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 변효문이 돌아와 일본에서의 일을 치계하다
일본국(日本國)에 갔던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이 돌아와 경상도 옥포(玉浦)에 이르러 치계(馳啓)하기를,
"신 등이 처음에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니, 종정성(宗貞盛)이 하사한 물건을 받고 사배(四拜)를 행하여 사의를 표시하였고, 인하여 사람을 보내어 향도(鄕道)를 삼아 적간관(赤間關)의 대내(大內) 교홍(敎弘)이 있는 데로 출발시켰는데, 곧 적기포(赤崎浦)에 이르니 영후(迎候)하였습니다. 이튿날 사물(賜物)을 받는데, 사물(賜物)이 장차 이르매, 교홍(敎弘)이 뜰 아래에 서서 국궁하여 맞고, 당에 올라 꿇어앉아서 받되 고두(扣頭)하였으며, 인하여 신 등에게 의복을 주고 후하게 식물(食物)을 주었습니다. 신이 교홍에게 이르기를, ‘우리 전하께서 고 대내전(大內殿)의 성의를 추념(追念)하시어 우리들에게 명하여 전(奠)을 드리게 하였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중첩하여 후한 은혜를 받으니 감사한 것을 다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사신이 아직 국왕께 경례(慶禮)를 행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전례(奠禮)를 받으면 국왕이 나쁘게 여길까 두려우니, 청하건대, 회환할 때에 치전(致奠)하소서.’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홍이 신 등의 온 뜻을 경도(京都)에 치보(馳報)하고, 배 4척을 발하여 호송하게 하여 미로(尾路)에 이르니, 대관(代官)이 국왕의 교서가 없다 하여 호송하지 않았습니다.
신 등이 떠나 병고(兵庫)에 이르러 통사(通事) 윤인시(尹仁始)로 하여금 먼저 경도에 가서 보고하게 하니, 병고(兵庫) 수호관(守護官)이 와서 신 등에게 말하기를, ‘지금 사신의 성식(聲息)을 경도의 관령(管領)과 이세(伊勢)에게 보고하였는데, 모두 가부의 회답이 없고, 다만 그 출납자가 말하기를, 「대내(大內)의 보고도 아직 회답하지 않았으니, 제멋대로 올라옴은 옳지 않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국왕께서 연소(年少)하여 여러 대신이 권세를 제멋대로 부리며, 사신을 지대(支待)하려면 각각 비용이 드는데, 나라에만 예물이 있고 자기들에게는 이익이 없기 때문에, 말을 칭탁하여 거절하는 것이니, 만일 미로(尾路)에서 회보를 기다리면 반드시 오래 지체하게 될 것이다. 사신이 기다리지 않고 오는 것이 대단히 좋은 계책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세(伊勢)는 국왕의 자부(姊夫)인데다, 관령(管領)과 함께 국정(國政)을 잡고 있어, 왕의 하는 일을 모두 변경하니,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하여 나라 일이 날마다 그릇되어 간다.」고 하였다.’ 하였는데, 윤인시(尹仁始)가 돌아와 말하기를, ‘경도에 들어가서 태화수(太和守)를 보니, 태화수가 말하기를, 「왜 회보도 기다리지 않고 왔는가. 관령이 이미 대신과 의논하여 접하여 들이지 않기로 하였다.」 하기에, 인시가 대답하기를, 「적간관과 미로에서 비에 막히어 한 달이 넘었으나, 회보가 이르지 않으므로 왔다.」 하였더니, 태화수가 드디어 관령에게 의논하고 인시를 불러 말하기를, 「관령도 또한 이르기를, 기왕에 왔으니 거절할 수는 없다 했고, 왕에게도 고하여 좌무위(左武衛)로 하여금 구례(舊例)에 의하여 접대하게 하였다.」 