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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01권, 세종 25년 8월 6일 무자 1번째기사 1443년 명 정통(正統) 8년

내전을 고쳐서 유서라 하고 승정원에서는 관직과 이름을 써서 이에 동봉하여 내리게 하다

임금이 진양 대군(晉陽大君) 이유(李瑈)를 시켜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이제 내전(內傳)의 소식(消息)을 유서(諭書)라고 고쳐 칭하고, 비록 승지(承旨)라도 역시 보지 못하게 하고 다만 그 밖에다가 승지(承旨)의 이름을 쓰기를, ‘신(臣) 아무개는 공경히 유지(諭旨)를 받든다. ’고 하는 것이 어떠할까."

하니, 유의손(柳義孫)이 아뢰기를,

"일이 비록 비밀이라도 승지(承旨)는 불가불 알아야 할 것이오며, 비록 여섯 승지가 다 알지 못한다 하여도 도승지(都承旨)는 불가불 알아야 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황수신(黃守身)이 아뢰기를,

"의손(義孫)의 말이 옳습니다. 성명(聖明)한 조정에는 진실로 그 폐해가 없을 것이오나, 만약 성명의 세대가 아니오면 비록 내지(內旨)가 아니라도 내지라고 칭탁하는 자가 혹 있을 것이오니, 승지가 알지 못하고 봉행(奉行)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예전에는 조칙(詔勅)을 봉해서 도로 바친 자가 있었사오니, 도승지는 불가불 참여하여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유(瑈)가 말하기를,

"임금이 그런 폐단을 염려하여 말씀하시기를, ‘무릇 정령(政令)의 옳고 그른 것은 실로 군상(君上)의 현부(賢否)에 관계되는 것이다. 과연 어질다면 정치가 어찌하여 옳지 아니하며, 과연 어질지 않다면, 하려는 바가 있는 것을 비록 나라 사람들이 말하여도 오히려 즐겨 듣지 않으려 하거든, 하물며 하나의 승지(承旨)이겠는가. 비록 어진 신하가 있다 하여도 그치게 하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하고, 바로 의정부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니, 여럿이 의논하고 아뢰기를,

"뒷 세상에 법으로 남길 일이온즉, 유사(有司)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옴은 실로 대체(大體)에 부끄러움이 있는 것이옵니까. 하물며 유서(諭書)에 작은 보(寶)를 찍는 것이오니, 전일(前日)의 내전(內傳) 소식(消息)에 비하여 더욱 중(重)한 것이 될 것이와, 사사(事事)로 쓸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 바라옵건대, 비밀로 할 일에는 유서(諭書)를 쓰게 하시고, 그 외에는 일의 크고 작은 것 없이 모두 유사(有司)에게 내려 시행하게 하소서. 만약 기한이 급한 일이면 역전(驛傳)이나 혹은 방울을 달아[懸鈴]서 이첩(移牒)하면, 일이 지체됨이 없고 체통(體統)이 문란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하고, 권제(權踶)는 의논하여 아뢰기를,

"내전 소식은 본디 좋은 법이 아니옵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 총애하던 신하 이분성(李汾成)이 건의한 것으로서, 당시에 소식(消息)이 벌떼 날듯 하여 주군(州郡)이 그 번거로움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의 소식은 비록 그런 폐해는 없을 것이오나, 아직도 옛이름을 따르는 것은 진실로 성조(聖朝)에서 마땅히 행할 바가 아니옵니다. 이제 그 제도를 고쳐서 작은 보(寶)를 찍는 것은 곧 예전의 어찰(御札)·수찰(手札)·묵칙(墨勅)·내비(內批)와 같은 것으로서 진실로 아름다운 법이옵니다. 그러하오나, 그 제도는 고치고 그 용처(用處)를 고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그 행용(行用)하는 절복은 일체 여럿의 의논과 같이 하소서."

