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1월 11일 경인 2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예조에서 진사 이관의 등의 상서를 의논하다

예조에서 진사 이관의(李寬義) 등의 상서한 것을 가지고 의논하여 아뢰기를,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의 앉는 차례는 성균관에서 일찍이 본조(本曹)에 보고하였고, 본조에서는 교지를 받은 바에 따라 진사를 생원의 아래에 앉게 하였습니다. 또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예전에 유우씨(有虞氏)는 덕을 귀하게 여기고 나이를 따졌으며, 은(殷)나라 사람은 부자를 귀하게 여기고 나이를 따졌으며, 주(周)나라 사람은 친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나이를 따졌다.’ 하였사온데, 우(虞)·하(夏)·은(殷)·주(周)나라 때에 천하를 이룬 임금으로서 나이를 버린 자는 있지 않았으니, 나이가 천하에 귀하게 된 것은 오래입니다. 그 아래에 또 말하기를,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작(爵)이 같으면 나이를 따진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군대에서 십장(什長)이나 오장(伍長)으로 지위가 같으면 나이를 따진다.’ 하였사오니, 그렇다면 처음부터 상하의 등급을 논하지 아니하고 나이만을 따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논어(論語)》 주(註)에 말하기를, ‘사람이 능히 사람보다 위가 되겠다는 욕심이 없다면, 사람의 욕심이 날로 없어져서 천리(天理)가 자명할 것이라.’ 하였고, 《소학》에는 말하기를, ‘선생이 교육을 베풀고 제자는 이것을 본받는다’ 하였사오니, 이것은 지금의 진사 시험이 오로지 초학하는 방법을 권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진사 된 자는 마땅히 힘써 배워 날로 진보하여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생원시(生員試)를 누가 금하여 하지 않은 것입니까. 이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초학하는 선비로서 겨우 성균관 예의(禮義)의 장소에 들어가자, 자기의 글 재주가 부족한 것은 돌보지 아니하고, 한갓 사람을 업신여기고 자기를 높이려는 욕심으로 예조나 성균관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옵니다. 또 수교(受敎)한 바의 이미 정한 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경솔하게 무리를 모으고 상언(上言)하오니, 그 광패하고 참람된 것이 심하옵니다. 이처럼 사람을 업신여기고 광패하고 참람한 기풍을 키울 수는 없는 것이오며, 만일에 진사들의 상언한 것이라 하고 생원·진사가 같은 학생이라 하여 고하를 물론하고 나이를 따져서 앉게 한다면, 이제 승보(升補)하여서 기재(寄齋)하는 오부 생도(五部生徒)들도 역시 생원·진사의 위에 앉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보오면 진사 시험을 혁파할 것이오나, 우선 성균관으로 하여금 그 주모자를 핵실(劾實)하게 하여 논죄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황희(黃喜)·우의정 허조(許稠)가 의논하기를,

"국초에 고려(高麗) 때의 전례를 계승하여 진사시(進士試)를 실시한 것은 초학하는 자를 권면하기 위함이었으므로, 진사의 거관(居館)하는 자를 ‘기재(寄齋)’라 칭하고, 좌차(坐次)는 생원이 한 줄이 되고 기재가 한 줄이 되게 하였사오니, 구례에 의하여 진사(進士)와 유학(幼學)은 나이를 따져서 생원의 아래에 앉게 하소서."

하고, 좌참찬 하연(河演)은 의논하기를,

"삼대(三代) 이하에서 과거를 베풀어 선비를 뽑아 어진 사람의 길을 열어 주었으므로 인재와 준걸이 항상 과목(科目)에서 나왔사온데, 그 선비를 취재하는 방법은 경서에 밝고 행실에 있는 자를 얻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예전 고려 때에는 고부(古賦) 십운시(十韻詩)로써 진사시(進士試)를 삼되, 특별히 시관을 보내어 뽑게 하고, 발[廉] 앞에 방을 내붙이고, 또 육운 팔각(六韻八角)003) 으로 아울러 급제에게도 시험하였으나, 생원시(生員試)는 과거가 끝난 뒤에 의문과 경의(經義)를 시험하였으되, 시관도 없고 또한 방 내붙이는 것도 없었으므로, 유생들이 어려서부터 자란 뒤까지 오로지 시구(詩句)만을 힘쓰고 경학을 배우지 않아서, 교양이 부정하고 사풍(士風)이 퇴폐하여졌나이다. 신은 들으오니, 속담[諺]에 전하기를, ‘중국[朝廷] 사신 장부(張溥)의 시에 이르기를, 「향등불 곳곳에는 모두 부처에 귀의하였고, 연기 불 있는 집집은 다투어 신을 섬기는데, 오직 두어 칸 되는 부자(夫子)의 사당은 뜰에 가득한 거친 풀 적적하게 사람이 없네.」 하였다.’ 하옵는데, 이것은 당시 학교 행정의 형편 없는 것을 비평한 것입니다.

