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각 경찬회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헌부의 상소문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하의 도(道)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의 두 가지가 있을 뿐이옵니다. 옳은 것이 이기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그른 것이 이기면 나라가 어지러워지오니, 다스려지는 것과 도(道)를 같이 하면 나라가 일어나지 아니함이 없고, 어지러워지는 것과 일을 같이 하면 이와 반대가 되는 것이니, 국가의 흥망과 세도(世道)의 오르내림은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달려 있을 뿐이옵니다. 삼대(三代)의 융성한 시대에는 본디 이단(異端)이 없었고, 사도(斯道)170) 가 해가 중천에 있는 것처럼 밝아서 국가가 항상 다스려지고 오래 태평하였사온데, 주(周)나라가 쇠하게 되매 양주(楊朱)·묵적(墨翟)의 말이 천하에 가득 찼었으나, 그때에는 맹자와 같은 성인(聖人)이 있어서 말로 깨우쳐서 이를 물리쳤습니다. 진(秦)·한(漢)으로 내려오면서 이단이 사방에서 일어나, 다스려진 때는 항상 적고 어지러운 때는 항상 많았습니다. 불교(佛敎)는 이치로는 근사하오나, 그 해(害)는 더욱 심하옴은 선유(先儒)들이 일찍이 논평하였고, 그 요망 허탄하고 허무(虛無)하여, 인류를 멸절(滅絶)하고 생민의 해충(害蟲)이 되는 것을 전하께서 밝게 보시고 묵묵히 인식하시는 바이오니, 어찌 신 등의 밝게 분변함을 기다리오리까.
우리 동방(東方)의 이미 지나간 자취로써 증험하옵건대, 신라의 말기에 불교를 신앙하여 절을 많이 창건하므로 민가(民家)와 비교하면 절이 더 많이 있었더니, 그 뒤가 좋지 못하였으며, 고려는 신라의 뒤를 이어 술사(術士)들이 말을 올리기를, ‘아무 곳에 절을 창건한다면, 나라에 유익하고 백성이 편안하다. ’고 하면, 즉시 절을 세워서 토지와 종을 거기에 귀속시키니, 말류(末流)의 폐단은 왕궁(王宮) 안에까지 절을 두고 중을 맞아 들였으며, 사대부의 집에서도 사사로이 절을 창건하여 원당(願堂)이라고 일컫고, 중을 존경하며 좋은 이름을 더하여 왕사(王師)·국사(國師)를 봉하고도 오히려 지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에 왕실(王室)의 자제와 진신(搢紳)의 자손들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큰 절에 머물면서 거처와 의식(衣食)을 왕후(王侯)에 비기며, 사치가 극도에 이르러 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는다면 중이 되기를 원하고, 인과보응(因果報應)의 말이 성행(盛行)하여, 국가에서 해마다 대회(大會)를 베풀고, 만승천자(萬乘天子)로서 지존(至尊)의 자리를 스스로 가볍게 하여, 이마를 조아리며 밑에서 절하며 높은 이와 낮은 이가 지위를 바꾸니, 그 밑에서는 따라서 집집마다 절을 창건하고 불상(佛像)을 만들고 그려서, 설회 요복(說會要福)171) 이라고 말하여, 농부(農夫)와 직녀(織女)가 고생으로 모은 재물을 부처에게 공양(供養)하고 중에게 밥먹이는 비용으로 다 들어가오니, 생산은 적고 쓰임은 많아서 백성이 생활이 곤궁하고 창고가 비어서 다시 할 수 없었는데, 어지러움이 극하면 반드시 다스려지므로, 좋은 운수가 돌아와서 태조 강헌 대왕께옵서 운(運)에 응하여 개국(開國)하사, 맨 먼저 이 폐단을 개혁하였습니다.
