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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94권, 세종 23년 윤11월 14일 정축 1번째기사 1441년 명 정통(正統) 6년

사리각 경찬회에 관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본월 10일에 글을 갖추어 흥천사의 사리탑 경찬회를 파하기를 청하였던 바, 전지(傳旨)하시기를, ‘한(漢)나라 이후로부터 역대의 임금이 부처를 섬기지 아니한 이가 없었으므로 나도 한다. ’고 하시니, 신 등이 명을 들은 뒤로 통분하옴을 이기지 못하와, 이튿날 또 그 뜻을 말씀드렸더니, 또 전지하시기를, ‘너희들의 말한 바는 모두 내가 아는 바이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를 여뀌잎처럼 작다고 일컬었고, 불교가 천하에 퍼졌는데, 작은 나라라고 하여 어찌 못하겠느냐.’ 하시니, 신 등이 명을 듣고 더욱 놀래었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총명 예지(聰明睿智)하신 성인으로 성학(聖學)의 육경(六經)과 사적(史籍)을 강구(講究)하지 않으심이 없으셨고, 세유(世儒)들이 보통 말하는 부처의 화복 인과(禍福因果)의 말에도 이미 싫도록 들으시와 밝게 알으실 것이오매, 어찌 신 등의 말을 기다리오리까. 그러나, 구구한 작은 정성을 다하지 아니할 수 없사옵고, 기필코 청하는 일을 이룩하려고 하오매, 감히 두세 번 번독하오니, 이것이 어찌 우리 성상으로 하여금 거룩하고 밝으신 덕(德)을 손상하는 것이겠습니까.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역대 제왕(帝王)의 일은 본받을 만한 것도 있고, 경계할 만한 것도 있다고 하겠사옵니다. 부처를 섬기는 일은 이른바, 경계할 만한 것이오며,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온데, 한(漢)·당(唐) 이하의 현명(賢明)한 임금도 이 술책 속에 빠져서 천하와 국가를 뒤집어 엎은 자가 진실로 한둘로 헤아릴 수 없으니, 양(梁) 무제(武帝)제 양왕(齊襄王)과 같은 이는 더욱 경계할 만한 자이옵니다. 그 사이에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정도(正道)를 붙들어 세운 자도 한둘로 헤아릴 수는 없사오나, 부혁(傅奕)의 상소에 좇아 승니(僧尼)와 도사(道士)를 사태(沙汰)시키어 강제로 고향으로 돌려보낸 당(唐) 고조(高祖)와, 최호(崔浩)의 간하는 말을 듣고 사문(沙門)을 베고 불서(佛書)와 불상(佛像)을 헐어 버린 위(魏) 무제(武帝)와 같은 이는 진실로 본받을 만한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경계할 만한 것은 경계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본받을 것을 본받지 아니하시옵니까. 신 등은 후세에서 지금의 일을 보기를, 지금에서 옛일을 보는 것처럼 옳고 그름을 비평할까 두렵습니다. 또, 천하에서 모두 불교를 숭상하더라도, 작은 나라에서 홀로 성인(聖人)의 도를 따르는 것이 어찌 불가함이 있사오리까. 우리 나라는 땅이 적어서 재물과 세금의 나오는 것이 한도가 있사온데, 대국을 섬기고 인국을 사귀는 비용과 제사·잔치·군사의 일과 손님 접대 등의 모든 경비가 심히 많사오니, 한도가 있는 재물로써 한정 없는 비용을 맞추자면 오히려 부족하온데, 유익 없는 비용을 더하오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신 등이 물러가서 되풀이해 생각하와도, 성상께서의 이번 거사는 하나도 옳은 것이 없고, 옳지 못한 것은 다섯 가지가 있사오니, 신이 하나하나 아뢰기를 청하옵니다. 예전부터 간하는 말을 듣는 임금이 있으면, 용감하게 간하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순(舜)우(禹)에게 고하기를, ‘내가 잘못이 있거든 네가 도와 바르게 하라. ’고 하였고, 을 경계하기를, ‘간하는 말을 널리 받아들이소서. ’라고 하였으며, 고종(高宗)부열(傅說)에게 명하기를, ‘아침저녁으로 가르침을 바쳐서 나를 도우라. ’고 하였고, 부열고종에게 경계하기를, ‘간하는 말을 좇으면 거룩할 것입니다. ’고 하였사오니, 당(唐)·우(虞) 삼대(三代)의 임금은 번갈아 서로 경계하여, 알면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말하면 듣지 아니함이 없었던 까닭에 마침내 화하고 밝은 태평시대의 정치를 이루었습니다. 만약 스스로 잘난 체하여 천 리(千里) 밖에서 사람을 거절하면,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는 날마다 나아가고, 충성된 말과 바른 의논을 하는 자는 입을 닫고 혀를 놀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지금의 사대부(士大夫)들 중에 임금 앞에서 잘못을 용감하게 반대하고 간하는 자가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비록 얼굴 빛을 부드럽게 하고 공정한 마음으로 받아들일지라도 오히려 두려워하여 말하지 아니하옵거늘, 하물며 지금의 이 일은, 간하는 자가 더욱 많사오나 윤허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였사오니, 신 등은 또한 아첨하는 풍속을 이루어 국가의 일이 장차 날마다 그릇될까 두려운 것이, 그 불가한 것의 하나입니다.

