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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97권, 세종 24년 8월 20일 정미 1번째기사 1442년 명 정통(正統) 7년

사간원에서 첨사원 설치를 반대하는 상소문

사간원에서 상소(上疏)하기를,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계달(啓達)하는 것이 신하의 지극한 진정이며, 몸을 굽히시어 아랫사람의 말에 좇는 것은 성인(聖人)의 미덕(美德)입니다. 말해야 할 일을 침묵하고 말하지 않는 것은 신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고, 채납(採納)해야 할 말을 채용하지 않는 것은 정치하는 도리에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임금과 신하가 꾀를 같이 하여 옳고 그른 것을 서로 바로잡아야만 일은 다 마땅하게 되고 정치의 도(道)는 높아질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착하고 현명한 제왕은 일을 일으키고 시위(施爲)함을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남과 더불어 같이 논의하였습니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꾀함이 마음에 미치면 경사(卿士)에 미치고, 꾀함이 서인(庶人)에게 미쳐서 그친다. ’고 하였습니다. 지금 첨사원(詹事院)의 설치는 꾀함이 대신에게 미치지 않았으며, 의논이 언관(言官)과 합치하지 않았습니다. 온 나라 안의 신하들이 모두 불가(不可)하다고 말하므로, 신 등은 여러 번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였으나 옳다는 윤허를 입지 못하였습니다. 또 신 등에게 타일러 말씀하시기를, ‘첨사원을 설치하는 것은 동궁의 미비(未備)한 관원을 보충하는 데 불과한 것인데, 너희들은 어째서 말하는가. ’라고 하시오니, 신 등은 명령을 듣고 더욱 놀라움이 절실할 뿐, 임금의 의사를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신 등이 천위(天威)를 간범(干犯)함을 무릅쓰고 스스로 그침을 용납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신 등은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첨사원이 동궁의 사무를 통솔할 뿐이라면, 조종(祖宗) 때로부터 지금까지 다만 서연(書筵)과 익위(翊衛)를 설치하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였으며, 전하께서 또 좌우 중호(左右中護)를 설치하여 예의(禮儀)를 맡게 하여서 처리하고 조처해야 하는 것은 빠짐 없이 다 구비되었는데, 어찌하여 오늘날 이와 같이 〈첨사원의 설치를〉 급급하게 하십니까. 대체로 한집안의 일도 크거나 작거나 반드시 다 가장(家長)에게 품의(稟議)하게 한 뒤라야 그 집안의 도리가 이루어지거늘, 하물며 한 나라의 중대함과 만기(萬機)의 번다(繁多)함이겠습니까. 세자가 지존(至尊)에 대하여는 의(義)는 부자(父子)를 겸하였습니다. 만약 품명(稟命)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전단(專斷)이 될 것이고, 일마다 품의하려면 그 번거롭고 세쇄함이 더욱 심할 것입니다. 전(傳)에 말하기를, ‘치리(致理)라고 말하는 것은 정사(政事)로 하여금 다 중서(中書)에서 나오게 하고자 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국정(國政)을 하나로 귀일시키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정사가 혹은 승정원에서 나오고 첨사원에서 나와서 서로 통속(統屬)되지 않는다면, 어찌 《춘추(春秋)》의 일통(一統) 주의에 합치한다고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王位)에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한결같이 지성(至誠)으로 신하와 백성들을 대우(待遇)하시어 모든 시위(施爲)하는 바를 지나치게 하심이 없었는데, 어찌 홀로 이 일에 이르러서는 대신과 함께 의논하지 않고 대간(臺諫)과 더불어 말하지도 않는 채, 성상의 생각만으로 전단(專斷)하기를 그치지 않으십니까.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조종(祖宗)께서 전하에게 부탁한 뜻에 어떠하겠습니까. 더욱이 임금과 신하가 꾀를 합치한다는 뜻에는 어떠하며, 백성에게 미더움을 주는 도리에는 또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은 한 관직을 세우는데 세 가지 잘못이 갖추는 것입니다. 신 등은 그것이 옳은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옛 제도를 상고하여도 맞지 않고, 오늘에 시행하여도 온당하지 않으며, 후세에 끼쳐서 폐단이 있는 것을 전하께서는 장차 어디에 쓰시려는 것입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급히 이 명령을 정지하시고 굽어 민정(民情)에 좇으시면 종묘 사직과 생민의 행복이 이보다 더할 수 없겠나이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첨사원은 옛 제도에 있는 것인데, 너희들은 어째서 이와 같이 고집하는가."