그러나 《역경(易經)》의, ‘조금 바루면 길하다.[小貞之吉]’는 뜻을 몸받고, 다 고치지 못하여 오히려 의심스러운 바가 있사옵더니, 태종 문무 광효 대왕(太宗文武光孝大王)께서 영명(英明)한 자질과 세상에 뛰어난 식견으로써 큰 업적을 이으사, 전대(前代)의 폐단을 깊이 경계하여 절을 많이 없애고 그 전토와 종을 혁파하며, 왕사(王師)·국사(國師)를 봉하는 칭호를 비로소 없애고, 엄하게 법도를 세워서 절을 창건하고 부처를 만들며 회(會)를 베풀어 허비하는 일을 일체 엄금하시니, 인과보응(因果報應)의 허탄한 말이 비로소 지식되고, 우리의 유도(儒道)가 다시 밝아지매 군자(君子)는 대도(大道)의 요지(要旨)를 깨닫고, 소인(小人)은 지극히 다스려진 덕택을 입었습니다. 경자년에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헌릉(獻陵) 곁에 절을 세우고 명복(冥福)을 빌기를 청하였으나, 태종께서 영단(英斷)을 내리사 여러 논의를 배척하고 세우지 못하게 하셨으니, 후세를 위하시는 생각이 극진하셨사오매, 태종의 성덕과 신공(神功)은 지극하지 않으신 바가 없사와 광대함을 이름하기 어렵사오나, 불교(佛敎)를 배척한 일은 사도(斯道)와 사민(斯民)에게 더욱 유익하오니, 이른바, ‘공(功)이 우(禹)에 못하지 아니하며, 우리의 결점을 지적할 수 없다. ’고 할 만하옵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왕(聖王)이시며, 밝으신 학문으로써 전대(前代)의 빛나는 공업(功業)을 이으사,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고 정치의 도(道)를 강론(講論)하시며, 절을 모두 개혁하여, 중[僧] 가운데 서로 전하는 법손 노비(法孫奴婢)를 모두 관청에 붙이고, 또 절의 수(數)를 감하여 오교 양종(五敎兩宗)을 이종(二宗)으로 줄이며, 서울에는 태조께서 창건하신 두 절만 두고, 나머지는 모두 혁파(革罷)하여 헐어서 관부(官府)로 삼고, 불상(佛像)과 종경(鍾磬)은 녹여서 병기(兵器)를 만들며, 훈수(薰修)172) 와 설재(設齋)하는 비용을 없애고 수륙재(水陸齋)의 제도를 만들며, 불공(佛供)과 천망(薦亡)173) 의 찬물(饌物)을 품(品)에 따라 수량을 정하여 검약(儉約)하기에 힘쓰며, 불사(佛事)의 금령(禁令)을 거듭 밝혀서 《육전(六典)》에 실었사오매, 승도(僧徒)들이 발을 용납할 수 없어, 몇 해를 나가지 아니하여 스스로 멸망함에 이르러, 삼대(三代)의 거룩한 시대를 거의 다시 볼까 하옵더니, 뜻밖에 효령 대군(孝寧大君)께서는 종실의 어른이시며 고명한 재주로써 그릇 허탄한 말을 믿고, 일찍이 한강 가에서 무차회(無遮會)를 베푸니 사녀(士女)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보고 듣는 이가 부러워하고 사모하며, 배에 밥을 싣고 강 가운데 던져서 고기들에게 먹이며, 무지한 중 행호(行乎)를 존경하여 종실의 높은 어른으로써 무릎을 꿇어 예배(禮拜)하며 종실을 권유하고, 아래로는 장사치들까지 재물을 내게 하여 없어진 절을 보수해 일으켜서 환하게 새롭게 하였으며, 부처를 만들고 불경을 박으며 안거회(安居會)를 베푸는 등의 일을 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으니, 무뢰승(無賴僧)들과 장사치들이 의지하고 붙따르며, 절 현판 위에 특서(特書)하기를, ‘시주(施主) 효령 대군’이라고 써서 장사치의 천한 무리들 사이에 함께 벌여 있사오니, 무릇 보고 듣기에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오리까. 신 등은 그윽이 염려하건대, 이단(異端)이 다시 일어남은 반드시 대군으로부터 다시 싹틀까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대의(大義)로써 간절히 꾸짖으시고, 세상을 미혹하여 거룩한 교화(敎化)에 누(累)가 됨이 없게 하소서.