말하는 자가 ‘선유(先儒)에 이색(李穡) 같은 이가 처음에 진사로 해서 입선하였으니, 진사는 초학의 입신하는 단서이다.’ 하옵니다. 신의 뜻으로 생각하옵기는, 그 어렸을 때에 소학의 도리를 학습하여 그 방심한 것을 거두고 덕성(德性)을 양성하여 그 습관이 지식과 한가지로 자라고 예법이 마음과 한가지로 성취하여, 대학의 근본을 기초 잡는 것이온데, 어찌 풍운월로(風雲月露)의 습성으로 과목을 설정하여 그 어린 마음을 흔들어 놓겠나이까. 다행하옵게도 색(穡)은 세상을 덮을 재주가 있사옵고 천성이 명민하와, 경학과 문장으로 특별히 세상을 울려 사문(斯文)을 장식한 것이오니, 어찌 진사시(進士試)로 이 사람을 일으키어 성취시킨 것이겠습니까. 우리 태조 강헌 대왕께옵서 나라를 세우고 교화를 흥기(興起)시키실 제, 먼저 진사시를 혁파하시고 생원을 높여서 별달리 시관을 두어 뽑아 마루[軒]에 임하시어 방을 붙이시오니, 이로부터 경중과 외방의 유생들이 경학을 학습하여 5경을 통달한 자가 흔히 있으므로 이미 성헌(成憲)이 되었사온데, 방금 다시 진사시를 설치하였사오니, 이후로는 사부(四部) 유생이 몰래 시장(詩章)을 가지고 경학(經學)에 게을러지면, 비록 일과(日課)로 읽는다 하여도 의미를 연구하지 아니하여 굳은 뜻[志意]이 황폐하게 된다면 장차 어떻겠나이까.

또 식년(式年)에 세 차례의 향·관시(鄕館試)에 경외(京外)로 왕래하느라고 양식을 싸 가지고 농사를 폐지할 것이므로, 한갓 국가로 하여금 다사하게 할 뿐이옵니다. 시학(詩學)의 흥왕하는 것이 무엇이 정치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원컨대, 성조(聖朝)에서 이미 정하옵신 법에 따라 도로 진사시를 혁파하시옵고, 힘써서 경학으로 근본을 삼고 사장(詞章)으로 지엽을 삼으시면, 장차 경학에 밝고 행실이 깨끗한 선비가 성하게 작흥(作興)될 것입니다. 이제 진사 관의(寬義) 등이 말을 꾸며서 상언하여 생원들과 섞여 앉고자 하오니, 특히 염양(廉讓)하는 마음이 없사와 선비의 행실이 아닌 것 같사오니, 예조의 의논과 같이 사풍(士風)을 바르게 하옵시고, 그 앉는 차례도 역시 그전의 예에 의하여 유학(幼學)들과 나이 차례로 하게 하옵소서."

하고, 좌찬성 신개(申槪)·우찬성 이맹균(李孟畇)·우참찬 최사강(崔士康)은 의논하기를,

"생원과 진사의 앉는 차례는 예조에서 이미 일찍이 받자온 교지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개(槪) 등의 의논을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84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80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어문학-문학(文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03]
    육운 팔각(六韻八角) : 육운(六韻)이라 함은 운자(韻字)를 여섯 번 변경하여 짓는 장편시(長篇詩)의 형식이요, 팔각(八角)이라 함은 팔각(八脚)이라고도 하는데, 여덟 갈래의 논법을 써서 짓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팔고문(八股文)이라 한다.