하였다. 우헌납(右獻納) 윤사윤(尹士昀)이 아뢰기를,

"당(唐)나라의 제도에 태자 첨사원(太子詹事院)이 있었던 것은 태자의 궁중에 사무가 번다(煩多)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동궁에는 이미 번거롭고 소요(騷擾)스러운 일이 없으며, 또 서연(書筵)과 중호(中護) 등의 관원이 있어서 또한 사무 처리를 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조종(祖宗) 때에 없던 관직을 설치한다면, 다만 신 등만이 놀랄 뿐 아니라,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거의가 다 불가(不可)하다고 할 것이오니, 이 명령을 폐지하여야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1책 9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책 431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丁未/司諫院上疏曰:

    有懷必達, 臣子之至情; 屈體從言, 聖人之美德。 事可言而含默, 臣職不供矣; 言可採而不用, 治道有虧矣。 必也君臣協謀, 可否相濟, 而後事皆合宜而治道隆矣。 是故聖帝明王擧事興爲, 必與人共之。 《書》曰: "謀及乃心, 謀及卿士, 謀及庶人。" 是已。 今立詹事院, 謀不及於大臣, 議不合於言官, 擧國臣僚皆曰: "不可。" 臣等屢瀆天聰, 未蒙允可。 且諭臣等以謂: "置詹事院, 不過補東宮之闕官耳, 爾等何以言之?" 臣等聞命, 尤切驚駭, 未曉聖意, 此臣等所以干冒天威, 不容自已也。 臣等竊念詹事院, 摠東宮之務而已, 則自祖宗以來, 只設書筵翊衛而已足, 殿下又置左右中護, 以典禮儀, 其所以處置之者, 纖悉備具, 何今日汲汲如是哉? 大抵一家之內, 事無大小, 必資稟於家長, 而後家道乃成, 況以一國之重、萬幾之繁而儲副之於至尊, 義兼父子, 若不稟命, 是專之也, 事事而稟之, 其爲煩碎益甚矣。 《傳》曰: "言致理者, 欲令政事皆出中書。" 此國政之歸于一也。 一國之事, 或出承政院, 或出詹事院, 不相統屬, 豈《春秋》一統之義乎? 殿下自臨御以來, 一以至誠待臣庶, 凡所施爲, 無有過擧, 何獨至於此而不與大臣謀之, 不與臺諫言之, 專斷於宸聰而不止乎? 若此不已, 則祖宗付托之意何如? 君臣協謀之義何如? 示信於民之道又何如? 建一官而三失俱, 臣等未知其可也。 稽於古而不協, 施於今而不便, 垂於後而有弊, 殿下將安用之? 伏望亟停是命, 俯從輿情, 宗社生民之福, 幸莫甚焉。

    上不允曰: "詹事院, 古制有之。 爾等何若是其固執也?" 右獻納尹士昀啓曰: "制有太子詹事府, 以太子宮中事務煩多也。 (令)〔今〕 也於東宮旣無煩擾之事, 且書筵及中護等官, 亦兼治事, 而一朝遽設祖宗所無之官, 非但臣等驚駭, 一國臣民, 擧皆以爲不可, 宜罷是命。" 上曰: "予已知之。"


    • 【태백산사고본】 31책 9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책 431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