옛적 당(唐)나라위징(魏徵)태종(太宗)에게 간하기를, ‘정관(貞觀)185) 초기에는 절약과 검소에 뜻을 두고 간하는 말을 구하기를 게을리 아니하옵더니, 근래에는 영선(營繕)하는 일이 조금 많고, 간하는 자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하였으니, 위징의 이 말이 비록 태종을 위한 말이오나, 진실로 국가를 가진 임금의 공통된 병통이옵니다. 전하께옵서 태조태종의 이룩하신 법을 따르시고, 더욱 징태(澄汰)186) 하는 법을 더하여, 머리 깎은 무리들을 나라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니, 무릇 보고 듣는 이의 마음과 눈을 쾌하게 하고, 자손 만대(子孫萬代)의 법으로 삼게 하시매, 사대부의 유식한 이가 우러러 사모하고 본받아서, 무릇 상장(喪葬)에는 일체 가례(家禮)에 의하여 행하고 불사(佛事)를 행하지 아니하와, 옛 풍속으로 거의 일신(一新)되었사온데, 신 등은 다만 효령 대군이 끝내 미혹(迷惑)하여 깨닫지 못함을 근심하옵더니, 전하께서 일조에 옛 법을 어기고 처음 마음을 저버리시기를 이처럼 할 줄을 어찌 뜻하였사오리까. 이는 법이 행하지 못함이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위에서 좋아하는 이가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한 이가 있다. ’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성안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면 사방에서 높이를 한 자로 한다. ’고 하였거늘, 이제 대군이 주창하고 전하께서 따르시면, 일국의 신민들이 반드시 장차 이르기를, ‘우리 전하의 착하심과 대군의 어지심으로도 오히려 신봉(信奉)하시거늘,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홀로 그렇게 아니하랴.’ 하고, 다투어 서로 시주하여 혹 뒤질까 두려워할 것이오매, 불교가 다시 일어남은 반드시 멀지 않을 것이오니, 그 옳지 못함의 하나입니다.

당(唐) 무종(武宗)이 절을 폐하고 중의 머리털을 기르게 하였는데, 선종(宣宗)이 장차 중을 다시 회복시키고 절을 다시 수리하고자 하매, 손초(孫樵)가 말을 올리기를, ‘백성들이 농사짓고 길쌈하여도 자신은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지 못하는데, 여러 중들은 좋은 집에 편히 앉아서 좋은 옷과 밥을 먹으매, 열 집에서 중 한 사람을 기르지 못하오니, 무종(武宗)께서 그러함을 분하게 여겨 17만 승도의 머리를 기르게 하였으니, 이는 1백 70만 호를 살리는 것입니다. 폐하는 어찌하여 이미 폐한 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옵니까.’ 하였고, 치당(致堂) 호씨(胡氏)가 의논하기를, ‘불교가 생민에게 유익함이 있으면 비록 1백 70만 호로써 17만의 중을 기를지라도 진실로 아까울 것이 없다. 왜 그런가, 허비되는 것은 재물이지만 얻는 것은 착한 도(道)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들은 윤상(倫常)을 없애고 인도(人道)를 해치니, 비록 바람을 마시고 이슬을 먹으며, 나무에서 살고 들에서 거처할지라도 오히려 폐할 것인데, 하물며 화려한 집과 좋은 음식으로써 놀고 게으른 자를 기를 것인가. 이는 착하고 밝은 제왕(帝王)의 반드시 없애야 할 것이다.’ 하였으니, 신 등은 일찍이 지당한 의논이라고 생각하옵고, 이를 애송(愛誦)한 지 오래였습니다. 이제 팔면벽(八面壁)에 등롱(燈籠)과 화촉(花燭)을 배치하고 1백 8명의 중을 밥 먹여서 5일 동안 경(經)을 읽으면, 허비되는 바가 적지 아니하온데 오히려 적다고 하시면, 무릇 부처를 받드는 일을 일체 저들의 말과 같이 한 뒤에야 말 것이옵니까. 바람과 이슬이 아니오면 비록 한 되의 쌀, 한 자의 베일지라도 오히려 불가하옵거늘, 하물며 이 같은 비용이오리까. 부처는 청정과욕(淸淨寡慾)으로 종지(宗旨)를 삼았는데, 후세에 그 교도(敎徒)가 된 자는 그 스승의 말을 팔아서 크고 사치하기에 힘써서 구복(口腹)을 채우기를 꾀하였으니, 그 옳지 못한 것의 하나입니다.

