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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00권, 세종 25년 4월 14일 기해 3번째기사 1443년 명 정통(正統) 8년

평안도 지방의 도망간 원주민과 그 대책과 농사 및 축성에 대한 도체찰사 황보인의 건의

도체찰사(都體察使) 황보인평안도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평안도 연변 각 고을에 원주민으로서 도망한 홋수(戶數)가 3백 21호이고, 다른 곳에서 입거(入居)한 사람으로서 도망한 홋수가 2백 70호나 됩니다. 오는 가을에 조관(朝官)을 보내어 도망간 자를 끝까지 추쇄하게 하되, 영영 나타나지 아니하는 자는 부강(富强)한 다른 호로써 그 숫자를 채워서 입주시키고, 도망간 자를 붙여 살도록 허락하는 사람의 온 가족을 입거시킨다는 법을 거듭 밝히기를 청합니다. 또 연변 각 고을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일찍이 강 너머 땅에 임의대로 경작하여 안락하게 생활하였으나, 갑인년 이후부터 강 너머 땅에 농사짓는 것을 일절 금지하고 비록 강 안쪽의 땅이라 하더라도 형세가 동떨어져 구원하기 어려운 것은 또한 농사짓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마음이 들떠서 사는 곳을 버리게 됩니다. 이리하여 지방 군사가 나날이 줄어들고 세부(稅賦)도 나날이 줄어들어 매우 미편합니다. 여연군(閭延郡) 소우예(小虞芮)우예동원(虞芮洞源) 내외산(內外山)과 우예에 딸린 유파(楡坡)와, 자성군(慈城郡) 태일(泰日)과, 강계군(江界郡) 여둔(餘屯)·봉화대 동구(烽火臺洞口)·예전(艾田)과, 벽동군(碧潼郡) 아이(阿耳)에 딸린 비소리(非所里)·소파아(小波兒)·광평(廣平) 등지의 땅을 경작하는 것을 금하지말고 시기에 따라 갈고 심도록 할 것이며, 기타 각 고을에서 형세가 동떨어져 적의 침략에 구원하기 어려운 곳이라도 또한 형편을 요량하여 경작할 수 있게 하기를 청합니다.

신이 그윽이 보건대, 전죽동 구자(箭竹洞口子)와 청수 구자(靑水口子)는 거리가 17여 리로서 척후(斥候)를 통하기가 멀지 않으니 만약 뜻밖의 변고가 있더라도 시기에 미쳐 능히 구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전죽 구자는 혁파하기를 청합니다.

두질걸리(豆叱乞里)·암림평(暗林平)·보진장(寶鎭場) 등 세 곳 만호(萬戶)는 혁파하여, 두질걸리에 있는 사람들은 창주(昌洲)에 입보시키고, 또 고정주(古靜州)에다 목책을 설치하여 암림의 사람을 입보시키고, 또 정녕현(定寧縣)방산현(方山縣)에 장차 옮길 것이니, 잠정적으로 방산현 옛 목책에다 근처 백성을 입보시키되, 만약 목책이 비좁으면 극성(棘城)을 더 설치하여 수어(守禦)하다가, 내년 봄을 기다려서 터를 잡아 벽성(壁城)을 쌓을 것입니다.

이산(理山)강계(江界)의 중간 쾌북동(夬北洞)에다 별도로 읍(邑)을 설치하여 독산(獨山) 등 10마을과 강계의 봉화대 등 3마을에 거주하는 백성 도합 1백 10호를 떼어 붙이고 도을한 만호(都乙漢萬戶)는 혁파할 것입니다.

우예(虞芮)에다 읍을 설치하여 조명간(趙明干) 등 2마을과 자성태일 등 각 마을에 거주하는 백성 도합 1백 80호를 떼어 붙이고 우예(虞芮)·소우예(小虞芮) 등의 만호는 혁파할 것입니다. 이상 두 읍에 필요한 인리(人吏)와 관노비(官奴婢)는 남도 각 고을의 많은 곳에서 추려 내어서 정해 붙일 것입니다.

또 지령괴 만호(池寧怪萬戶)에게 호둔(好屯)에다 성벽을 쌓고 군사를 거느리고 농민을 수호하게 하다가 추수(秋收)를 마치거든 지령괴에 입보시켜 겨울을 지나게 하며, 또 가사동(家舍洞)에다 성벽을 쌓고서 부근에 있는 우시내(亐時乃) 등 3마을에 사는 백성들을 입보시켜 겨울을 지나게 하되, 무릇 연변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입보하고 성을 나가는 날짜와 시각은 기한을 정하지 말고 얼음이 얼거나 얼음이 풀리는 데 따라 적당히 요량하여 시행할 것입니다.

