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돈을 불러 이숙번을 경외에 종편시키거나 경기로 양이하는 문제를 양 의정과 의논하라고 명하다
정사를 보았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물러간 뒤에 도승지 김돈에게 이르기를,
"이숙번(李叔蕃)이 정사(定社)087) 와 좌명(佐命)088) 때에 공(功)이 막대하였었고 태종조에 와서도 보좌한 것이 역시 많았으니, 만약 보전(保全)하였더라면 배향(配享)될 것이 틀림없었다. 숙번의 행동거지와 국량(局量)이 보통 유(流)가 아니었으나, 학문이 그다지 없었고 성질이 광패하고 거칠었었다. 나의 외가(外家) 일은 경의 벼슬하기 전에 있었으므로 응당 알지 못할 것이다. 양녕(讓寧)이 외가에서 자랐는데, 여러 외삼촌들이 모두 양녕에게 마음을 쏟았었다. 그때에는 양녕의 실덕(失德)한 일이 드러나지 아니하였으나, 여러 아우들에게 퍽 시기하는 마음이 있어서 말하는 데에도 드러나므로 태종께서 노하시기도 하였다.
하윤(河崙)이 나의 외조부(外祖父)089) 와 교분이 매우 깊었으므로 매양 민씨(閔氏)를 옆에서 도와주었는데, 여러 외숙들이 광패하고 건방지어 무도하므로 숙번이 힘써 민씨를 배척하였다. 이리하여 하윤과 숙번이 붕당(朋黨)을 나누어 맞섰던 것인데, 민씨가 패한 후에는 숙번과 유양(柳亮) 등이 아뢰기를, ‘세자가 장차 반드시 신 등을 미워할 것이옵니다. 신 등이 자주 세자를 뵈올 것을 청하옵니다.’ 하였으니, 그 본정을 따지면 죄가 진실로 작지 아니하다. 그러나 내 마음에 생각하기는, 숙번이 반역하려는 마음[今將之心]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태종께 친히 아뢰었는데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는가. 유양이 이에 보전되었으니 숙번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윤의 위인을 내가 아는데, 학문이 해박하고 정사에 재주가 있어 비록 재상의 체모가 있지마는, 청렴결백하지 못하였고 일을 많이 애매모호(瞹昧模糊)하게 처리했다. 매양 일을 아뢸 때에는 여염(閭閻)의 청탁(請托)까지 시간을 끌며 두루 말하여 성궁(聖躬)의 피로함도 돌보지 아니하였으니, 내 생각으로는, 보전하기 어려울 것인데도 태종께서는 능히 보전하시었다.
하루는 하윤과 숙번이 같이 들어와서 일을 아뢰었는데, 시간이 오래 되자 숙번은 하윤보다 관직이 낮은 까닭으로 먼저 나와서는, 섬돌 아래에 숨어 엎드려서 하윤이 다시 무슨 일을 아뢰는가를 엿들었다. 하윤이 나와서 전(殿)을 내려오다가 숙번이 엎드린 것을 보고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여기에 있었구려.’ 하였는데, 태종께서 노하시었다. 그 정상을 논한다면 죽어도 죄가 남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하윤이 무슨 일을 아뢰는가 엿들었을 뿐인 것이다. 윤저(尹抵)는 우스개소리 잘하고 절조가 없었는데, 하루는 태종께서 윤저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나의 공신들은 어찌하여 당파를 세우고 있느냐.’ 하셨는데, 윤저가 태종께서 하교하시지도 아니한 말씀까지 덧붙여서 숙번에게 말하였다. 하루는 숙번이 들어와 뵈옵는데 성낸 모양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므로, 태종께서 물어 보시고서야 윤저의 말을 듣고 얼굴빛이 변한 것을 아시었던 것이다.
