에 쌓은 영일성(迎日城) 37척은 경술년부터 무오년까지 무릇 아홉 해나 되었으되,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는데, 성 쌓는 도본을 반강(頒降)한 이후로는 내면에 돌을 메우지 않았다하여 사토(莎土)를 버리고 박석(薄石)을 깔았는데도 하루아침의 비에 갑자기 무너졌으니, 이것은 신이 친히 본 것입니다. 입법하기 전에 쌓은 여러 성은 힘을 쓰기는 적게 하였으나 완고하고, 입법한 이후에는 힘을 쓰기는 배나 많이 하였으나 도리어 쉽게 무너지니, 입법한 본의를 알지 못하옵고 법을 쓴 폐단이 이렇게 심합니다. 대개 백성을 사역시키는 것은 나라의 중한 일인데, 배나 민력을 쓰고도 도리어 소용이 없게 되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본의이겠습니까. 신이 이에 골몰한 지가 오랜 세월이 되어 감히 억견으로 우러러 천위(天威)를 번독(煩瀆)합니다."
하니, 병조에 내려 정부와 함께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102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책 521면
- 【분류】군사-관방(關防)
○兼成均注簿李甫欽上疏曰:
設險保民, 有國之急務也。 方今聖德遠被, 夷狄賓服, 國家閑暇, 內外無虞, 而築城之役, 無歲不擧者, 誠以盡有備無患之道也。 然臣聞近年所築諸城, 率皆頹圮, 臣反復思之, 非特吏民之不用心也。 蓋自戊午年築城新圖頒降以後, 官吏不達立法之意而守法之弊使之然也。 其築城之法, 以爲內面塡石十六尺, 其上作爲階砌, 布以薄石者, 蓋慮其專築泥土, 則易至傾圮耳, 初非有異意也。 臣常歷觀慶尙一道諸城, 大抵築城之地, 運石之所, 遠則幾三十里, 近則十餘里, 役民數十名, 一日所運, 不過一二石而已。 是以石城一尺, 雖至用人六七名, 未有一二歲而畢築, 雖或畢築, 亦未有期月而未壞。 萬民以此而失所, 官吏以此而得罪, 其弊一也。 壘爲階砌, 布以薄石, 萬一禦敵之時, 人不得易以上下守備, 其弊二也。 寇則乘隙, 攻擊其一二石, 則內面雜石, 其勢自然頹圮, 反爲利敵之資, 其弊三也。 以其上無覆土, 故一有雨水, 則水潤城基, 隨卽圮壞, 其弊四也。 臣愚妄謂內面塡石, 不必須廣十六尺, 重困民力, 然後可堅其城也。 外面六七尺則專用大石而築之, 內面七八尺則雜以土堅築之。 築畢, 然後覆土二尺, 乃覆莎土於其上, 使之向內傾寫, 水易就下, 一如都城之制, 則人得便於上下, 而可以成制敵之功矣。 當其築之之時, 堀其濠池之土, 以塡城之內面, 隨堀隨築, 則不必更用民力於塹濠, 城垂成而池亦深矣。 然則以前日一城所築之功, 可以築二三城, 其爲利國便民, 不可以一二計也。 大抵雨之入土, 不過一二尺。 石城之上, 築土二三尺, 水不得入, 則雖經百年而必無頹圮之患。 臣所以知此者, 非臣之臆計也。 臣嘗守軍威縣, 軍威舊所築迎日城三十七尺, 自庚戌至戊午凡九年之間, 未嘗傾圮。 城圖頒降以後, 以爲內不塡石, 乃去莎土, 布以薄石, 一朝之雨, 遽卽頹圮, 是臣之親見也。 立法以前所築諸城, 用力少而完固, 立法以後, 用力倍多, 而反易頹落, 以其不達立法之本意, 而用法之弊至此極也。 夫役民, 國之重事也。 倍用民力, 而反爲無用, 此豈國家之本意哉? 臣之腐心於此, 爲日已久矣, 敢以臆見, 仰瀆天威。
下兵曹, 與政府同議以啓。
- 【태백산사고본】 33책 102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책 5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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