이산군(理山郡) 북동(北洞)·박씨리(朴氏里)벽동군 벽단(碧團)창성군(昌城郡) 창주(昌州)삭주군(朔州郡) 옛 군영(軍營)에다 합배(合排)009) 를 더 설치하되, 매 합배마다 15호를 정해 붙이고, 수구 합배(水口合排)는 혁파하고, 종포 합배(從浦合排)는 강계에다 옮겨 설치하여 15호를 더 정해 붙일 것입니다. 그 합배의 찰방(察訪)은 무예(武藝)와 지략(智略)이 겸비한 사람을 임명하여서 각기 합배에서 순행 고찰(考察)하게 하고, 사변이 있을 때는 도절제사를 따라 부방(赴防)하도록 할 것입니다.

또 창주 구자(昌洲口子)·전자동(田子洞)봉두(峯頭)010)의주(義州) 청수 구자(靑水口子) 봉두(峯頭)에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먼저 벽성과 연대(煙臺)를 쌓고, 무창(茂昌)에서 의주(義州)까지의 연변 각 고을에 연대를 쌓지 않은 곳에도 뒤따라 모두 쌓도록 할 것입니다. 또 외적이 들어오는 길은 막지 않을 수 없으니, 강가에 수목(樹木)이 무성하고 많으므로 영선(營繕)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예전 예대로 막아서 지키기를 청합니다. 또 금년 봄에 행성(行城)을 쌓을 때에 황해도 군인 중에 도망한 자가 2백 10명인데, 먼저 도망하자고 부르짖은 두목(頭目)은 일찍이 수교(受敎)한대로 평안도 연변 각 고을에 입거시키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100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책 470면
  • 【분류】
    교통-육운(陸運) / 호구-호구(戶口) / 호구-이동(移動) /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통신(通信) / 군사-군정(軍政) / 농업-전제(田制)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009]
    합배(合排) : 함경도나 평안도 지방에 군사적인 성격을 띄운 우역촌(郵驛村)을 말함.
  • [註 010]
    봉두(峯頭) : 산봉우리.

○都體察使皇甫仁回自平安道啓: "平安道沿邊各官元居人逃亡三百二十一戶, 入居人逃亡二百七十戶。 請於來秋, 發遣朝官, 窮極刷逃, 永不現搉者, 以富强他戶充數入送, 申明許接人全家入居之法。 且沿邊各官居民, 曾於江外, 任意耕作, 安土資生, 自甲寅年以後, 一禁江外之田, 雖江內之田, 勢孤難救者, 亦且禁耕。 因此離心失所, 土兵日減, (祖)〔租〕 賦日縮, 深爲未便。 請(閭迎郡)〔閭延郡〕 虞芮虞芮洞源內外山、虞芮楡坡慈城郡 泰日江界郡 餘屯烽火臺洞口艾田碧潼郡 阿耳非所里 小波兒廣平等處之田, 毋令禁耕, 趁時耕種, 其他各邑勢孤難救之處, 亦令量宜耕作。 臣竊觀箭竹洞口子, 與靑水口子相距十七餘里, 通望不遠, 儻有緩急, 可能及期救援, 請革箭竹口子, 又革豆叱乞里暗林平寶鎭場等三處萬戶, 以豆叱乞里人物, 入保於昌洲。 且於古靜州設木柵, 入保暗林人物, 又將移定寧縣方山縣, 姑於方山縣古木柵, 入保近處之民。 若木柵狹隘, 則加設棘城守禦, 待來春審基築壁城。 又於理山江界中央北洞別置邑, 以獨山等十里及江界烽火臺三里居民, 合一百十戶割屬, 革都乙漢萬戶。 又於虞芮置邑, 以趙明干等二里慈城泰日等各里居民, 合一百八十戶割屬, 革虞芮小虞芮等萬戶。 其人吏官奴婢, 以南道各官多處, 抄出定屬。 且令池寧恠萬戶於好屯築壁城, 率軍守護農民, 及秋收畢, 於池寧恠入保經冬。 又於家舍洞築壁城, 以旁近亏時乃等三里居民入保經冬。 凡沿邊居民入保放出日時, 毋令定限, 隨其合氷解氷, 量宜施行。 又於理山郡北洞及朴氏里碧潼郡 碧團昌城郡 昌州朔川郡右軍營, 加設合排, 每合排定屬十五戶。 革水口合排, 移設從浦, 合排於江界, 加屬十五戶。 其合排察訪, 以武略兼備人差之, 各於合排, 巡行考察, 有事變則從都節制使赴防。 又昌洲口子田子洞峯頭及義州 靑水口子峯頭, 乘農隙先築壁城烟臺, 自茂昌義州沿邊各官烟臺未築之處, 隨後畢築。 且賊入之路, 不可不塞。 江邊樹木盛多, 繕治不難, 請依舊例防塞。 又今春行城造築時, 黃海道軍人逃亡者, 二百一十名。 其首唱頭目, 請依已曾受敎, 平安道沿邊各官入居。" 從之。


  • 【태백산사고본】 32책 100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책 470면
  • 【분류】
    교통-육운(陸運) / 호구-호구(戶口) / 호구-이동(移動) /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통신(通信) / 군사-군정(軍政) / 농업-전제(田制)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