송(宋)나라 이항(李沆)왕 승상(王丞相)에게 이르기를, ‘이제 천하가 무사(無事)하여 성인(聖人)이 마음을 쓸 것이 없으나, 만일 사이(四夷)를 섬기고 불로(佛老)에 혹하면 근심스럽다. ’고 하였는데, 그 뒤에 모두 그 말과 같았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이것을 작은 일이라 말할 것이 못된다고 하시니, 어찌 거룩한 정치에 누(累)가 있지 아니하오리까. 계축년에 군사를 쓴 이후로 서북(西北) 국경이 소연(騷然)하온데, 더구나 성을 쌓는 일로 백성을 옮겨서 사망한 자가 퍽 많으므로, 그 팔을 분질러 도피하는 자까지 있사옵고, 인하여 수재와 한재로 창고가 비었으니, 비록 공법(貢法)을 써서 채울지라도 하민(下民)의 생활이 한심스럽사오매, 나라가 무사하다고 이를 수 없사온데, 이즘은 야인들의 왕래가 예전에 비하여 갑절이 되오니, 사이(四夷)를 섬긴다고 한 말이 이미 실증되었습니다. 또 큰 도시 가운데 저 놀고 먹는 무리들을 모아서 대회(大會)를 베풀면, 부처에게 혹하는 단서도 오늘날에 싹틀 것이오니, 그 옳지 못한 것의 하나입니다.

금(金)나라 세종(世宗)이 재신(宰臣)에게 이르기를, ‘짐(朕)이 천하를 다스리기를 경들과 더불어 함께 하는데, 일이 옳지 못함이 있거든 각각 대변하여 아뢰어서 짐이 부족함을 돕고, 아첨하여 용납되기를 취하는 일은 삼가서 하지 말지어다. 진실로 혹 일시의 안락을 탐하고 스스로 편함을 생각하면, 비록 오늘날의 행복은 될지라도 후세에서 어떻다고 할 것인가.’ 하고, 또 이르기를, ‘불교에 이르러서는 더욱 믿을 수 없다. 양(梁)나라 무제(武帝)동태사(同泰寺)의 종[奴]이 되며, 요(遼)나라 도종(道宗)이 민호(民戶)를 사승(寺僧)에게 주고, 다시 삼공(三公)의 벼슬을 더한 것은 혹함이 심하다. ’고 하였으니, 이미 능히 간함을 좋아하고 또 불교를 배척하기를 이처럼 하였으니, 진실로 삼대(三代) 이하의 어진 임금입니다. 전하께서 무릇 시행하시는 바를 모두 요(堯)·순(舜)을 본받으옵거늘, 유독 이 한 가지 일에는 도리어 금나라 세종(世宗)의 밑에 있사옵니까. 대저 말을 올리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옵고 말을 듣는 것이 어렵사온데, 전하께서 이미 신 등의 말을 옳다고 하셨으면, 기꺼이 듣고 고치실 것을 거의 바라옵더니, 또 교시하시기를, ‘이 일은 이미 결정하였으니 다시 고칠 수 없다. ’고 하시니, 신 등은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이것이 그 옳지 못한 것의 하나입니다.

