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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88권, 세종 22년 2월 23일 병신 4번째기사 1440년 명 정통(正統) 5년

호구법에 대한 것을 동반 6품, 서반 4품 이상에게 의논하도록 하다

전지(傳旨)하기를,

"생민(生民)의 수는 국가가 있는 자로서 마땅히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역대의 제왕들이 반드시 먼저 그 당대(當代)의 호구수(戶口數)를 상고하여 판적(版籍)에 기재하였는데, 그 법이 대(代)마다 같지 아니하였다. 주(周)나라 소사도(小司徒)의 직(職)이 토지를 고르게 하고 백성을 조사하여 그 수를 두루 알아서, 무릇 도역(徒役)을 일으킬 때에는 한 집에서 한 사람을 넘지 못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그대로 두었다가, 사냥할 때와 도적을 쫓거나 잡을 때에 모두 불러 썼다. 수(隋) 나라 때에 고영(高穎)이 수적법(輸籍法)을 세워 그 이름을 정하고 그 수(數)를 경감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부객(浮客)이 되게 하니, 부강(富强)한 집에서 그 태반의 부세(賦稅)를 거둠으로 인하여, 편맹(編氓)이 되어 봉공(奉公)하였는데 경감의 혜택을 받으니, 부객들이 모두 다 편호(編戶)로 돌아오게 되었고, 또 민부 시랑(民部侍郞) 배온(裵蘊)이 민간의 빠진 호구(戶口)와 속여서 등록한 노유(老幼)가 아직도 많으므로, 아뢰어서 외모를 조사하게 하여 만약 한 사람이라도 실상이 아니면 관사(官司)를 해직(解職)시키고, 또 백성들이 한 명이라도 고발하면, 그 고발당한 집이 대신 부역(賦役)을 바치게 하였는데, 그때에 여러 군(郡)에서 바친 회계가 장정[丁] 24만 3천이요, 새로 늘은 호구가 64만 1천 5백이었다. 당나라 무후(武后) 때에 평각사인 이교(李喬)가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백성의 수와 호구의 많은 것을 분명하게 하여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은 그 입적(入籍)을 밝히는 데 있을 뿐이니, 마땅히 어사(御史)로 하여금 독찰(督察)하고 검교(檢校)하게 하며, 금법(禁法)을 설정하여 방지하고 은덕(恩德)을 내려서 위무(慰撫)하며, 권형(權衡)을 실시하여 막게 하고 제한(制限)을 만들어서 통일한 연후에야, 도망한 자가 돌아올 것이고 떠돌아다니는 자가 없을 것이며, 호(戶)로서 빠지는 바가 없고 사람으로서 숨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송나라 천희(天禧) 5년에 여러 주현(州縣)에 조서(詔書)하기를, ‘이제부터 초래(招來)한 호구(戶口)로서 황전(荒田)을 개간한 자는 호적을 편입하고, 객호(客戶)로서 증수(增數)된 것은 편입하지 말라.’ 하였는데, 구제(舊制)에, 현리(縣吏)가 능히 호구를 증가시키면 현(縣)에서 즉시 펴 보이고 그 봉전(俸錢)을 더 주게 하였었다. 또 소흥(紹興) 5년에 여러 노(路)에 조서하기를, ‘잔폐(殘廢)된 주현에 친민관(親民官)이 도임(到任)하면 현존한 호구 실수(戶口實數)에 의거하여 상부의 인(印)을 맡고, 임기가 만료되는 날에도 역시 이와 같이 하여, 전최(殿最)에 상고하게 하라.’ 하였으니, 이로써 본다면, 역대의 법이 비록 때를 따라 제도를 달리 하였으나, 그 백성을 계산하여 호(戶)를 편성한 뜻은 같은 것이다.