○禮曹將進士李寬義等上書議啓曰: "生員進士坐次, 成均館曾報本曹, 本曹據受敎, 進士坐於生員之下。 且《禮記》云: ‘昔者有虞氏貴德而尙齒, 人貴富而尙齒, 人貴親而尙齒。 , 天下盛王也, 未有遺年者, 年之貴乎天下久矣。’ 其下又曰: ‘是故朝廷同爵則尙齒。’ 又曰: ‘軍旅什伍, 同爵則尙齒。’ 然則初非勿論上下等級而尙齒之謂也。 《論語》注曰: ‘人能操無欲上人之心, 則人欲日消, 天理自明。’ 《小學》曰: ‘先生施敎, 弟子是則。’ 今進士試, 專爲勸勵初學之方, 爲進士者所當勉學日進。 況於生員試, 誰禁之而不爲歟? 不此之顧, 以初學之士, 纔入成均禮義之場, 不顧自己文才不足, 徒以陵人尊己之欲, 不從禮曹、成均之令, 又不畏受敎已定之法, 率然群聚上言, 其狂僭甚矣。 如此陵人狂僭之風, 漸不可長。 如以進士等上言, 而生員進士, 均是學生, 勿論高下, 尙齒而坐, 則今升補寄齋五部生徒, 亦可坐於生員進士之上矣。 以此觀之, 進士試可革, 姑令成均館劾其主謀者, 論罪爲便。"

下議政府議之。 領議政黃喜、右議政許稠議曰: "國初承高麗舊例, 設進士試者, 爲勸勵初學, 故進士居館者, 稱爲寄齋, 坐次則生員爲一行, 寄齋爲一行。 乞依舊例, 進士幼學, 尙齒坐於生員之下。" 左參贊河演議曰: "三代而下, 設科取士, 以開賢路, 人才俊傑, 恒由科目, 其取士之道, 務得明經行修者爾。 昔在高麗, 以古賦十韻詩爲進士試, 特遣試員取之, 簾前放牓。 又以六韻八角, 幷試於及第。 若生員試則科擧旣畢, 令成均館試以疑義, 無試官, 又無放牓。 是以儒生自幼及長, 專務詩句, 不事經學, 蒙養不正, 士風頹靡。 臣聞諺傳, 朝廷使臣張溥詩云: ‘香燈處處皆歸佛, 烟火家家競事神。 惟有數間夫子廟, 滿庭荒草寂無人。’ 此譏當時學校之政之極衰也。 說者謂: ‘先儒如李穡, 初由進士而達, 進士則初學興起之端也。’ 臣意以爲方其幼也, 講習《小學》之道, 收其放心, 養其德性, 欲其習與智長, 禮與心成, 以基《大學》之根本, 焉有以風雲月露之習, 設之科目, 搖蕩其幼稚之心乎? 幸有李穡命世之才, 天資明敏, 自然拔萃離倫, 以經學文章, 特鳴於世, 而賁飾斯文者也。 豈以進士試興起斯人而致之哉? 我太祖康獻大王開國興化, 首革進士試, 而崇重生員, 別置試官取之, 臨軒放牓。 由是中外儒生, 皆習經學, 通五經者, 比比有之, 已爲成憲。 方今復設進士試, 自後四部生徒, 潛挾詩章, 怠於經學, 雖讀日課, 不究意味, 志意荒蔽, 將若之何? 且於式年, 因三次鄕館試, 來往京外, 齎糧廢農, 徒令國家多事而已, 詩學之興, 何補於治道乎? 乞遵盛朝已定之法, 還革進士試, 務以經學爲本根, 詞章爲枝葉, 則將見經明行修之士, 蔚然作興矣。 今進士李寬義等飾辭上言, 欲與生員間坐, 殊無廉讓之心, 殆非儒士之行, 乞如禮曹之議, 以正士風。 其坐次, 亦依舊例, 與幼學齒序。" 左贊成申槪、右贊成李孟畇、右參贊崔士康議曰: "生員進士坐次, 乞依禮曹已曾受敎施行。" 上從等之議。


  • 【태백산사고본】 27책 84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80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어문학-문학(文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