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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 5월 27일 경술 5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이순몽이 유이민 방지를 위한 호패법 재시행 등을 아뢰다

판중추원사 이순몽(李順蒙)이 상언(上言)하기를,

"오늘날 평민과 공·사간의 노예 등의 무리들이 서로 전전해 유이(流移)하고 있어, 백성은 일정한 산업이 없고 놀고 먹는 무리만이 날로 증가하여, 혹은 악질 분자와 결당해 도적질을 하기도 하고, 혹 잡된 놀이를 일삼아 인민의 재물을 좀먹고, 심지어 근일에 와서는 천한 무리들이 몰래 양민의 집 여자를 간통하곤 하옵는데, 신은 이 모두가 이로 말미암아 생기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옵기를, 꼭 농한기에 따로 경차관(敬差官)을 파견, 이를 철저히 수색하여 그 본역(本役)으로 돌려보내게 하고, 수령을 전최(殿最)할 때에 이를 칠사(七事) 말미에 아울러 기록하여 출척(黜陟)에 증빙 참고하게 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

신은 또 생각하옵기를, 호패(號牌)의 법은 송(宋)나라 번성기의 한 양법(良法)이온데, 지난번에 혹자는 말하기를, ‘호패법은 정역(丁役)만 번거로워 민원이 생기므로 시행할 수 없다. ’고도 하오나, 신의 말씀은 나무 조각으로 패(牌)를 만드는 것이 본시 폐단될 것이 없을 뿐더러, 오늘날의 역법(役法)이라는 것은 모두 전결(田結)의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시행하고 있사온즉, 어찌 호패로 말미암아 부역이 번거로워진다 하겠습니까. 군정(軍丁)을 내는 데는 한 집에 동거하는 인정(人丁)이 비록 많더라도 두 가지 부역을 정하지 못하게 되어 있사온즉, 본시 민원이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호패법을 다시 행하게 되면 양·천(良賤)이 서로 혼동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도망하여 도적질하는 폐단도 역시 제거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바라옵건대, 다시 호패법을 시행하시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신은 생각하옵기를, 나루터나 요해지(要害地) 등 사방으로 통하는 곳에는 모두 관방(關防)을 설치하고, 역승(驛丞)으로 하여금 각기 그 관내에 엄중한 검사를 가하게 하고, 역승을 전최(殿最)하는 날, 그 유망(流亡)한 인민과 도적을 검거 포착한 수효의 다소를 고찰하여 등급을 정하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신은 듣자옵기를, 토목의 역사는 성인(聖人)도 중히 다루는 바라 하오니, 신은 원하옵건대, 만약 부득이 영선(營繕)할 것이 있다면 언제나 농한기를 이용하여 1년 내에 1, 2개소만을 영선하게 하옵시고, 그 영선에 동원되는 역부는 당번한 대장(隊長)·대부(隊副)·보충군(補充軍)을 사역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근년 이래 모든 영선에 반드시 경기 선군(京畿船軍)을 사역하고 있사온데, 선군으로 취역하는 자는 본시 경기의 빈민들입니다. 〈그들이〉 서울의 나그네 집에 기탁하여 식량·소금·간장 등을 주인집에서 꾸어 쓰고, 뒤에 이를 갖추어서 도로 반납하려면 전일 꾸어 쓴 양의 배나 되어, 심한 자는 전토·우마(牛馬) 등 가재를 팔기 일쑤이고, 또 역사의 감독으로 인한 침해로 인하여 간혹 파산 유리하는 데 이르곤 하오니 몹시 애절한 일입니다. 더욱이 선군은 외적을 방어하는 수졸(戍卒)로 아끼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온데도, 각도의 처치사(處置使)·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이 근본 대체를 돌아보지 않고서, 혹은 영전(營田)의 경작으로 인하여, 혹은 진상하기 위한 어렵(漁獵)을 빙자하는 등, 공익을 빙자하고 사리를 영위하는 폐단을 짓는 사례가 허다하오며, 탐오(貪汚)한 사람들은 댓가를 받고 우정 놓아주기도 하거니와, 혹은 사삿일로 타처로 분산해 보내곤 하는데도 처치사의 단속이 말이 아니어서 소루하기 짝이 없사오며, 비록 행대(行臺)를 파견한다 하더라도 저희들이 먼저 그의 오는 것을 엿보고는 사람을 빌려다가 점호를 대행하게 하면, 행대 역시 육지 물건과 기계(器械)의 유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기만하는 그 폐단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넘어갑니다.