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경도에 들어가 서계(書契)와 예물을 싸 가지고 관(關)에 이르니, 국왕이 전상(殿上)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서계를 받들고 영외(楹外)에 꿇어앉으니, 중 한 사람이 꿇어앉아 받고, 왕의 안상(案上)에 놓았습니다. 신 이하 정관(正官)은 영외(楹外)에 서고, 군관(軍官) 이하는 뜰에 서서 모두 사배를 행하고, 신이 이르기를, ‘두 나라가 바다를 격해 있으므로, 우리 전하께서 전하의 사위(嗣位)한 것을 들으시고 신 등을 보내어 하례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니, 영내(楹內)에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국왕이 연소하시니 천천히 계달하겠다. ’고 하므로, 신 등이 나오니, 여러 신하 수백 인이 뜰 가운데에 들어와 모두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군신들이 새 국왕이 처음으로 이웃나라와 통하는 것을 하례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상국사(相國寺)에 도착하여 먼저 국왕을 전내(殿內)에서 제사하였는데,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영정(影幀)을 걸어 놓았으며, 태화수가 말하기를, ‘제례(祭禮)는 귀국의 예(禮)대로 하는 것이 좋고, 국왕께서는 연소하시어 참예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 나라 풍속에는 본래 배례(拜禮)하는 절차가 없어, 관령(管領) 이하 대신이 앉아서 배제(陪祭)하고, 국왕의 모비(母妃)는 모두 남모르게 와서 보는 것이었습니다. 제사가 끝나매, 관령과 서로 모였었는데, 태화수가 말하기를, ‘국왕이 연소하여 관령이 실권을 가졌으니, 왕의 자리는 남향하게 하고, 사신은 동쪽에 있어야 하다.’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손은 동쪽에 있고 주인은 서쪽에 있는 것이 예(禮)다. ’고 하였더니, 태화수가 말하기를, ‘그러면 관령은 동쪽에 있고, 사신은 서쪽에 있는 것이 가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불가하다는 뜻을 보이니, 태화수가 말하기를, ‘지세(地勢)가 이와 같으니 바꿀 수 없다.’ 하므로, 신 등이 들어가니, 관령이 동쪽에 앉았으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이 태화수를 불러 말하기를, ‘관령은 어째서 일어나지 않는가.’ 하였더니, 곧 일어나서 서로 읍하고 자리에 앉게 하였습니다. 신이 태화수에게 이르기를, ‘빙문(聘問)은 고금의 통의(通義)이니, 이번에 회례사를 보내겠는가.’ 하니, 태화수가 말하기를, ‘예전에 그런 예가 없으니 보낼 수 없다.’ 하므로, 신 등이 자세히 예전의 전례(前例)를 말하였더니, 태화수(太和守)가 말하기를, ‘이미 대신과 의논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예전 전례에 회례사(回禮使)를 보낸 일이 없다.」 하였고, 청경사(請經使)만 보낸 일이 있으니, 앞으로 청경사를 보내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억지로 말하니, 관령과 태화수가 말하기를, ‘문적을 자세히 상고하여도 실로 예전 전례가 없고, 국왕이 연소하여 재결(裁決)을 하지 못하니, 우리들이 단독으로 국사를 오로지하여 전례가 없는 일을 우리로부터 시작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중 광엄(光嚴)·우춘(祐椿)으로 청경사와 부사(副使)를 삼았습니다.
