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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86권, 세종 21년 9월 1일 병오 2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왕구아와 왕식이 요청하는 일에 대해 논하다

전지(傳旨)하기를,

"그전에 왕구아(王狗兒)가 본국 사신을 보고 후지(厚紙)를 청하였는데, 태종께서 의리에 사교(私交)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들어 주지 않은 지가 오래였다. 뒤에 원민생(元閔生)북경에 가느라고 광녕(廣寧)에 이르니, 구아민생에게 이르기를, ‘내가 전에 후지(厚紙)를 청하였는데 아직 받지 못하였다.’ 하였다. 무술년간에 이르러 원민생북경에 갔다가 후지 30권을 가져다가 주니, 구아가 받고서 대단히 기뻐하여 족자(簇子)와 사종(沙鍾)으로 답례하였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에 구아가 여러 번 후지를 청하였으나, 내가 모두 들어 주지 않았다. 기유년에 함녕군(諴寧君) 이인(李䄄)북경에 갈 때에, 친아우가 가는 데는 상례(常例)와 달리 하여야만 하겠다 하여 후지 20권을 보냈더니, 구아가 기쁘게 받고 사종(沙鍾)을 주었었다. 또 무오년에 혜령군(惠寧君) 이지(李祉)북경에 갈 때에 역시 후지 20권을 보냈더니, 구아가 또 단필(段匹)과 채견(彩絹)을 보내었다.

지금 사은사(謝恩使) 민의생(閔義生)이 돌아올 때에 왕구아가 또 후지와 인삼을 청하였는데, 대개 구아가 가까운 땅에 방면지임(方面之任)을 받고 있으니 내가 어찌 후대할 생각이 없겠는가마는, 다만 염려되는 것은 소인(小人)의 욕심이란 한이 없으니 청하는 대로 들어 준다면, 마침내 반드시 들어 주기 어려운 청이 있을 것이니 처(處)하기가 실로 어려울 것이다. 지금 후지와 인삼을 청구하였으니 그 청대로 따라야 하는가. 만일 따라야 한다면 그 청대로만 따를 것인가. 따로 가감(加減)이 있을 것인가. 줄 때에는 내가 주는 것으로 줄 것인가. 사신이 사사로이 주는 것으로 줄 것인가. 근자에 입조(入朝)하는 사신이 매양 조 총병관(曹摠兵官)에게 마포(麻布) 두, 세필과 유둔(油芚) 두, 세장을 주는 것이 정식(定式)으로 되었으나, 구아에 이르러서는, 저가 만일 먼저 노비(路費)를 주면 〈이쪽에서〉 다만 도중의 여비[路次盤] 속에서 헤아려 줄 뿐이었다. 그러나 구아조 총병관은 한 성안에서 사는 곳이 멀지 아니하니, 두 집의 모든 일을 어찌 서로 듣고 보지 않겠는가. 조 총병관은 사신이 갈 때마다 예(例)에 의하여 예물(禮物)을 받고, 구아는 먼저 여비를 주지 않으면 반드시 예물이 없으니, 온당치 못한 것 같다.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금의위(錦衣衛) 지휘(指揮) 왕식(王息)은 본래 여진(女眞) 사람이어서, 무릇 야인(野人)에 관계되는 일은 총섭(摠攝)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전일에 최치운(崔致雲)북경에 갔을 때에도 예부(禮部)·병부(兵部)·한림원(翰林院)이 식(息)과 상의하여 주준(奏准)하였고, 지금 또 민의생(閔義生)북경에 갔을 때에는 답찰아(答察兒)에게 말하기를, ‘만일 조선에 칙령(勅令)하여 후문(後門)에 군마(軍馬)를 모이게 하고, 또 요동(遼東)에 칙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아울러 나간다면, 너희들이 이미 해서(海西) 달달(達達)과 사이가 좋지 못하니 장차 어느 곳에서 살 수 있겠는가. 1, 2년 동안 경작(耕作)하지 못하면 생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런 말은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민의생이 작별하고 돌아올 때에 이르기를, ‘내 조부(祖父)의 분묘(墳墓)가 길주(吉州)에 있고, 종형(從兄) 김진(金鎭)이 그곳에 있으니, 후일에 데리고 와서 나와 서로 만나 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인하여 김진이 살고 있는 지명을 써서 보내었다. 내가 생각건대, 근자에 입조(入朝)한 내관(內官)의 친척을 기왕에 들여보내지 않았는데, 오직 식(息)의 친척만 보내면 온당치 않으니, 그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복호(復戶)하여 완전히 구휼하게 하고, 그 조상의 분묘에도 또한 나무하는 것과 불을 금하게 하고, 후일에 식(息)이 만일 본국의 사신을 보고 말하기를, ‘진(鎭)을 왜 데리고 오지 않았는가.’ 하면,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중국〉 조정의 법이 엄한 것을 두려워하시어 감히 들여보내지 못하고, 곧 진(鎭) 등의 일족(一族)을 모두 복호(復戶)시키어 생업을 편안히 하게 하고, 조상의 분묘도 또한 사람을 시켜 불을 금하고 벌목하는 것을 금하였다.’ 하여, 이렇게 대답하게 하려고 하는데 어떠한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86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책 233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무역(貿易)

