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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 10월 26일 정축 3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역리의 민전 탈경에 대해 의논하다

예전 관례에 비록 여러 세대(世代)를 경작하던 땅이라도, 만약 각역(各驛) 위전(位田)에 속하게 되면 역리(驛吏)가 으레 빼앗아 경작하였으니, 역리가 말을 대비하기 어려운 때문이었다. 그러나 평민이 오로지 이를 바라며 먹고 살던 땅을 하루아침에 빼앗기게 되어 이로써 생업을 잃게 되면 역시 가련한 연고로, 정사년에 이르러 역리들이 말을 대비하는 까닭이 아니면서 함부로 백성의 토지를 빼앗는 것을 금하였고, 그 채(菜)·마(麻)·양맥(兩麥)을 심는 밭은 빼앗아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역리들이 전례에 의거하여 빼앗아 경작하려 하므로 송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에 이르러 임금이 정부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니, 영의정 황희(黃喜) 등은 의논해 말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근본이 튼튼하여야 나라가 편안할 것입니다. 만일 역리들이 원하는 대로 따른다면 나라의 근본이 시끄럽고 장차 생업을 잃게 될 것이니, 역리나 평민(平民)들에게 한편으로 치우침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또 무릇 법을 세움에 세웠다가 바로 없애면 어떻게 믿음을 받겠습니까. 전날의 교지 받은 대로 따를 것을 청합니다."

하였고, 우의정 허조(許稠) 등은 말하기를,

"평민은 비록 혹시 실업(失業)하여도 각기 돌아가 의지하고 생업을 이룰 수 있지만, 만약 각역(各驛)이 조잔(凋殘)하고 피폐된다면 군국(軍國)의 명령을 전달하는 중대한 일은 평민으로써 대체하기는 어려운 것이니, 마땅히 역리로 하여금 임의로 처분하게 하소서."

하고, 좌찬성 신개(申槪) 등은 말하기를,

"각역의 위전(位田)을 역리가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성문된 법이 없었습니다. 만약 탈경(奪耕)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침노해 빼앗아서 1무(畝)도 남기지 않을 것이오니 백성이 괴롭게 여길 것이요, 허락하지 아니하면 역리도 역시 말을 대비하기가 어렵게 되어 피차가 방해되오니, 경상적(經常的)이고 오래 갈 법을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역리의 그 위전을 빼앗아서 말을 대비하는 것도 그 유래가 오래 되었고, 평민이 빼앗기고 고소하여 다툼으로 관리가 일시적으로 구처(區處)하던 것도 역시 오래 되었사오니, 만일 고소하고 다투는 자가 있으면 전례에 의하여 감사·수령으로 하여금 그 실정과 사리를 살피어 온당함을 따라 해결하게 하소서."

하니, 허조 등의 의논을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83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70면
  • 【분류】
    교통-육운(陸運) / 농업-전제(田制)

○舊例, 雖累代耕作之田, 若屬各驛位田, 則驛吏例奪而耕之, 以驛吏艱於備馬故也。 然平民全賴仰食之田, 一朝見奪, 因而失業, 亦爲可憐, 故至丁巳年, 禁驛吏之非因備馬濫奪民田者。 其菜麻兩麥之田則不許奪耕, 驛吏欲依前例奪耕, 訟之不已。 至是, 上令政府議之。 領議政黃喜等議曰: "民惟邦本, 本固邦寧。 若從驛吏之願則邦本騷擾, 將至於失業, 驛吏平民, 不可偏重。 且凡立法, 隨立隨毁, 何以示信? 乞依前日受敎。" 右議政許稠等議曰: "平民雖或失業, 各有依歸, 可遂生業, 若使各驛彫弊, 則軍國傳命重事, 難以平民代之, 宜令驛吏任意區處。" 左贊成申槪等議: "各驛位田驛吏, 任意區處, 初無成法。 若許奪耕, 則侵奪不遺一畝, 民將苦之, 不許, 則驛吏亦艱於備馬, 互有妨礙, 難立經常可久之法。 驛吏之奪其位田而備馬, 其來已久, 平民被奪而告爭官吏, 臨時區處, 亦已久矣。 如有告爭者, 依前例, 令監司守令察其情理, 從宜辨析。" 從許稠等議。


  • 【태백산사고본】 26책 83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70면
  • 【분류】
    교통-육운(陸運) / 농업-전제(田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