흥천사 사리각에 이르러서는, 태조께서 창건하신 바이온데, 여러 해를 지나서 거의 쓰러지게 되었으므로 전하께서 조종(祖宗)을 존경하시는 정성으로써, 선조를 사모하는 생각과 고향을 공경하시는 마음을 일으키사, 옛 터에 공인(工人)에게 수즙(修葺)하기를 명하시니, 승도(僧徒)들이 서로 경축하기를, ‘우리 불도가 다시 일어날 것을 눈을 닦고 귀를 기울이며 기대한다. ’고 하오니, 세상의 변천을 바라보고 식자(識者)들은 한스러워 하옵거늘, 이제 사리각에서 경찬대회(慶讚大會)를 성대히 베푸니 사방의 승도들이 좋아 날뛰며 구름처럼 모여서 번갈아 부르고 화답하오니, 어리석은 남녀들도 반드시 말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모임을 베풀고 부처를 섬기시기를 오히려 이처럼 하시니, 인과죄복(因果罪福)의 말이 어찌 허탄한 말일까.’ 하며, 보고 감동하여 사모함이 그림자와 메아리보다 빨라서, 재물과 힘을 다해 다투어 인연을 지어서 불교에 나아가기를, 물이 아래로 흘러 내리는 것같이 급하고 막을 수 없습니다. 또 사신(史臣)이 쓰기를, ‘아무 때에 아무 모임을 베풀었다. ’고 할 것이오매, 후세에서 반드시 빙자하여 구실을 삼을 것이며, 그 폐가 무궁하오니, 전조(前朝)의 지나간 자취를 또한 거울로 삼을 만하옵니다. 태종과 전하께서 고려 수백 년의 쌓은 폐단을 통쾌하게 개혁하사, 성대(盛代)의 영원한 강상(綱常)을 도와서 세우신 그 공이 어디에 있사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밝은 빛을 드리우시고 굳센 결단을 돌이키시와, 경찬회를 베푸는 허비를 급히 파하옵소서."
하였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94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책 371면
- 【분류】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정론(政論)
- [註 170]사도(斯道) : 유교(儒敎).
- [註 171]
○壬申/司憲府上疏曰:
臣等竊謂天下之道二, 是與非而已矣。 是者勝則治, 非者勝則亂。 與治同道則罔不興, 與亂同事則反是。 國家之興衰、世道之升降, 不越乎是與非而已。 三代盛時, 本無異端, 斯道如日中天, 國家常治久安, 及周之衰, 楊、朱、墨、翟之言盈天下。 時則有若孟子之聖, 辭而闢之。 秦、漢以降, 異端四起, 治日常少, 亂日常多。 佛氏之敎, 彌近理而其害尤甚, 先儒蓋嘗論之。 其妖誕虛無, 滅絶人類, 爲國家生民之蟊賊, 殿下所洞觀而默識也, 奚待臣等之明辨哉? 以吾東方旣往之迹驗之, 在新羅之季, 崇信佛氏, 多創塔廟, 比較民屋, 佛寺居多, 而不能善後。 高麗承新羅之後, 術士獻言, 於某地, 創置僧寺, 則可以利國安民, 隨卽營建, 屬其田民, 末流之弊, 至於王宮之內, 置寺邀僧; 士大夫之家, 私創寺宇, 稱爲願堂, 崇敬緇徒, 加之美號, 封爲王師國師, 猶恐未至。 