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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97권, 세종 24년 8월 14일 신축 4번째기사 1442년 명 정통(正統) 7년

김덕생의 후사를 세워 그의 제사를 받드는 것에 대하여 의논하게 하다

임금이 의정부에 이르기를,

"증 동지중추원사(贈同知中樞院事) 김덕생(金德生)은 몸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용기를 떨쳐, 군부(君父)를 창졸간에 일어난 급변(急變)에서 벗어나게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고 후사(後嗣)도 없으므로 내가 그 후사를 세워서 그의 제사를 받들고자 하는데 어떤가. 의논하여 계문(啓聞)하라."

하니, 우의정 신개(申槪)는 논의하기를,

"신하로서 큰 공(功)이 있고 몸이 사망한 자를 추후하여 그 공을 기록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왕(帝王)의 아름다운 처사(處事)입니다. 덕생(德生)이 위급한 순간을 당하여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힘을 분발하여 잠깐 사이에 손으로 사나운 짐승을 쳐서 쓰러뜨렸으니 그 공이 매우 큽니다.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이 미치기 전에 몸이 사망하고, 또 자손이 없으니 슬프고 애석하다고 하겠습니다. 예전부터 그 공을 추록(追錄)하는 일이 그의 후사를 세우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마땅히 형제의 아들을 세워서 후사(後嗣)를 삼고 제전(祭田)을 내려 주어 충혼(忠魂)을 위로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권장하고 격려하는 뜻을 보이게 하옵소서."

라고 하고, 좌찬성 하연(河演)·우찬성 최사강(崔士康)·좌참찬 황보인(皇甫仁)·우참찬 이숙치(李叔畤)는 논의하기를,

"덕생이 비록 사망하였으나 그 공을 추상(追賞)하겠다는 성교(聖敎)는 지당합니다. 그러나 신 등은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만약 아들도 딸도 없다면 다른 사람의 아들로 후사(後嗣)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여도 넉넉히 지하(地下)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의 풍속에는 비록 봉사(奉祀)할 아들이 없더라도, 만약 딸의 자손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아들을 빌어서 후사를 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정리(情理)가 진실로 그러합니다. 덕생이 사망한 지가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이 은전을 의논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특별한 은전입니다. 제전(祭田)을 덕생의 외손(外孫)에게 주어서 향사(享祀)하게 한다면, 그 자손들은 반드시 성심껏 제사를 받들 것이며 신(神)도 또한 감격할 것입니다. 만약 덕생(德生)의 아우 김우생(金祐生)의 차자(次子)로 후사(後嗣)를 삼는다면, 입후(立後)한 자가 아들이 되어 반드시 덕생의 외손과 노비(奴婢)나 토지(土地)를 가지고 서로 다투게 될 것이므로, 정리가 순편(順便)하지 않을 것 같사오니 어찌 덕생의 본심(本心)이라 하겠습니까. 만약 전지(田地)와 노비를 본손(本孫)의 소유(所有)인 것으로 여겨 추탈(追奪)할 수 없다고 한다면, 원래 제사는 정성을 위주(爲主)로 하는 것인데 우생(祐生)의 아들의 정(情)이 어찌 본손(本孫)의 친애하는 정만 할 수 있겠으며, 또 어찌 성심으로 봉사(奉祀)하겠습니까. 제전(祭田)을 덕생의 외손에게 주어서 길이 향사(享祀)하도록 특별한 은전을 베풀어 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신개(申槪)의 논의에 따르고, 드디어 전지하기를,

"증 동지중추원사 김덕생(金德生)태종(太宗)의 잠저(潛邸) 때에 있어서 위급한 순간을 당하여, 과감 용맹하게 몸을 떨치어 능히 태종의 불측한 변(變)을 구제한 그 공이 매우 크니 영구히 잊을 수 없다. 불행하게도 일찍 죽고 또 사자(嗣子)가 없어서 포상하는 은전이 지금까지 거행되지 못하고 진실로 궐전(闕典)이 되었으니, 마땅히 후사를 세워서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또 제전(祭田)과 노비를 주어 길이 후세까지 미치게 하여 그 공을 보답해야 하겠다. 그 전지(田地)와 노비의 수는 일체 송거신(宋居信)의 전례에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1책 9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책 429면
  • 【분류】
    신분-천인(賤人) / 가족-가족(家族)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왕실-국왕(國王) / 농업-전제(田制)

○上謂議政府曰: "贈同知中樞院事金德生忘身奮勇, 脫君父於蒼卒之變, 不幸早歿無嗣。 予欲立後以奉其祀, 何如? 其議以聞。" 右議政申槪議曰: "臣有大功而身亡者, 追錄其功, 古今帝王之美事。 德生當危急之際, 輕生奮力, 頃刻之間, 手斃惡獸, 其功甚大, 褒賞之典未及擧而身亡, 又無子孫, 可謂痛惜。 自古追錄其功, 莫大於立後, 宜令猶子立以爲後, 賜給祭田, 以慰忠魂, 以示勸勵。" 左贊成河演、右贊成崔士康、左參贊皇甫仁、右參贊李叔畤議曰: "德生雖亡, 追賞其功, 聖敎至當。 然臣等竊謂若無子女, 則以他人之子立後奉祀, 足慰地下之魂矣。 今世俗雖無子奉祀, 若有女孫, 則無一人借他人之子爲後, 情理固然也。 德生之死, 已有年矣, 而命議追報, 是特典也。 以祭田給德生外孫, 使之享祀, 則其子孫必誠心致祭, 而神又感格矣。 若使德生祐生次子爲後, 是爲之後者爲之子, 必與德生外孫反爭臧獲土田, 情理似乎不順, 豈德生之本心哉? 若曰田民以爲本孫所有, 不可追奪, 則夫祭以誠爲主, 祐生之子之情, 豈如本孫親愛之情乎? 又豈誠心奉祀哉? 以祭田給德生外孫, 永世享祀, 以施別典何如?" 上從議, 遂傳旨曰:

贈同知中樞院事金德生, 在太宗潛邸時, 當危急之際, 奮身果勇, 能救不測之變, 其功甚大, 帶礪難忘。 不幸早歿, 又無嗣子, 褒賞之典, 至今未擧, 誠爲闕典, 宜立後以奉其祀, 且給祭田奴婢, 宥及永世, 以報其功。 其田地奴婢之數, 一依宋居信之例。


  • 【태백산사고본】 31책 9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책 429면
  • 【분류】
    신분-천인(賤人) / 가족-가족(家族)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왕실-국왕(國王) / 농업-전제(田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