신 등은 하치않은 소유(小儒)로서 비록 천의(天意)를 돌이킬 힘이 없사오나, 대강 성현(聖賢)의 글을 읽어, 부처의 허탄하고 망령됨을 이미 분변하기를 자세히 하였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작은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급히 정파(停罷)하시기를 명하사, 민생의 좀[蠧]을 없애고, 만세에 법을 드리옵소서."

하니, 임금이 상소를 보고 이르기를,

"옛적 우리 태조께서 이미 사리각을 창건하시고, 또 경찬회를 베풀었으므로 나도 전의 법을 따라 수리한 것인데, 어찌 두세 번 진청(陳請)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들이 만약 나의 잘못을 바로 지적하여 극진하게 의논하면, 말한 바가 비록 지나칠지라도 내가 어찌 감히 비난하랴. 전번의 상소에 있기를, ‘낙천정(樂天亭)풍양궁(豊壤宮)은 묵어서 풀이 무성하다. ’고 하였으나, 내가 낙천정풍양궁은 선왕(先王)의 노닐던 곳이라 하여 이미 소제(掃除)하는 사람을 정하고, 관리를 보내어 감독하게 하였으며, 인해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분장(分掌)하여 수리하게 하여, 그 절목(節目)이 이미 영갑(令甲)에 있으니, 상시로 거처하지 아니하는 곳은 이것만으로도 가한데, 다시 어떻게 할 것이냐. 이번 상소에 또 이르기를, ‘계축년에 군사를 쓴 이후로 창고가 비어서, 공법(貢法)을 세워 채웠다. ’고 하니, 너희들의 생각에는 내가 백성에게 많이 받아서 국가의 경비를 풍부하게 했다고 여기느냐. 내가 손실법(損實法)이 적중하지 못하여 백성의 원망이 많기 때문에 ‘공법’을 시험하여 손실법의 폐을 없애고 민생을 편리하게 하고자 했을 뿐이다. 너희들은 근신(近臣)인데도 아직 나의 뜻을 모르니, 저 무지한 백성들이야 무엇이 괴이하겠느냐. 이 두 가지는 모두 사실이 아니고, 또 불교를 물리치는 데 관계되지 아니하거늘, 어찌하여 아울러 말하였느냐."

하니, 직제학(直提學) 유의손(柳義孫) 등이 대답하기를,

"낙천정풍양궁을 항상 수리한다는 것은 신 등이 일찍이 알지 못하였으며, 공법(貢法)도 나라의 경비를 풍부하게 함이 아니오나, 신 등이 기필코 청하는 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말이 이에 이른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옵고, 신 등의 뜻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니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말을 올릴 적에 혹 실정에 지나치는 것이 있으나, 너희들이 무슨 다른 뜻이 있어서 말한 것이겠느냐.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였다. 집현전에서 상소할 적에 도승지 조서강이 그 상소를 읽었는데, 비웃기를,

"유자(儒者)가 이런 말을 하는구나. 유자가 이런 말을 하는구나."