지금 국가에서는 병선(兵船)에 주력하고 있사오나, 기계가 충실하지 못하여 이름만 있고 실제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신은 말씀드리옵건대, 별도로 사수색 제조(司水色提調)를 파견하여 무시로 이를 검속하게 되면, 수비를 맡은 관리들이 상시 이에 경계 대비하여 기계가 훨씬 정밀 예리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강화(江華) 정포(井浦)에 가서 배 한 척에 단지 취로(取露) 1명과 감고(監考) 1명이 있음을 보고, 신이 그 군사가 적은 연유를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모두들 각처 육지 역사에 나갔다. ’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하에〉 혹시 의외의 변이라도 있게 되면 진실로 온당하지 않은 일이라 적이 두려워하였습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대소를 막론하고 영선이 있을 경우에 선군을 사역하지 말고 사졸을 아낄 것이며, 또 1년에 한 차례씩 특별히 사수색 제조를 파견하여 선척으로 순회하며 검사 고찰하게 하여 변지의 방어를 공고히 하게 하심이 어떠하오리까. 신은 또 강화(江華) 인민의 말을 듣사온즉, 〈당초〉 귤나무[橘木]를 옮겨 심은 것은 본시 잘 살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는데, 수령이 가을에는 집을 짓고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들어서 보호하고, 봄이 되면 도로 이를 파괴하여 그 폐해가 한이 없으며, 그 귤나무의 길이가 거의 10척이나 되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 쓰는 긴 나무도 준비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몹시 곤란을 겪는다 하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이것이 비록 한 군읍의 사소한 폐단이긴 하오나, 영세민의 근심거리를 진단하지 않을 수 없사와, 감히 천총(天聰)을 번독(煩瀆)하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보고 의정부에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8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47면
  • 【분류】
    재정-역(役) / 농업-과수원예(果樹園藝) / 호구-호적(戶籍) /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기(軍器) / 정론-정론(政論)

○判中樞院事李順蒙上言:

今之平民及公私賤隷之徒, 轉相流徙, 民無恒産, 而遊手日增, 或(儻)〔黨〕 惡而爲盜賊, 或雜戲以蠱民財, 以至近有賤口竊奸良家之女, 臣以爲皆因此而致也。 臣竊謂必於農隙, 別遣敬差官, 窮搜實探, 以還本役, 守令殿最之時, 竝錄七事之末, 憑考黜陟, 以爲恒式。 臣又謂號牌之法, 盛之良法。 往者或謂: "號牌之法, 丁役煩而民怨生, 不可行也。" 臣謂以木片而爲牌, 固無其弊。 今之役法, 皆以田結之多寡, 豈因號牌而役煩乎? 軍丁之出, 一家同居人丁雖多, 而毋定兩役, 則固無民怨矣。 臣謂復行號牌於今日, 則良賤不能混淆, 而流亡作賊之弊, 亦可革矣。 伏望復行號牌之法何如? 臣又謂津梁與要害四通之地, 皆設關防, 使驛丞各其掌內, 嚴加考察, 當其驛丞殿最之日, 考其流民與盜賊捕捉多小, 以爲等第何如? 臣聞土木之役, 聖人所重也。 臣願若有不得已營繕, 則每當農隙, 一年之內, 繕造一二處, 其營繕役人則役當番隊長隊副補充軍可也, 近年以來, 營繕必役京畿船軍。 船軍立役者, 本是京畿貧民, 旅托京中, 糧料鹽醬, 貸於主家, 後備還納, 倍於前貸, 甚者賣田土牛馬家財。 又因督役侵擾之苦, 或致破産流亡, 深可哀也, 而況船軍禦寇之戍卒, 不可不恤? 各道處置使萬戶千戶不顧大體, 或因營田之耕耘, 或憑進上之漁獵, 憑公營私, 作弊多端。 若貪汚之人則受直故放, 或因私事, 散送他處, 處置使檢察陵夷, 以致疏虞。 雖遣行臺, 彼先瞰其來, 倩人代點, 行臺亦未知陸物器械之具, 不識欺罔之弊也。 今國家致意兵船, 然器械不實, 名存實無者有之。 臣以謂別遣司水色提調, 無時檢察, 則守禦官吏常時戒備, 而器械精利矣。 臣嘗往江華 井浦, 見其每一船, 但有取露一人、監考一人, 臣問其軍少之故, 答曰: "皆赴諸處陸役。" 竊恐儻有不虞之變, 誠爲未便。 臣願自今以後大小營繕之時, 勿役船軍, 以撫士卒。 且每年一次特遣司水色提調, 巡船檢察, 以固邊戍何如? 臣又聞江華人民之言, 移種橘木, 本欲驗其榮枯也。 守令秋而造室築墻作堗而守護, 春而還破, 其弊無窮。 其橘之長, 幾於十尺, 故造室長木, 亦爲難備, 人甚艱之。 臣聞此言, 雖一邑小弊, 然小民之慼, 不可不陳, 敢瀆天聰。

上覽之, 下議政府。


  • 【태백산사고본】 26책 8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47면
  • 【분류】
    재정-역(役) / 농업-과수원예(果樹園藝) / 호구-호적(戶籍) /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기(軍器)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