우리 태조께서 고려판탕(板蕩)019) 한 뒤를 계승하시어, 백성이 항산(恒産)이 없고 호구가 날로 주는 것을 염려하시어 엄하게 호적법을 세우시고, 호적이 이룩된 뒤로부터 도망해 유이(流移)하는 자와 받아들여 숨겨 주는 자는 율(律)에 의하여 과죄(科罪)한다고 《원전(元典)》에 실었다.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서 또 인보 정장법(隣保正長法)을 세우시어 자세하게 단속하는 법을 더하여 유이(流移)하는 것을 금절(禁絶)하고, 《속전(續典)》에 실었다. 그런데도 유사(有司)가 봉행(奉行)하는 데 미진하여, 공사 천구(公私賤口)와 제색 군인(諸色軍人)이 서로 잇달아 도망하므로, 부득이하여 호패법(號牌法)을 의논하여 세워서 시행한 지 수년 만에 유이하고 도망하는 것이 좀 그쳤는데, 마침 해가 흉년이 들어 헌의(獻議)가 분분(紛紛)하므로, 이로 인하여 그 법을 혁파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본국이 태평한 지 오래 되어 인구가 늘어난 것이 전날의 배나 되지만, 적(籍)에 등록된 자는 적고 숨어 누락된 자가 10에 6, 7이나 되는데, 수령이 능히 다 알지 못하고 누락된 대로 보고하고, 감사도 역시 살피지 아니하고 그대로 보고하므로, 국가에서 캄캄하게 호구의 실수를 알지 못하니 정체(政體)에 어긋남이 있다. 실로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대신에게 물으니, 혹은 말하기를, ‘수령이 유심(留心)하여 살피면 어찌 호구의 수를 알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근년에 흉년으로 인하여 환자곡을 나누어 주어 구제할 때에 더 나타나는 것이 매우 많사오니, 수령으로 하여금 각년(各年)의 호구장(戶口帳)과 환자곡의 분급한 문안(文案)을 가지고 자세하게 살펴 마감(磨勘)하여, 매양 세초(歲抄)에 원래의 수, 늘은 수, 현존한 수, 도망하고 물고(物故)한 수를 갖추 기록하여 보고하게 하고, 또 감사로 하여금 전최(殿最)할 때마다 호구가 많이 늘은 자는 상등(上等)에 있게 하고, 감손(減損)된 자는 하등(下等)에 있게 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침착하고 자세하게 천천히 조사하게 하되, 만일 속성(速成)하려고만 힘써서 경동(驚動)하게 하고, 증감이 실상대로 되지 않았거나, 백성의 원망이 있게 하였거나, 더 나타난 것에 따라서 곧 역사(役使)를 행한 자는 율(律)에 의하여 중론(重論)하소서.’ 하였고, 또 말하기를, ‘호구법을 밝히려면 호패와 같은 것이 없사오나, 예전에 이미 시행하였다가 민심이 싫어하여 혁파하였는데, 이제 만약 다시 호패법을 세우려면, 더 늘어난 사람은 호적에만 기록하고 차역(差役)시키지 아니하면 백성의 수효를 거의 다 알 수 있고, 호패법도 시행될 것입니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수령의 포폄법(褒貶法)은 이미 《원전(元典)》에 기재되어 있으니 다시 논할 것은 없고, 다만 호패법은 시행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 민심이 싫어하기 때문에 혁파하였으므로 다시 시행하기 어려울 것 같사오니, 수령으로 하여금 각년(各年)의 호구장과 이래이거(移來移去)하고 생산 물고(生産物故)한 안(案)을 가지고 침착하고 자세하게 천천히 조사하게 하되 누락되지 않도록 기(期)하고, 속성(速成)하려고만 하여 놀라게 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고, 혹은 말하기를, ‘본국의 풍속이 아들, 사위가 많은 사람은 처가살이로 나가서 가원(家園) 안에 집을 짓고 사니, 만일 수령으로 하여금 비밀히 조사하여 마감(磨勘)하게 하고, 호구의 증감(增減)으로 등급을 매기면, 집을 파산하고 옮겨 가서 삶을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상시(常時)에 고찰할 적에 수령과 품관(品官)·아전[人吏]이 함께 통하고 숨기어 누락시켜 보고하지 않았거나, 혹은 백성을 침학(侵虐)하여 원망하고 이사하게 한 자는 엄중하게 법으로 징계하고, 만일 수리(水利)를 일으켰거나 묵은 땅을 개간하여, 백성을 불러 모아 경작할 것을 허락해서 호구를 늘린 자는 특별히 포상의 은전(恩典)을 더하소서.’ 하고, 혹 말하기를, ‘정구(丁口)를 다 알 수 있는 법은 인보법(隣保法)과 호패법(號牌法)만한 것이 없사온데, 이 법은 중국의 보갑법(保甲法)과 서로 같사오니, 청하옵건대, 이제부터 인보(隣保)의 영(令)을 엄하게 밝히고 다시 호패법을 거행하여, 호패로 인하여 나타나는 자는 별달리 타역(他役)을 정하지 말고, 또 속성(速成)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행한 지 오래되면 누락된 백성들이 모두 자연히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정구(丁口)를 다 아는 것은 형편이 어려울 것 같사오니, 청하옵건대, 감사로 하여금 그 주현(州縣)의 인물(人物)의 다소(多少)를 요량하여 군액(軍額)을 배로 정하게 하면, 인정(人丁)이 자연히 증가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오니, 가령 원액(元額)이 5백인 곳이면 5백을 더하고, 원액이 1천인 곳이면 1천을 더하여, 이와 같이 가정(加定)하면 그 숨은 자가 적어질 것입니다.’ 하여, 여러가지 말이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으니, 동반(東班) 6품 이상과 서반(西班) 4품 이상이 고사(故事)를 상고하고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숙의(熟議)해서 아뢰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88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책 270면
  • 【분류】
    호구-호구(戶口) / 호구-호적(戶籍) / 호구-이동(移動)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019]
    판탕(板蕩) : 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림.

