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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00권, 세종 25년 4월 19일 갑진 2번째기사 1443년 명 정통(正統) 8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세자가 정사를 섭행하도록 한 것과 남면하여 조회를 받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상소하다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엎드려 듣자오니, 전하께서 세자에게 섭정(攝政)하도록 명하시어 남면(南面)하여 조회를 받고, 1품 이하는 모두 신(臣)이라 칭하도록 하셨는바,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여 보고듣는 자가 놀라워하며, 신 등도 놀랍고 황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서 감히 간곡(懇曲)한 충정(衷情)을 진달(陳達)하오니, 너그럽게 용납하시기를 엎드려서 바랍니다. 대저 정권(政權)을 두 개로 나누는 것은 옛사람도 경계한 바이고 신 등도 이 앞서 이미 진달하였습니다. 태자(太子)가 청정(聽政)하는 것은 말세의 일이며 모두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고, 국가의 아름다운 법이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 조종 이래로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어찌하여 일조(一朝)에 대단찮은 병환으로써 정권을 두 개로 만드는 단서(端緖)를 열어 누일(累日)의 폐단이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대개 정월(正月)과 동짓달의 초하루는 전하께서 정전(正殿)에서 대조하(大朝賀)를 받고, 5일만에 여는 상참(常參) 아일(衙日)은 세자가 궁당(宮堂)에서 조회를 받게 되면 이것은 여러 신하에게 두 개의 조정을 가지게 하는 것이며, 명령을 출납하는 데에 이미 승정원(承政院)이 있는데도 일반 정무를 〈세자가〉 자품(咨稟)하게 되는 것이며, 또 첨사원(詹事院)을 두게 되면 이것은 호령(號令)이 두 곳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지존에는 두 임금이 없고 정권도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세자가 이미 백료(百僚)들과 함께 신이라 일컬으면서 하례(賀禮)를 드리고, 또 남면하여 백료들을 신하로 삼아서 정사를 처결(處決)한다면 정사에 통일과 기상이 없고 두 개의 조정이 있는 듯하여, 오직 임금이 있고 아비가 있을 뿐이라는 옛말에 어그러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사체(事體)에도 매우 타당하지 못함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정사를 부탁할 사람을 얻었으니 다른 염려가 없다고 하실 것이나, 신 등은 생각하기를,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걱정할 것이 없더라도 만세 후에는 반드시 오늘날 일을 구실로 삼는 일이 있어, 그 폐단은 말로 다 못할 것이니, 이것은 더욱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병환을 염려하시더라도, 다만 세자에게 아침저녁으로 시선(視膳)016) 하고 만기(萬機)에 참예 처결 하도록 하여, 다만 오늘날과 같이 하면 족히 일반 정무를 폐하게 되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도 의혹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 등이 삼가 《통전(通典)》을 상고하니, ‘제왕(諸王)·공(公)·후(侯)는 조정 정사를 보좌하며, 적자(嫡子)는 국사를 감독하고 다만 그 정사만 알 뿐이고 그 지위는 범하지 아니한다. 이것은 임금은 두 사람일 수 없고 지존도 둘이 없기 때문이다. 국상(國相) 이하가 적자를 뵈올 때에는 마땅히 신하로서 행동하되, 신(臣)이라 칭하지는 않는다. ’고 하였으며, 또 《예기(禮記)》에는, ‘적자는 그의 신하가 아니면 답배(答拜)하는데, 나라에서 특명을 받은 인사(人士)가 임금에게 직접 주달(奏達)하는 경우에는 적자(嫡子)라도 답배하는 것이 마땅하며, 문서(文書)와 표문(表文)·소장(疏章)에는 모두 신하 예(禮)로서 하나, 〈직접 대하여서는〉 신이라 칭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런즉 제후(諸侯)의 세자로서 국사를 감독하면서 백료들을 신하로 하지 않는 것은 옛날부터 정해진 논의가 있었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세자가 섭정(攝政)하는 것은 이미 좋은 법이 아닌데, 더군다나 옛 제도를 어기면서까지 백료에게 신이라 칭하도록 하여 지존과 같게 하는 것은 실로 타당하지 못합니다. 또 평상시 서연에 진강(進講)할 때에는 세자가 빈객(賓客)을 보면 자리에 나아가서 답례하고, 사부(師傅)를 보면 섬돌을 내려가서 먼저 오르도록 사양하여 예를 더욱 공경하게 하는 것은 스승을 높이고 사도(師道)를 중하게 하는 아름다운 뜻을 넓히는 것입니다. 지금 사부와 빈객에게 신이라 칭하면서 당하(堂下)에서 절하도록 하고, 세자에게 남면하여 조회를 받게 한다면, 이것은 사부와 빈객이 같은 그 사람이건만, 〈조회 받을 때와 서연에서 강할 때에〉 세자가 대우하는 예는 전후가 아주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세자의 거동에 대한 큰 절차이므로 또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재삼 거듭 생각하시와 이 거조(擧措)를 정지하도록 명하시어, 후세 사람의 논의가 없도록 하시고, 일국 신민의 여망(輿望)을 위로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100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책 472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정론(政論)

  • [註 016]
    시선(視膳) : 임금이 드는 수라상을 돌보는 일.

○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上疏曰:

臣等伏聞殿下命世子攝政, 南面受朝, 一品以下, 竝令稱臣, 事體至重, 有駭觀聽, 臣等不勝驚惶, 敢陳危懇, 伏惟優納。 夫二政分權, 古人所戒, 臣等前已陳之矣。 太子聽政, 叔世之事, 皆出於不得已, 非國家之美典, 況我祖宗以來, 無此故事, 奈何以一朝之微痾, 始開二政之端, 以基累日之弊乎? 夫正至月吉, 殿下受朝于正殿, 而五日常衙, 世子受于宮堂, 則是群臣有二朝矣。 出納命令, 旣有承政院, 而咨稟庶務, 又有詹事院, 則是號令有二門矣。 尊無二上, 政不可分。 世子旣與百僚共稱臣而展賀, 又正南面臣百僚而聽決, 則政無統紀, 似若兩朝廷, 非惟有乖於君在父在之義, 於國家事體, 深有未安者。 殿下必自謂付托得人, 保無他慮, 臣等以謂在今日, 雖無可虞, 萬世之下, 必以今日藉口而其弊有不可勝言者矣, 是尤不可慮也。 殿下雖以疾病爲念, 但令世子朝夕侍膳, 參決萬機, 只如今日, 亦足以不廢庶務, 而民聽不惑矣。 臣等謹按《通典》: "諸王公侯, 留輔朝政。 嫡子監國, 但知其政, 不干其位。 君不可二, 尊無二上, 國相以下見嫡子, 宜如臣而不稱臣。" 又《禮》: "非其臣則答拜。 國之命士達於君者, 嫡子宜答拜。 文書表疏, 皆臣禮而不稱臣。" 然則諸侯世子監國, 不臣百僚, 古有定議。 臣等以謂世子攝政, 已非令典, 況違古制使百僚稱臣, 以擬至尊, 實爲未便。 且平時書筵進講, 世子見賓客, 就席答禮; 見師傅, 降階讓登, 其禮益(處)〔虔〕 , 所以廣尊師重道之美意也。 今使師賓稱臣, 拜於堂下, 而世子南面受朝, 則是一師賓之身而世子待之之禮, 前後頓殊, 此正世子擧動之大節, 亦不可不熟慮之也。 伏望殿下更留三思, 命停此擧, 毋貽後世之議, 以慰一國臣民之望。

不允。


  • 【태백산사고본】 32책 100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책 472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