신 등이 국왕의 서계와 예물을 받았는데, 국왕이 조금 뒤에 죽었습니다. 상제(喪制)를 물으니, 말하기를, ‘7일 동안 저자를 파한 뒤에, 좋은 날을 가리어 뼈를 태워 장사하고, 대신은 흰옷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고, 50일만에 복을 벗는다. ’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떠나 이요(伊要)에 이르니, 호송하는 자들이 떼로 모이어 떠들어대며 지팡이를 가지고 돌입하여 예물을 빼앗아 가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것은 너희 국왕과 관령의 예물인데, 너희들이 어찌 무례하기가 이와 같은가.’ 하여 두세 번 타일렀으나, 듣지 않고 떠드는 것이 더욱 심하기에, 부득이하여 돈을 주었더니 그치었습니다. 적간관에 이르니 광엄이 뒤쫓아 와서 말하기를, ‘우선 국왕의 동모제(同母弟)가 즉위하였는데, 지금의 나이는 9세’라 하였습니다. 산구(山口)에 이르러 고 대내전(大內殿)에게 제사하였는데, 작(爵)과 폐(幣)를 모두 서서 드렸습니다. 신이 교홍에게 이르기를, ‘의당 사자를 보내어 사례하여야 한다.’ 하였더니, 교홍이 말하기를, ‘예전 전례에 사은하는 서계를 모두 사신에게 주어 보냈으나, 사신이 말하는 바도 심히 예(禮)에 합하나, 내가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사례하겠다.’ 하고, 드디어 중 덕모(德模)·경유(慶柔)로 사자를 삼았습니다.
신 등이 일기도(一岐島)에서 들으니, 왜인이 제주(濟州) 배를 표략(剽掠)하여 인물을 사로잡아 왔다고 하므로, 신 등이 교홍과 광엄에게 힘써 쇄환할 것을 청하였더니, 교홍 등이 지좌(志佐)·좌지(佐志)에게 이문(移文)하여 추쇄하게 하였습니다. 박다(博多)에 이르러 사로잡혀 간 남녀 합계 7명이 일기(一岐)의 모도포(毛道浦)에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토주(土主)는 호자압타(呼子鴨打)였습니다. 신은 부사(副使) 윤인보와 서장관 신숙주(申叔舟)를 시키고, 광엄(光嚴)도 또한 우춘(祐椿)을 시켜 함께 가서 찾아서 드디어 잡혀 온 사람 7명을 찾아 가지고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렀습니다. 종정성(宗貞盛)이 자기의 공을 삼고자 하여 신에게 이르기를, ‘내가 두세 번 쇄환하기를 청하였으니, 그 공이 작지 않다. 청하건대, 세 사람은 머물러 두어 나에게 바치게 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성심이 대단히 두터우니 내가 마땅히 계달하겠다. 그대 스스로 바칠 필요는 없다.’ 하였으나, 정성(貞盛)이 굳이 청하므로, 세 사람을 머물러 두어 체찰사 이예(李藝)에게 부탁하고 왔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10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책 515면
- 【분류】외교-왜(倭)