하윤이 선봉이 되어 순제(蓴堤)090) 를 개착(開鑿)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혹은 말하기를, ‘개착하여야 합니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개착할 수 없습니다.’ 하여, 의논이 분분하여 일치되지 아니하였었다. 태종께서 남쪽으로 순행하실 때에 장차 순제에 임어(臨御)하여 친히 그 가부를 보시려 하니, 거가(車駕)를 수종하던 대소 신하들이 각기 그 소견을 아뢰어서 의논이 일치하지 아니하였었다. 숙번이 홀로 말하지 아니하므로 태종께서 노하시어 숙번에게 이르기를, ‘경은 대신인데 홀로 말하지 아니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시니, 숙번이 부득이하여 대답해 말하기를, ‘내일 장차 친히 임어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였고, 급기야 친히 임어하실 때에는 거가를 호종(扈從)하지 아니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으므로 태종께서 노하시었다. 그러나 그것도 하윤의 하는 일을 싫어해서였다.
숙번이 본래 맹인(盲人) 하천경(河千景)과 친하였는데, 천경이 죄를 지어서 죽게 되었을 때, 숙번이 꼭 살리고자 하여 세자의 장인 김한노(金漢老)와 효령의 장인 정역(鄭易)과 나의 장인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천경의 죄는 체포할 정도에 이르지는 아니하오니, 율(律) 외의 형벌을 행할 수는 없사옵니다.’ 하여서, 한노가 양녕에게 말하고, 정역도 역시 효령에게 말하고, 나의 장인이 나에게 자세하게 숙번의 청탁한 전후 사정을 말하므로, 내가 아뢰었더니 태종께서도 역시 말하시었다. 이것은 〈숙번의〉 죄명에 있지 아니한 것이다. 태종께서 양녕에게 내선(內禪)하시고자 하실 때에 숙번이 찬성하였는데, 그 뜻은 태종을 따라서 편안히 놀고자 함이었다. 나라 사람들이 찬성하지 아니하자, 숙번도 역시 불가하다고 힘써 아뢰었으며, 우리 형제에게, ‘성상께옵서 어찌하여 이러하시는 것입니까. ’라고 이르기까지 하였다. 그 후에 태종께서 선위하시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숙번이 처음에는 내선하기를 바라다가 끝에 가서는 도리어 불가하다고 한 것은, 그 마음이 나하고 놀려고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하셨으니, 태종께서 그 소행을 비웃으시었지만 반드시 죄주고자 하시지는 아니하셨다.
목인해(睦仁海)의 사건에는 숙번이 본래 죄가없었다. 숙번이 광패하고 거친 성격에 상감의 총애를 믿는 마음이 있어서 교만하고 방자하고 무례하여 천노(天怒)091) 를 범한 것이지, 불충(不忠)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종께서 태상왕(太上王)이 되어서 황희 등을 용서하실 때에도 말씀하시기를, ‘숙번의 공이 매우 크다. 내가 다시 등용하고자 하나, 그러나 그 죄가 큰 까닭으로 실행하지 못하겠다.’ 하시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공(功)과 죄가 서로 비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비록 그 죄가 있더라도 공으로 덮어 준다.’ 하였다. 한(漢)나라 양혼(楊惲)이 재상의 아들로 교만하고 방자하고 무도하여서 원망하는 말이 있게 되자 죽이기에 이르렀는데, 오늘날로써 이것을 본다면 양혼의 죽음이 진실로 옳은 것이나, 선유(先儒)들은 죽이는 것이 지나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태종께서 이미 등용하시지 아니하신 것을 내가 어찌 다시 등용할 마음이 있겠는가. 내 마음에는 생각하기를, 경외(京外)에 종편(從便)시키는 것이 가(可)할 것 같다. 만약 경중(京中)이 불가하다면 경기(京畿)로 양이(量移)하는 것도 가할 것이다. 경은 양 의정(兩議政)과 같이 이것을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83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76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물(人物)
- [註 087]정사(定社) : 제1차 왕자의 난.