於是王室子弟、縉紳子孫, 髡髮爲僧, 得住大刹, 居處衣食, 擬諸王侯, 窮奢極侈, 靡所不爲。 當世之人, 父母生子, 願爲之僧。 因果之說盛行, 國家歲設大會, 萬乘自輕至尊, 稽顙下拜, 尊卑易位。 其下化之, 家家創建僧寺, 塑畫佛像, 說會要福爲辭。 農夫織女辛苦所儲, 皆歸於供佛飯僧之費, 遊惰日增, 生寡用衆, 民生窮蹙, 倉廩虛竭, 無復可爲。 亂極當治, 天道好還, 太祖康獻大王應運開國, 首革此弊。 然體《易》小貞之吉, 未能盡革, 猶有可疑者焉。 太宗文武光孝大王以英明之資、高世之見, 纉承丕緖, 深創前代之弊, 沙汰寺額, 革其田民, 始去王師國師封君之號, 嚴立度法, 創寺造佛、設會糜費之事, 一切痛禁, 因果虛誕之說始息, 吾道復明, 君子得聞大道之要, 小人得蒙至治之澤。 歲在庚子, 擧國臣民, 請於獻陵之側, 營建佛寺, 以資冥福, 太宗出自英斷, 排斥群議, 勿令建置, 爲後世慮, 可謂至矣盡矣。 太宗聖德神功, 無所不至, 蕩蕩難名, 而斥佛之事, 尤有益於斯道斯民, 所謂功不在禹下, 吾無間然者也。 殿下以天縱之聖、緝熙之學, 光承前烈, 日開經筵, 講論治道, 盡革寺社奴婢, 僧中相傳法孫奴婢, 皆屬于公。 又減寺額, 五敎兩宗, 省爲二宗, 於京都只置太祖所創兩寺, 餘皆革罷, 毁爲官府; 佛像鍾磬, 鎔鑄爲兵。 又去薰修設齋之費, 制爲水陸之齋, 其供佛薦亡饌物, 隨品定數, 務從儉約, 申明佛事之禁, 載諸《六典》, 僧徒無容足, 不出數年, 自底滅亡, 庶幾復見三代之盛, 不意孝寧大君以宗室之長、高明之材, 誤信虛誕之說, 曾於漢江之濱, 辦設無遮之會, 士女雲集, 觀聽歆慕, 舟載飯食, 投之江中, 以施魚鰲。 尊敬無知行乎, 以宗室之尊, 屈膝禮拜, 勸誘宗室, 下至商賈之徒, 俾出財産, 興補亡寺, 煥然一新, 造佛印經, 安居設會等事, 無所不爲。 其無賴僧徒商賈之徒, 歸依趨附, 乃於僧舍板上, 特書曰: "施主孝寧大君。" 竝列於商賈賤隷之間, 凡在見聞, 寧不愧赧! 臣等竊恐異端之復興, 必自大君權輿也。 伏望殿下以義切責, 無俾世迷, 以累盛化。 至若興天寺舍利閣, 太祖所創, 累易星霜, 殆將傾危, 殿下以尊祖敬宗之誠, 興羹墻之慕、桑梓之敬, 因其舊基, 命工修葺, 僧徒相慶曰: "吾道復興。" 拭目傾耳, 觀望世變, 識者恨之。 今於舍利閣, 盛設慶讃大會, 四方僧徒, 鼓舞雲合, 更迭唱和, 愚夫愚婦必曰: "惟吾聖上設會事佛, 猶且如此。 因果罪福之說, 豈虛誕哉!" 觀瞻感慕, 捷於影響, 竭盡財力, 競進因緣, 趨向佛氏, 如水之就下, 莫之禁遏。 且史臣書之曰: "某時設某會。", 則後世必藉爲口實, 其弊無窮, 前朝之轍, 亦可鑑矣。 太宗與殿下, 痛革高麗數百年之積弊, 扶植盛代億萬歲之綱常, 其功安在? 伏望殿下, 垂離明之照, 回乾剛之斷, 亟罷設會之費。
不報。
- 【태백산사고본】 30책 94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책 371면
- 【분류】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정론(政論)
- [註 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