○日本國通信使卞孝文回至慶尙道 玉浦馳啓: "臣等初到對馬島, 宗貞盛受賜物, 行四拜以致謝意, 仍遣人爲鄕道, 行至赤間關, 大內敎弘徑到赤崎浦迎候, 翼日受賜物。 賜物將至, 敎弘立庭下, 躬身以迎, 陞堂跪受扣頭, 仍贈臣等衣服, 厚遺食物。 臣謂敎弘曰: ‘我殿下追念故大內之誠, 命我等致奠。’ 答曰: ‘疊受厚恩, 感謝難盡。 但使臣未行慶禮於國王, 先受奠禮, 恐國王非之, 請於回時致奠。’ 敎弘遂以臣等之來, 馳報京都, 乃發船四隻護送, 行至尾路, 代官以無國王敎書不護送。 臣等行至兵庫, 使通事尹仁始先往京都報之, 兵庫守護官來謂臣等曰: ‘今報使臣聲息于京管領及伊勢, 皆無可否, 但其出納者言: 「大內之報, 時未回答, 不宜擅自上來。」’ 仍言: ‘國王年少, 諸大臣擅權, 以使臣支待各有所費, 但於國有禮物, 而於己無益, 故托辭以拒之。 若在尾路待報, 則淹滯必久矣。 使臣不待而來, 甚善計也。’ 且言: ‘伊勢乃國王嬭夫, 方與管領執國政, 王之所爲, 悉皆變更。 主弱臣强, 國事日非。’ 尹仁始回言: ‘入京見太和守, 太和守言: 「何不待報而來乎? 管領已議諸大臣, 欲不接納也。」 仁始答云: 「淹雨赤間關、尾路, 已逾旬月, 而回報不到, 乃來耳。」 太和守遂議管領, 乃招仁始言: 「管領亦云: 『業已來矣, 不可拒之。』 乃告于王, 令左武衛依舊例以待。」’
臣等入京都, 齎書契禮物到關, 國王坐殿上, 臣奉書契跪楹外, 僧一人跪受, 置王案上。 臣以下正官立楹外, 軍官以下立庭, 皆行四拜。 臣云: ‘兩國隔海, 我殿下聞殿下嗣位, 遣臣等來賀。’ 楹內有人言: ‘國王年少, 當徐啓達。’ 臣等乃出。 其群臣數百入庭中皆蹲坐, 人言: ‘群臣賀新王, 始通隣國也。 到相國寺, 祭先國王於殿內, 設神位掛影。’ 太和守言: ‘祭禮可從貴國之禮, 國王年少, 不能參, 國俗本無拜禮。’ 管領以下大臣坐以陪祭, 國王及母妃, 皆潛往觀焉。 祭畢, 與管領相會, 太和守云: ‘國王年少, 管領實權。 王坐當南向, 使臣在東。’ 臣云: ‘客東主西, 禮也。’ 太和守言: ‘然則管領在東, 使臣在西可也。’ 臣示以不可之意, 太和守云: ‘地勢如此, 不可易也。’ 臣等乃入, 管領坐東不起, 臣呼太和守云: ‘管領何不起?’ 乃起, 相揖就坐。 臣謂太和守云: ‘聘問, 古今通義。 今遣回禮使否?’ 太和守云: ‘舊無其例, 不可遣。’ 臣等詳陳舊例, 太和守曰: ‘已議諸大臣, 皆曰: 「舊例無回禮使, 只有請經使耳。 今將遣請經使矣。」’ 臣强言之, 管領及太和守曰: ‘詳考文籍, 實無舊例。 國王年少, 不能(栽)〔裁〕 決, 我等獨專國事, 不可以無例之事, 自我爲始。’ 遂以僧光嚴、祐椿爲請經使副。 臣等受國王書契禮物。 國王尋薨, 問喪制, 云: ‘罷市七日後, 擇吉燒骨葬之。 大臣著白衣, 不食肉, 五十日而除。’ 臣等行至伊要, 其護送者群聚號噪, 持杖突入, 將奪禮物而去。 臣言: ‘此皆汝國王管領禮物, 汝等何至無禮如此?’ 再三開諭, 亦不聽, 號噪愈甚, 不得已給錢, 乃止。 至赤間關, 光嚴追及言: ‘先國王同母弟卽位, 年方九歲也。’ 至山口, 祭故大內, 爵幣皆立奠。 臣謂敎弘曰: ‘宜當遣使以謝。’ 敎弘曰: ‘舊例謝恩書契, 皆授使臣以送。 然使臣所言, 甚合於禮, 我當遣人以謝。’ 遂以僧德模、慶柔爲使。 臣等聞一岐島 倭剽掠濟州船, 虜人物而來, 臣等請敎弘及光嚴, 力圖刷還, 敎弘等移文志佐佐志, 使刷之。 到博多, 聞被虜男女共七名在一歧 毛道浦, 其土主, 呼子鴨打也。 臣使副使尹仁甫及書狀官申叔舟, 光嚴亦令祐椿同往索之, 遂得被虜人七名, 到對馬島。 宗貞盛欲爲己功, 謂臣曰: ‘我再三請刷, 其功不小, 請留三人, 使我進之。’ 臣答云: ‘誠心至厚, 我當啓達, 不必自獻。’ 貞盛固請, 乃留三人, 付體察使李藝而來。
- 【태백산사고본】 33책 10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책 515면
- 【분류】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