- [註 088]
좌명(佐命) : 제2차 왕자의 난.- [註 089]
○丁巳/視事。 諸臣皆退, 謂都承旨金墩曰: "李叔蕃於定(祉)〔社〕 佐命之際, 功莫大焉, 及太宗朝, 輔佐亦多, 若能保全, 則配享必矣。 叔蕃行止局量, 非庸流也。 然學問未精, 性且狂率。 予外家之事, 在卿未仕之時, 應未及知, 讓寧長於外家, 諸舅皆注意於讓寧。 當其時, 讓寧失德之迹未著, 然於諸弟, 頗有猜心而發於言語, 太宗恕焉。 河崙與予外祖交契最深, 每扶佑於閔氏, 諸舅狂僭不道, 叔蕃力排閔氏。 於是河崙、叔蕃朋黨分立。 閔氏敗後, 叔蕃、柳亮等啓曰: "世子將必惡臣等矣, 臣等請屢見於世子。’ 原其情則罪固不小矣。 然予心以謂叔蕃非有今將之心也。 親啓於太宗, 豈有他心乎? 亮旣保全, 叔蕃將何罪焉? 崙之爲人, 予及知之。 學問之博、政事之才, 雖有宰相體, 然乏淸介, 事多模稜, 每於啓事之時, 至於閭閻請托, 移日具陳, 不顧聖躬之勞。 以予思之, 難以保全也, 而太宗能保全焉。 一日, 崙及叔蕃同入, 啓事移時。 叔蕃於崙職卑, 故先出, 潛伏階下而窺聽崙復啓何事。 崙出下殿, 見叔蕃之伏曰: ‘令公在此矣’。 太宗怒之。 論其情, 死有餘辜矣。 然但窺聽崙啓何事而已。 尹抵滑稽無操。 一日, 太宗謂抵曰: ‘惟予功臣輩, 何乃樹黨乎?’ 抵敷衍太宗未敎之言, 以語叔蕃。 一日, 叔蕃進見, 怒形於色, 太宗問之, 乃知聞抵言而作於色也。 崙首建蓴堤開鑿之議, 或曰: ‘可開’。 或曰: ‘不可開’。 議論紛紜不一。 太宗南巡, 將臨蓴堤, 親視可否。 隨駕大小臣僚, 各陳所見, 議論不齊, 叔蕃獨不言。 太宗怒, 謂叔蕃曰: ‘卿, 大臣也。 而獨不言, 何歟?’ 叔蕃不得已對曰: ‘明日將親臨矣。’ 及其親臨也, 不扈駕而往于他處, 太宗怒之。 然此亦惡崙之所爲耳。 叔蕃素與盲人河千景善。 及千景犯罪當誅, 叔蕃必欲生之, 托于世子舅金漢老、孝寧舅鄭易及予之舅曰: ‘千景罪, 非奸所捕獲, 不可律外行刑。’ 漢老語讓寧, 易亦言于孝寧, 予舅謂予詳言叔蕃請托始末。 予啓之, 太宗亦怒, 此不在罪名矣。 太宗欲內禪于讓寧, 叔蕃從焉, 其意欲從太宗逸遊也。 及國人之不從也, 叔蕃亦力陳不可, 至謂我兄弟曰: ‘上何以至此?’ 其後太宗禪位, 笑曰: ‘叔蕃初欲內禪而終反不可, 其心不過與我遊耳。’ 太宗旣笑其所爲矣, 非必欲罪之也。 睦仁海之事則叔蕃固無罪焉。 叔蕃以狂率之性, 有恃寵之心, 驕恣無禮, 以犯天怒, 未有不忠之志也。 太宗爲太上王赦黃喜等時, 以爲: ‘叔蕃功甚大矣, 予欲復用。’ 然其罪大, 故不果耳。 古人云: ‘功過當相準’。 又云: ‘雖有其罪, 以功掩之。’ 漢 楊惲以宰相之子, 驕恣不法, 至有怨言, 以致於死。 以今觀之, 楊惲之死, 誠是矣, 先儒以爲殺之過矣。 然太宗旣不用矣, 予豈有復用之心哉? 予心以謂使之京外從便可矣。 若不可於京中, 則量移京畿亦可矣, 卿與兩議政議之。"
- 【태백산사고본】 26책 83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76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물(人物)
- [註 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