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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86권, 세종 21년 9월 10일 을묘 2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김하를 집을 바르게 하지 못한 죄로써 율문을 상고하게 하다

영의정 황희(黃喜)·좌의정 허조(許稠)·우의정 신개(申槪)를 불러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의 명령을 받으면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비록 천한 일이라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옛적에 공자(孔子)가 위리(委吏)가 되어서 요량(料量)을 공평하게 하고, 사직(司職)이 되어서는 축양(畜養)을 번식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옛적의 신하된 사람이 마음을 극진하게 쓰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우리 조정에서 강이(講肄)와 역산(曆算) 등의 벼슬을 설치하였으니, 모두 내가 깊이 주의(注意)하는 것이다. 이 직책에 있는 자는 마땅히 정백(精白)하게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내 뜻에 부응(副應)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의 신자(臣子)가 모두 이것을 천한 일로 여기어 말하기를, ‘한번 이 직책에 들어가면 종신토록 벗어나기 어렵다.’ 하여, 이를 피하려고 꾀하니 어찌 효과를 이룰 수 있겠는가.

우리 나라에서 중국말을 잘하는 사람이 오직 이변(李邊)김하(金何)뿐인데, 이변은 말은 능하나 후중(厚重)한 기량(器量)이 없고, 김하는 후중한 기량이 있어서,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가 장차 어전(御前)의 통사(通事)가 될 것이라.’ 하고, 나도 역시 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전일에 최치운(崔致雲)이 갈 때에도 작은 일이 아니었다. 김하로 서장관(書狀官)을 삼고 인하여 에게 명령하기를, ‘네가 비록 서장관이기는 하나 실상은 부사(副使)이다. ’고 하였었다. 치운이 비록 어질더라도 가 아니면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있는데, 만일 마음과 행실이 불초(不肖)하다면, 내가 어찌 굽혀 은혜를 베풀어서 공도(公道)를 멸(滅)할까마는, 다만 헌사(憲司)의 탄핵이 풍문(風聞)인 듯하다. 만일 풍문이 아니라면, 당초에 〈정처를〉 소박한 것을 탄핵할 때에 아울러 다스렸을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숭원(崇元)의 출생 월일(出生月日)로 증험을 삼으니, 생각하건대, 그 사이에 헌사(憲司)가 남의 사주를 듣고 가혹하게 살핌이 지나친 것이다.

하물며 풍문을 금하는 것은 조종(祖宗)께서 만들어 놓은 법이니 폐할 수 없고, 애매한 일로써 벼슬길을 가리어 막는 것은 조종께서 깊이 염려한 것이며, 나도 또한 준수한 지가 오래다. 다만 일이 강상(綱常)에 관계된다면 곧 계달하여 추핵(推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옛날 이순몽(李順蒙)·황상(黃象)의 일은 풍문이니, 그때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미 떠들어댔고, 나도 역시 그 추한 소리를 들었다. 또 내가 효령(孝寧)의 집에 갔을 때에 순몽(順蒙)이 호상(胡床)에 걸어앉아 있었다는 것을 유사(攸司)가 듣고 탄핵하였는데, 이것 역시 풍문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시위(侍衛)하는 군사(軍士)의 이목(耳目)은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의 죄를 보건대, 가 변백(辨白)을 하지 못하니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경들은 익히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허조가 아뢰기를,

"는 신의 처질녀(妻姪女)의 남편이어서 함께 의논하는 것이 마땅치 않사온데, 성상(聖上)께서 신에게 물으시니, 신이 어찌 그 사이에 일호(一毫)의 사의(私意)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알지 못하는 자는 신더러 사의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관계없다. 경의 뜻을 말하여 보라."

하니, 허조황희 등과 더불어 함께 의논하고 아뢰기를,

"만일 풍문이라 하여 논핵하지 않으면 사헌부에서 반드시 인혐(引嫌)할 것이옵고, 만일 명하여 고신(告身)을 거두고 옥에 가두어 추국(推鞫)하면, 가 반드시 다시 할말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율(律)을 상고하건대, 의 죄가 장(杖) 80에 불과합니다. 아직 율(律)을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령한 연후에 성상께서 재량하시어 시행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숭원(崇元)의 일은 논하지 말고 다만 첩(妾)이 정처(正妻)를 질투하는 죄로써 조율(照律)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좋습니다."

하매, 인하여 승정원에 하교(下敎)하기를,

"관기(官妓) 첩(妾) 소생은 종량(從良)할 수 없는 법이 《육전(六典)》에 실려 있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기생은 정한 남편이 없어 적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대간(臺諫)을 불러서 가 집을 바르게 하지 못한 죄로써 율문을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86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책 236면
  • 【분류】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사법-탄핵(彈劾) / 정론-간쟁(諫諍)

    ○召領議政黃喜、左議政許稠、右議政申槪謂曰: "人臣受君命, 固當盡心焉耳, 雖事之賤者, 何避之有? 昔孔子爲委吏而平料量, 爲司職而孶畜養, 此古之人臣所以無所不用其極也。 我朝設講(隷)〔肄〕 曆算等官, 皆予之深注意者也。 居是職者, 宜精白一心, 以副予意。 今之臣子, 皆以此爲賤事曰: "一入是職, 終身難脫。" 謀欲避之, 何能成效? 我國善語者, 唯李邊金何而已。 能言而無厚重之器, 有厚重之量, 國人皆曰: "將爲御前通事。" 予亦以爲非, 不能也。 前日崔致雲之行, 非細事也。 以爲書狀官, 仍命曰: "汝雖書狀, 實爲副使。" 崔致雲雖賢, 然非, 事不易成也。 今被憲府之劾, 若心行不肖, 則予何曲施恩貸, 以滅其公哉? 但以憲司之劾, 有類風聞, 若非風聞, 則當初劾疎薄之時, 幷治之矣, 至於今日, 乃以崇元之生日月爲驗, 意其間憲司聽人陰嗾而過於苛察也。 況風聞之禁, 祖宗成憲, 不可廢也。 以曖昧之事, 蔽塞仕路, 祖宗深慮, 予亦遵守久矣。 但事干綱常, 則或有隨卽啓達推覈者矣。 昔李順蒙黃象之事, 類於風聞, 而其時國人, 皆已喧騰, 予亦聞其醜聲也。 且予幸孝寧之第, 順蒙據胡床, 攸司聞而劾之, 是亦事涉風聞也。 然侍衛軍士之耳目, 不可掩也。 今觀罪, 不能辨白, 何以處之? 卿等其熟議以聞。"

    啓曰: ", 臣之妻三寸姪女夫, 不宜同議。 上問之於臣, 臣豈有一毫私意於其間哉? 然不知者, 以臣爲容私也。" 上曰: "予豈不知? 然無傷也, 第言卿意。" 等同議以啓曰: "若名爲風聞而不劾, 則憲府必引嫌, 若命收告身, 繫獄推鞫, 則必更無辭矣。 臣按律, 罪不過杖八十, 姑命照律以啓, 然後上裁施行。" 上曰: "勿論崇元之事, 徒以妾妬正妻之罪照律何如?" 等啓曰: "可矣。" 仍敎承政院曰: "官妓妾産不得從良之法, 載在《六典》, 此無他, 妓無定夫, 不能的知故也。 召臺諫, 其以不能正家之罪, 按律以啓。"


    • 【태백산사고본】 27책 86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책 236면
    • 【분류】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사법-탄핵(彈劾) / 정론-간쟁(諫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