하니, 집현전에서 서강에게 글을 보내기를,

"무릇 대언(代言)은 후설(喉舌)의 직책이매 호령이 거기에서 나오므로, 언로(言路)의 통하고 막힘과 정치의 성하고 쇠함이 매었으니, 순(舜)용(龍)에게 명하기를, ‘너로 납언(納言)을 삼노니, 밤낮으로 짐(朕)의 명을 출납하되, 오직 진실하라.’ 하였고, 고종(高宗)부열(傅說)에게 명하여 좌우에 두고 이르기를, ‘아침저녁으로 가르치는 말을 바쳐서 나의 덕을 도우라. 약이 독하지 아니하면 병이 낫지 아니하느니라.’ 하였으니, 옛 성왕(聖王)이 벼슬을 임명하여 책임을 맡기는 뜻이 이처럼 중하니, 진실로 마땅히 정밀하고 명백하기에 공경히 힘쓰고, 명령의 순함과 거스림을 반드시 마땅히 살펴서, 순하게 바루고 구(救)하여 하나의 호령이라도 바르지 아니함이 없은 뒤에야 비로소 위임한 중책(重責)을 저버리지 아니함이 될 것이니, 어찌 쉽게 할 것입니까. 합하(閤下)는 은대(銀臺)187) 를 거느리는 내상(內相)이 되어 출납(出納)의 임무를 오로지하오니, 배운 바를 펴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백성에게 덕을 입히게 함이 이때입니다. 무릇 불교의 해(害)는 선유(先儒)들이 말을 자세히 하였으니, 합하는 고인(古人)의 글을 읽고 고인의 뜻을 숭상해야 하거늘, 어찌 그 행할 수 없음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근일에 흥천사 경찬회의 일을, 무릇 귀와 눈이 있는 이는 놀라지 아니하는 이가 없는데, 합하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제 아무 등[某等]이 이 일을 파하기를 청할 때에 합하가 갑자기 말하기를, ‘이 일은 이미 결정하였으니 중지할 수 없으며, 또 쓸 물건을 이미 준비하였는데, 만약 버리고 쓰지 아니하면 바로 포진천물(暴殄天物)188) 이 된다. ’고 하였으니, 우리들은 그윽이 의혹됩니다. 또 합하가 이른바, ‘포진천물’이라 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백성의 고혈(膏血)을 취하여 쓸데없는 곳에 버리는 것은 ‘포진천물’이라고 아니하고, 도리어 헛 비용을 줄여서 국가의 경비에 보충하는 것을 ‘포진천물’이라고 합니까. 우리들은 윤허를 받지 못하여 모두 분울(憤鬱)함을 품고 혹은 입으로, 혹은 글로써 기필코 청하는 일을 이룩하려고 하는데, 합하는 아첨하는 말을 만들어서 첫 번째에도 ‘유자(儒者)가 이런 말을 하는가.’ 하고, 두 번째에도 ‘유자가 이런 말을 하는가.’ 하시니, 합하는 유자에게 어찌하여 소외(疎外)하기를 이처럼 하십니까. 합하는 우리들을 가리켜 오유(迂儒)라 여기고, 미친 소리를 한다고 하실런지 알지 못하겠으나, 그윽이 합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양(楊)·묵(墨)189) 의 해(害)가 신(申)·한(韓)190) 보다 심하고, 불(佛)·로(老)의 해가 ·보다 심하다. ’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능히 ·을 말로 막는 자는 성인(聖人)의 무리다. ’라고 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합하는 충성된 정성을 분발하여 살펴 아뢰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윤허를 얻게 하면, 사문(斯文)의 다행일 뿐 아니라, 실로 우리 국가의 무궁한 복이 되오니, 합하는 굽어살피소서."

하니, 서강이 그 글을 숨기고 남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94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책 374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정론(政論)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재정-전세(田稅)

  • [註 185]
    정관(貞觀) : 당 태종의 연호(年號).
  • [註 186]
    징태(澄汰) : 깨끗하게 씻어버림.
  • [註 187]
    은대(銀臺) : 승정원.
  • [註 188]
    포진천물(暴殄天物) : 물건을 함부로 버림.
  • [註 189]
    양(楊)·묵(墨) : 양주(楊朱)와 묵적(墨翟).
  • [註 190]
    신(申)·한(韓) : 신불해(申不害)와 한비(韓非).

○丁丑/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上疏曰:

臣等於本月十日, 具疏請罷興天舍利塔慶讃會, 傳旨若曰: "自以來歷代君主, 莫不事佛, 予亦爲之。" 臣等聞命以還, 不勝憤咽。 翼日又口陳其意, 傳旨又曰: "爾等所言, 皆予所知。 古稱我國小如蓼葉, 佛法遍天下, 小邦何獨不爲?" 臣等聞命, 尤切驚駭。 殿下聰明睿智, 天縱聖學, 六經史籍, 靡不講究, 其於世儒常談佛氏禍福因果之說, 固已飫聞而灼知矣。 奚待臣等之言? 然區區寸懇, 不得不爾, 期於得請, 敢避再三之瀆, 俾我聖上虧玷聖明之德哉? 臣等竊謂歷代帝王之事, 有可法者, 有可戒者。 若事佛, 所謂可戒者也, 非可法者也。 以下明君賢主, 亦陷於術中, 以傾覆天下國家者, 固非一二計, 而若 齊襄者尤其可戒者也。 其間排斥異端, 扶植正道者, 亦非一二計, 而從傅弈之疏, 沙汰僧尼道士, 勒還鄕里若 高祖; 聽崔浩之諫, 誅沙門毁佛書佛像若 武帝者, 此誠可法者也, 殿下何不戒其可戒者, 而反不法其可法者乎? 臣等恐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也。 且天下皆崇佛敎, 而小國獨遵聖人之道, 有何不可? 我國褊小, 財賦之出有限, 而事大交隣祭祀燕享軍旅賓客凡諸調度甚廣。 以有限之財, 應無窮之用, 猶且不給, 而加以無益之費, 其將奈何? 臣等退而反覆籌之, 聖上此擧, 無一可者, 而其不可者有五, 臣請一一言之。 自古有聽諫之君則有敢諫之臣。 之告曰: "予違, 汝弼。", 而之戒曰: "敷納以言。" 高宗之命傅說曰: "朝夕納誨。", 而之戒高宗曰: "從諫則聖。" 三代之君, 更相戒勑, 知無不言, 言無不聽, 故卒成雍熙泰和之治。 若訑訑之聲色, 拒人於千里之外, 則讒諂面諛者日進, 而忠言讜論者鉗口結舌矣。 方今士大夫面折廷爭, 牽裾折檻者, 有幾人乎? 雖借顔色, 虛懷以納之, 猶恐不言, 況今此事, 諫之者愈多, 而兪音未聞, 臣等亦恐諛侫成風, 而國家之事, 將日非矣。 其不可者一也。 昔 魏徵太宗曰: "貞觀之初, 志在節儉, 求諫不倦, 比來營繕微多, 諫者忤旨。" 之此言, 雖爲太宗而發, 實有國家者通患也。 殿下遵太祖太宗之成憲, 益加澄汰之法, 至令髡徒不入國中, 凡有見聞, 快於心目, 以爲子孫萬世之儀刑。 士大夫有識者歆慕效之, 凡喪葬一依《家禮》, 不作佛事, 庶幾舊俗之一新。 臣等只患孝寧大君終迷而不悟, 豈意殿下一朝違舊章負初心如此乎? 是則法之不行, 自此始也。 古人云: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 又云: "城中好高髻, 四方高一尺。" 今大君倡之, 而殿下從之, 則一國臣民必將謂曰: "以吾殿下之聖、大君之賢而猶且信奉, 我輩何人, 獨不然乎? 爭相捨施, 猶恐或後, 佛法之復興, 必無日矣, 其不可者一也。 武宗廢寺髮僧, 宣宗將欲復僧修寺, 孫樵上言曰: "百姓耕織, 不自溫飽, 而群僧安坐華屋, 美衣精饌, 十戶不能養一僧。 武宗憤其然, 髮十七萬僧, 是蘇息百七萬戶也。 陛下奈何興之於已廢乎?" 致堂 胡氏議之曰: "使佛敎有益於生人, 雖以百七萬戶養十七萬僧, 誠不足愛。 何者? 所費者財力, 而所資者善道。 惟其殄滅彝倫, 戕敗人理, 雖飮風吸露, 巢居野處, 猶將廢之, 況華屋精饌, 以養游惰乎? 此聖帝明王之所必除。" 臣等嘗以爲至論, 誦此久矣。 今之八面壁, 排燈籠花燭, 飯僧百八, 五日轉經, 所費不貲, 而猶以爲少, 則凡奉佛之事, 一如彼說, 然後已乎? 自非風露, 雖一升米一尺布, 猶且不可, 況如此之費乎? 佛者以淸淨寡欲爲宗, 後世爲其徒者售其師說, 務其侈大, 以資口腹之計耳, 其不可者一也。 李沆王丞相曰: "今天下無事, 聖人無所用心, 萬一事四夷惑佛、老, 卽可憂也。" 厥後皆如其言。 今殿下每以此爲小事, 不足言也, 無奈有累於盛治耶? 自癸丑用兵以來, 西北騷然, 加以築城徙民, 死亡頗多, 至有折其臂而避之者。 因而水旱凶荒, 倉廩虛渴, 雖立貢法以充之, 下民之生, 可爲寒心, 亦不可謂之無事也, 而間者野人往來, 比舊爲倍。 事四夷則已驗矣, 又於大都之中, 聚彼游手, 以設大會, 則惑佛之端, 亦或萌於今日矣, 其不可者一也。 金世宗謂宰臣曰: "朕治天下, 與卿等共之, 事有不可, 各當面陳, 以補朕之不逮, 愼勿阿諛取容。 苟或偸安自便, 雖爲今日之幸, 後世以爲何如?" 又曰: "至於佛法, 尤所不信。 武帝同泰寺奴; 道宗以民戶賜寺僧, 復加以三公之官, 惑之甚矣。" 旣能好諫, 而又能斥佛如是, 誠三代以下之賢主也。 殿下凡所施爲, 動法, 獨此一事, 反居世宗之(之)下乎? 大抵進言非難, 而聽言爲難。 殿下旣以臣等之言爲是, 則庶幾樂聞而改之, 又敎之曰: "此事已定, 不可追改。" 臣等尤切痛心, 其不可者一也。 臣等, 猥瑣小儒, 雖乏回天之力, 然粗讀聖賢之書, 其於佛氏之誕妄, 因已辨之詳矣。 伏望洞照微懇, 亟命停罷, 以除生民之蠧, 以垂萬世之法。