하였다. 드디어 예조에 전지하기를,

"국초(國初)에 친히 왕지(王旨)를 품(稟)하거나 입으로 전한 교지[口傳敎旨]의 법이 있었는데, 후일의 폐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제 다 혁파하고, 유독 내전 소식(內傳消息) 한가지 일만은 아직도 고려(高麗)의 옛일을 그대로 따른 것은, 그 일의 정체(停滯)되지 아니하고 실행하기 편리하며 쉬워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로 행하면서 혁파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후일의 폐해가 있을 것이므로, 이제부터는 내전(內傳)을 고쳐서 유서(諭書)라 하고 작은 보(寶)를 찍고, 승정원(承政院)에서는 따로 한 종이에 쓰기를, ‘공경히 받든 궁내(宮內)에서 내린 유서(諭書) 몇 번째’라 하고, 관직과 아래에 신(臣) 아무개라고 써서 동봉(同封)하여 내려보낸다. 외관(外官)들은 다만 유서만을 보고 유서가 없으면 역시 봉행하지 아니하고 다 문서를 갖추어서 아뢰게 하고, 그 봉행한 일도 문서를 갖추어서 아뢰어 회답하되, 만약 일이 기밀(機密)에 관한 것이면 밀봉(密封)하여 회계(回啓)하는데, 유서도 함께 봉(封)하여 돌리게 한다. 만약 자기 곳[自己處]에 하사(下賜)한 유서이면 제 사사로 간직하고 사연을 갖추어서 아뢰게 하라. 무릇 유서는 단지 변경(邊警)과 기밀(機密) 및 기한이 박도한 일 등에 쓸 것이요, 그 외의 잡사(雜事)는 모두 유사(有司)에게 내려 시행하게 할 것이다. 또 밖에 있는 관리가 무릇 아뢰어야 할 것은 서장(書狀)을 쓰지 말고 모두 계본(啓本)으로 올리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101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책 500면
  •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전사(前史)

○戊子/上令晋陽大君 傳旨承政院曰: "今以內傳消息, 改稱諭書, 雖承旨亦不得見, 只於其外, 書承旨之名曰: ‘臣某敬奉諭旨。’ 如何?" 柳義孫啓曰: "事雖秘密, 承旨不可不知。 雖六承旨, 皆不知, 都承旨不可不知。" 黃守身啓曰: "義孫之言然矣。 聖明之朝, 固無其弊, 若非聖明之代, 則雖非內旨, 而托以內旨者或有之, 承旨不知而奉行, 無奈不可乎? 古有封還詔勑者, 都承旨不可不與聞。" 曰: "上已慮此弊曰: ‘凡政令之善惡, 實係君上之賢否。’ 果賢也, 政何由不善? 果不賢也, 欲有所爲, 雖國人言之, 尙不肯聽, 況一承旨乎? 雖有賢者, 不能止之矣。" 仍下議政府議之。 僉議啓曰: "垂法後世之事則有司不之知, 實有愧於大體。 況於諭書, 印以小寶, 則其視前日內傳消息爲尤重, 不可事事而用之也。 乞自今一應秘密之事, 方用諭書, 其餘事無大小, 竝下有司施行。 若其及期之事, 或傳驛或懸鈴移牒, 則事不留滯, 而體統不紊矣。" 權踶議曰: "內傳消息, 本非美法, 高麗 忠烈王時, 幸臣李汾成所建白也。 當時消息蜂午, 州郡不勝其煩。 今之消息, 雖無是弊, 尙襲舊名, 則固非聖朝所宜行也。 今改其制, 印以小寶, 卽古者御扎手扎墨勑內批之遺意, 誠爲美法也。 然改其制而不改其用, 不可也。 其行用節目, 一如僉議。" 遂傳旨禮曹曰:

國初有親稟王旨、口傳敎旨之法, 慮有後日之弊。 今皆革罷, 獨內傳消息一事, 尙仍高麗之舊者, 以其事不停滯而行之便易也。 然因仍不革, 則必生後日之弊。 自今內傳改稱諭書, 用小寶。 承政院別書一紙曰: "敬奉內降諭書幾度。" 書職姓稱臣著名, 同封以降。 外官但見諭書而無承政院書, 則毋得奉行, 但見承政院書而無諭書, 則亦不奉行, 皆具本以啓。 其奉行之事, 皆啓本回答, 若事關機密, 則密封回啓, 諭書竝令封還。 若自己處下賜諭書, 則私自藏之, 具辭以啓。 凡諭書, 只用邊警與機密及期等事, 其餘雜事, 竝下有司施行。 且在外官吏凡干啓聞事, 勿用書狀, 皆呈啓本。


  • 【태백산사고본】 32책 101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책 500면
  •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