    ○傳旨:

    前此王狗兒見本國使臣請厚紙, 太宗以謂義無私交, 不聽久矣。 後元閔生赴京到廣寧, 王狗兒閔生曰: "吾前請厚紙, 尙未見惠。" 至戊戌年間, 元閔生又赴京, 就付厚紙三十卷以贈之, 王狗兒受之甚喜, 以簇子沙鍾答禮。 及予卽位以後, 王狗兒屢請厚紙, 予皆不聽。 己酉年, 諴寧君 赴京, 以爲親弟之行, 宜異於常例, 送厚紙二十卷, 王狗兒喜受, 以沙鍾見遺。 又於戊午年惠寧君 (𧘿)〔祉〕 赴京時, 亦送厚紙二十卷, 王狗兒又送段匹彩絹。 今謝恩使閔義生回還時, 王狗兒又請厚紙人蔘, 蓋王狗兒受方面近地, 予豈無厚待之意乎? 但慮小人之欲無窮, 隨請隨聽, 則其終必有難聽之請, 處之實難。 今求厚紙人蔘, 可從其請乎? 如曰可從, 則只從其請乎? 別有加減乎? 臨贈之時, 以予所贈與之歟? 以使臣私贈與之歟? 近者入朝使臣每行, 贈摠兵官麻布二三匹、油芚二三張, 以爲定式, 至若王狗兒則彼若先行下程, 但以路次盤纏, 斟酌贈給而已。 然王狗兒摠兵官, 一城之內, 所居不遠, 兩家凡事, 豈不互相聞見乎? 摠兵官則每行依式受禮物, 王狗兒不先行下程, 則必無禮物, 似爲未便, 其將何以處之? 錦衣衛指揮王息, 本女眞人也。 凡干野人之事, 無不摠攝。 前日崔致雲赴京時, 禮兵部翰林院, 與王息擬議奏準。 今又閔義生赴京時, 王息答察兒曰: "如勑朝鮮後門聚集軍馬, 又勑遼東領兵幷進, 則汝等旣與海西達達不和, 將何處得生? 一二年不得耕作, 則未得生活。" 如此之說, 有助於國家。 閔義生辭還時, 謂曰: "我祖父墳墓在吉州, 叔伯哥哥金鎭在其處。 請後日帶來, 使我相見。" 仍書金鎭所居地名以送。 予謂近者入朝內官親戚, 旣不入送, 而獨送王息親戚未便。 欲令其道觀察使復戶完恤, 其祖上墳壠, 亦令禁樵火。 後日王息若見本國使臣曰: "金鎭何不率來?", 則答曰: "我殿下恐朝廷法嚴, 未敢入送。 卽令金鎭等一族, 悉皆復戶, 俾安其業; 祖上墳墓, 亦令差人禁火禁伐木。" 如此答說何如?


    • 【태백산사고본】 27책 86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책 233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무역(貿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