上覽疏曰: "昔我太祖旣創舍利閣, 又設慶讃會, 予亦因前規修之耳, 何必再三陳請乎? 爾等若直指予極論之, 則所言雖過, 予何敢非之? 前疏有云: ‘樂天亭豐壤宮, 鞠爲茂草。’ 予以樂天豐壤, 先王遊衍之處, 旣定掃除之人, 遣官監之, 仍令繕工分掌修葺, 其節目已在令甲。 不常臨御之處, 如此而已可也, 更何爲哉? 今疏又云: ‘自癸丑用兵以來, 倉廩虛竭, 乃立貢法以充之。’ 爾等以予爲多取於民而富其國乎? 予以損實之法不中, 民多怨咨, 故試驗貢法, 以除損實之弊, 以便民生耳。 爾等, 近臣也, 尙未知予意, 彼無知百姓, 何足怪哉? 此二者皆非實事, 而又不干於闢佛也, 何以幷及之乎?" 直提學柳義孫等對曰: "樂天亭豐壤宮之常加修治, 臣等未嘗知也, 貢法亦非爲富國也。 臣等期於得請, 不覺言之至此, 臣等之意, 不如是也。" 上曰: "凡進言或有過情者, 爾等有何他意而言之? 予已知之矣。" 集賢殿之上疏也, 都承旨趙瑞康讀其疏, 非笑之曰: "儒者有是言也, 儒者有是言也。" 集賢殿致書瑞康曰:

夫代言, 喉舌之職, 號令之所從出, 言路之通塞、治道之隆替係焉。 曰: "汝作納言, 夙夜出納朕命惟允。" 高宗傅說置左右曰: "朝夕納誨, 以輔台德。 若藥不瞑眩, 厥疾不瘳。" 古之聖王所以命官責任之意, 如此其重, 居是職者, 固宜祗勵精白, 命令復逆, 必當審之, 將順匡救, 一號一令, 罔敢不正, 然後始爲不負委任之重, 其可易而爲之哉? 閤下摠銀臺爲內相, 專出納之任, 展布所學, 致君澤民, 此其時也。 夫佛氏之害, 先儒言之詳矣。 閤下讀古人之書, 尙古人之志, 豈不知其不可乎! 近日興天慶讃之事, 凡有耳目, 莫不驚駭, 閤下以爲何如! 昨者某等以此事請罷之時, 閤下卒然曰: "此事業已定矣, 不可中止。 且供用已辦, 若棄而不用, 卽爲暴殄天物。" 某等竊惑焉。 且閤下所謂暴殄天物, 何耶, 取民膏血, 棄之無用之地, 不以爲暴殄, 而反以省浮費充國用爲暴殄歟? 某等未蒙兪允, 咸懷憤鬱, 或口或疏, 期於得請, 而閤下乃作諛辭, 一則曰儒者有是言也, 二則曰儒者有是言也。 閤下獨於儒者, 何外之之如是歟? 不識閤下指某等爲迂儒歟? 指某等爲狂言歟? 竊爲閤下惜之。 先儒謂之害, 甚於; 佛、之害, 甚於, 而又言: "能言拒者, 聖人之徒也。" 伏惟閤下, 奮其忠懇, 善爲敷奏, 俾某等得蒙允許, 則豈惟斯文之幸? 實我國家萬世無疆之福也。 閤下垂察焉。

瑞康匿其書, 不使人知之。


  • 【태백산사고본】 30책 94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책 374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정론(政論)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재정-전세(田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