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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 7월 9일 신묘 1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사간원에서 승선·승직의 법을 혁파하고 주지는 고령자를 택할 것을 상소하다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승도(僧徒)의 정사란 옛날에는 그 제도도 없었으려니와, 이는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법도도 아닙니다. 고려 태조(太祖)의 통일 초기에 술사(術士)들의 압승(壓勝)하는 방법을 써서, 산과 물이 서로 등진 곳에 사찰(寺刹)과 사묘(祠廟) 등을 세우고서 이에 전지와 노비를 수납하고, 여기에 불상을 받들어 놓고 승려를 맞아 들이게 하고서는, 이내 〈국사(國師)와〉 같이 의논하는 승정(僧政) 제도를 세운 바 있었는데, 일찍이 공신 최응(崔凝)에게 이르기를, ‘신라(新羅) 말기에는 부처의 도(道)가 사람들에게 골수에까지 배어들었었다. 이제 삼한(三韓)이 겨우 통일되긴 하였으니 인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고 있는데, 만일 갑자기 불교를 배척하여 없앤다면 반드시 놀라고 해괴하게 여길 것이다.’ 하고, 드디어 훈계를 지어 내리기를, ‘신라가 불씨를 좋아하다가 망국에 이른 것을 마땅히 감계(鑑戒)할 일이다. 또 후대 군왕이 사사로이 원찰(願刹)을 더 짓는 것을 금한다. ’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그 사찰을 세우고 승정(僧政)을 설치한 것은, 압승(壓勝) 진복(鎭服)하여 민심을 수습하려는 술책에 불과할 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훨씬 내려와 후세에 와서는 불도를 숭상 신봉하여 승선(僧選)·승직(僧職)의 법이 세상에 성행하게 됨에 따라, 명예와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앞을 다투어 각 사찰의 주지(住持)를 희망하여, 전토의 조세와 노비의 공납을 사용(私用)으로 하여, 불의의 일을 자행하여 온 것은 그 유래가 오래인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조(盛朝)에 와서는 성인과 성인이 서로 계승하시면서 점차 이를 제거해 다스리시와, 이미 사찰을 감하시고 또 전정(田丁)을 삭제하시는 등 승도들에 대한 금령이 법전에 명문화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우리 전하께 미쳐서는 선대왕의 뜻을 준수하시와, 6개 종파를 합하여 2개 종파로 하시고, 사설 사찰을 혁파하여 학당을 만드시며, 토지와 노비를 모두 공가(公家)로 귀속시키는 등, 그 줄이고 삭제해서 없애심이 참으로 전고에 일찍이 듣지 못하던 바입니다. 유독 승선(僧選)·승전의 법만은 아직도 구습을 그대로 좇으시와, 승직(僧職)을 서경(署經)하는 대간은 조관의 예와 방불하게 하고, 또 자(子)·오(午)·묘(卯)·유(酉)년에는 으레 승선을 실시하여, 선비를 선발하는 규례와 비견할 만한 것은, 이는 전조(前朝)의 낡은 법이 오늘까지도 다 혁파되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은 생각하옵건대, 군신의 분수가 있은 연후에 작명을 내릴 수 있을 것이요, 관작이란 인군이 신하를 대우하기 위해 명칭 지은 하나의 그릇이라, 이를 함부로 이류(異類)들에게 베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저 승도들이란 어버이를 하직하고 집을 나왔으니 부자의 은의를 끊어버렸고, 돈을 바치고 정역(丁役)을 면제 받았은즉 군신의 의(義)를 끊은 것으로서, 이는 천리(天理)를 어기고 인륜(人倫)을 외면한 자들입니다. 어찌 저 조관의 반열에 비견하여 재예를 시험하여 작명을 주게 함으로써, 이단의 무리들로 하여금 전주(銓注)하는 중간에 끼게 한 단 말씀입니까. 국가에 아무 보익도 없이 치도(治道)에 누(累)만 끼치는 것으로서 이 같은 것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이 이 무리들이 그 스승의 말을 배반하고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여 이를 바라고 분주하면서, 얻기 전에는 얻기 위해 초조하고, 얻은 뒤에는 잃을까 근심하는 도가 속류(俗流)보다도 심함이 있습니다. 그 청정(淸淨)하고 과욕(寡欲)하는 교리와 세상을 떠나 모든 속연(俗緣)을 끊는다는 본래의 뜻으로 볼 때 어찌되겠습니까. 간혹 지계(持戒)하는 승려들이 있으면, 이를 보고 명리(名利)를 좇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천히 보기도 합니다. 그러하다면 승도들의 직위를 두는 것이란 한갓 밝은 시대의 거룩한 법전에 누만 될 뿐이 아니요, 또한 부처의 교리에도 위배됨이 있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저 삼대(三代)에서 관직을 설치한 정전(正典)을 본받으시고 전조(前朝)에서 그 시초에 막지 못한 적패(積弊)를 경계하시와, 승선·승직의 법을 혁파하시고 서울 밖에 있는 모든 사찰에 나이 높은 자를 택하여, 이를 한 절의 어른으로 삼아서 한 사찰의 일을 주간하게 하옵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82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53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역사-전사(前史) / 정론-정론(政論)