○傳旨曰:

生民之數, 有國家者所當先知, 故歷代帝王必先考其當代戶口之數, 載在版籍, 然其法代各不同。 小司徒之職, 均土地以稽民而周知其數。 凡起徒役家, 毋過一人, 以其餘爲羨, 唯田與追胥, 竭作隨時。 高穎建輸籍之法, 定其名輕其數, 使人爲浮客, 被强家收太半之賦, 爲編氓奉公, 上蒙輕減之征, 浮客悉自歸於編戶。 又民部侍郞裵蘊以民間脫漏戶口及詐注老少尙多, 奏令貌閱, 若一人不實, 則官司解職。 又許民糾得一丁者, 令被糾之家代輸賦役。 是時, 諸郡計帳進丁二十四萬三千, 新付口六十四萬一千五百。 武后時, 平閣舍人李喬上表曰: "黎庶之數、戶口之衆, 條貫不失者, 在於明其付籍而已, 宜令御史督察檢校, 設禁令以防之, 垂恩德以撫之, 施權衡以禦之, 爲制限以一之, 然後逃亡可還, 浮寓可絶, 戶無所遺, 人無所匿矣。" 天禧五年, 詔諸州縣: "自今招來戶口開墾荒田者, 申入戶籍, 毋得以客戶增數。" 舊制縣吏能增戶口, 縣卽申示, 乃加其俸錢。 又紹興五年, 詔諸路: "經殘州縣, 親民官到任, 據見存戶口實數批上印, 歷滿任日, 亦如之, 以考殿最。" 以此觀之, 歷代之法, 雖因時異制, 其所以急於籍民編戶之意, 則同也。 惟我太祖高麗板蕩之餘, 慮民産之無恒、戶口之日縮, 嚴立戶籍之法, 自成籍以後逃亡流移人及許接容隱之人, 按律科罪, 載諸《元典》。 逮至太宗之朝, 又立隣保正長之法, 詳加矜束, 禁絶流移, 載諸《續典》。 然而有司奉行未至, 致使公私賤口及諸色軍人相繼而逃, 不獲已議立號牌之法, 行之數年, 流亡稍息。 適因年歉, 獻議紛紜, 因此遂罷其法。 到今思之, 本國昇平日久, 生齒之繁, 倍於前昔, 著籍者少, 而隱漏者十居六七。 守令不能悉知而漏報, 監司亦不之察而轉聞, 國家懜然不知戶口之實數, 有乖於治體, 誠爲未便。 玆用延訪大臣, 或曰: "戶口之數, 苟守令留心察之, 則豈有不知之理乎? 況近因年歉, 還上賑濟分給之時, 加見甚多? 乞委守令將各年戶口帳、還上賑濟分給文案, 密察磨勘。 每於歲抄, 具錄元加見逃亡物故之數報之。 且令監司每當殿最之際, 戶口增多者居上等, 減損者居下等。 仍令守令安詳徐察, 如有務於速成, 致使驚動, 增減不實, 致有民怨, 隨其加見, 便行役使者, 依律重論。" 又曰: "欲明戶口之法, 無如號牌。 昔已行之, 以民心厭惡而罷之, 今若復立號牌之法, 加見之人, 只錄於籍, 勿令差役, 則民口庶可悉, 而號牌之法行矣。" 或曰: "守令褒貶之法, 已載《元典》, 不必更論。 但號牌之法, 行之未久, 輒以民心厭惡而罷之, 似難復行。 令守令將各年戶口帳及移來移去生産物故案, 安詳徐察, 期以不漏, 勿爲速成, 以致驚駭。" 或曰: "本國風俗有子壻多者, 出贅而結廬於家園之內。 苟使守令密察磨勘, 以增減戶口爲等第, 則破家遷徙, 必不得聊生矣。 但於常時考察之際, 守令及品官人吏通同, 隱漏不報, 或侵虐其民, 致怨移居者, 痛繩以法。 如有能興水利, 開墾陳地, 召民許耕, 以增戶口者, 特加褒典。" 或曰: "丁口畢現之法, 無如隣保號牌之法, 玆法與中朝保甲之法相同。 乞自今申嚴隣保之令, 復擧號牌之法, 因其號牌而見者, 勿令別定他役, 亦不要速成, 行之旣久, 則漏挾之民, 竝皆自見矣。" 或曰: "丁口畢見, 勢似難矣。 乞令監司量其州縣人物多少, 倍定軍額, 則人丁自然加見矣。 假如元額五百處, 則加五百; 元額一千處, 則加一千。 如此加定, 其有隱者少矣。" 諸說未知孰是, 其令東班六品以上、西班四品以上商確故事, 參酌時宜, 熟議以啓。


  • 【태백산사고본】 28책 88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책 270면
  • 【분류】
    호구-호구(戶口) / 호구-호적(戶籍) / 호구-이동(移動)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