○辛卯/司諫院上疏曰:

臣等竊惟僧徒之政, 古無其制, 而非所以治天下國家之道也。 高麗 太祖統一之初, 以術士壓勝之道, 山水背處, 營建寺社, 納田與奴, 安佛迎僧, 乃立共議之政, 而嘗謂功臣崔凝曰: "新羅之季, 佛氏之道, 入人骨髓, 今三韓甫一, 人心未安。 若遽去佛, 必致驚駭。" 乃作訓曰: "宜鑑新羅之好佛以底於亡, 又禁後代君王私作裨補願刹。" 以此觀之, 則其所以營寺社設僧政者, 不越乎壓勝鎭服, 收合人心之術而已。 降及後世, 崇信佛道, 僧選僧職之法, 盛行于世, 而貪名慕利之徒, 爭望諸寺住持, 土田之租、奴婢之貢, 以爲私用, 恣行不義, 其來久矣。 惟我盛朝, 聖聖相承, 漸次除治, 旣減寺社, 又削田丁, 僧徒禁令, 載在令甲。 逮我殿下, 遹追先志, 合六宗爲二宗, 革私刹爲學堂, 土田臧獲, 悉屬公家, 其所以芟夷剪除之者, 眞曠古所未聞也。 獨於僧選之擧、僧政之法, 尙循舊習, 僧職署經臺諫, 髣髴乎朝官之例, 又於子午卯酉, 例擧僧選, 侔擬乎取士之規, 豈非前朝之弊法, 未盡革於今日者乎? 臣等以謂有君臣之分, 然後有爵命之加。 官爵, 人君所以待臣下之名器, 不容濫施於異類。 惟彼緇徒辭親出家, 則割父子之恩; 納錢免丁, 則絶君臣之義, 違天理外人倫者也。 豈宜比諸朝列, 選其才而授以爵命, 以異端之徒雜於銓注之間乎? 無補於國家, 有累於治道, 莫此若也, 而況此輩背其師說, 惟利是求, 希望奔走, 患得患失, 甚於俗流, 其於淸淨寡欲之敎、離世絶俗之意何如哉? 間有持戒之僧, 視此指爲名利而賤之也。 然則僧徒有職, 非惟有累於明時之盛典, 抑亦有違於佛氏之敎也。 伏望殿下鑑三代設官之正典, 戒前朝濫觴之積弊, 革罷僧選僧職之法, 其於京外諸寺, 擇年高者, 以爲一寺之長, 俾幹一寺之事。

不允。


  • 【태백산사고본】 26책 82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53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역사-전사(前史)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