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에게 인보법 시행 계책을 세우게 하다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이번 계문에, ‘새로 설치한 4진(四鎭)은 오랑캐들과 섞여 살게 되어서, 저 오랑캐에게 투탁(投托)하는 것과 포로되어 가는 것이 모두 염려스러우므로, 금방(禁防)하기를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보법(隣保法)에 의하여 10호(戶)마다 한 통주(統主)를 두고, 50호에 한 두목(頭目)을 두고, 1백 호에 한 총패(摠牌)를 두어서, 남녀노소를 다 문적에 기록하여 수령이 때없이 점고하며, 먼 곳에 출입하는 자는 반드시 관청 문서를 받은 다음에 가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이것을 대신에게 논의하도록 하였더니, 황희는, ‘이 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감사와 도절제사가 함께 논의하여 계달하였으니, 어찌 한 도의 이해를 모르고 한 말이겠습니까. 다만 민심을 소동시킬까 두렵습니다. 만약 인보법을 시행하려고 한다면, 별도로 민심을 소동하지 말게 하는 방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고, 이맹균은, ‘계달한 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고, 신개는, ‘마땅히 딴 방법으로 금단할 것이고 인보하는 법은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여서, 의논이 통일되지 않았다. 지난 4월에 경 등의 서계(書啓) 가운데에, ‘변경 백성의 수효는 문적이 없어서 상고할 수 없으면, 혹 저 적에게 죽거나 사로잡히는 것과, 혹 남모르게 저 사람들을 따라가는 것과, 혹 이웃 고을에 도망해 간 것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판적(版籍)한다는 명목으로써 불시에 추쇄한다면 민심은 반드시 싫어하여서 장차 소동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보에 들어갈 때에 그곳 수령에게 그 백성들의 성명과 연령을 기록하게 하고, 보의 천호와 백호에게도 한 책에 별도로 기록시킨 다음에 비밀히 갈무리한다면, 어찌 판적한다는 것을 미리 요량하고 감히 의심하는 생각을 내겠습니까. 단연히 소동하는 폐단도 없이 그 숫자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또 인보법에 의하여 남녀노소를 다 판적에 기록하고자 하니, 전후에 계달한 것이 어찌 서로 어긋나는가. 이번에 계달한 것은, 경 등이 반드시 민심의 향배(向背)와 일을 할 수 있는 형편을 환하게 보고서 계달한 것이리라. 거년 9월에 경원 백성이 많이 피살당하거나 포로당했으나 국가에서는 알지 못하였는데, 끝내 숨기지 못하여서 수령이 죄를 받았었다. 또 안말을건(安末乙巾) 무리와 같이 저편에 망명 투탁한 자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고읍동개(古邑同介)는 이웃 경계에 가까이 있으면서, 항상 왕래하며 인민을 강제로 잡아다가 제집에서 사역시켜도 변장은 모두 모르고 있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고 판적하는 법을 시행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4진 백성에게 이 뜻을 알려서 인보법을 시행할 것이다. 경 등이 계달한 바와 같이 한다면, 백성은 모두, ‘국가에서 인보법을 시행하는 것은, 이 앞서 포로당하고 저쪽으로 투탁한 자가 상당히 많았으나 국가에서 알 수 없었던 까닭으로, 판적을 만들어서 백성들의 출입과 유무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고, 본래부터 요역과는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고 생각할 것이다. 이와 같으면 민심은 반드시 소동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출입하는 데에 반드시 관청 문서를 받도록 하는 것은 민심을 불안하게 할까 나는 염려된다. 경 등은 다시 이로운가 해로운가를 잘 생각하여 계달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79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20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호구-호구(戶口)
○傳旨咸吉道都節制使:
今啓: "新設四鎭, 與胡虜雜處, 投彼虜去, 皆爲可慮, 禁防不可不嚴。 依隣保法, 每十戶爲一統主, 五十戶爲一頭目, 百戶爲一摠牌, 老少男女, 盡錄于籍, 守令無時點考。 其遠處出入者, 須受官文乃行。" 卽令大臣議之。 黃喜曰: "此事誠難, 然監司、都節制使同議以啓, 豈不知一道之利害乎? 但恐搔動民心耳。 若行隣保之法, 則亦當別有勿令搔動之術矣。" 李孟畇曰: "依所啓施行可也。" 申槪曰: "當以他術禁之耳, 隣保之法則不可行也。" 議論不一。 去四月, 卿等書內: "邊極民數, 無籍可考, 則或被彼賊之殺擄, 或潛從彼人, 或逃往隣境, 皆不可得而知之, 然名爲版籍, 而非時推刷, 則民心必厭, 將有搔動之弊。 若當入保之時, 令其守令記其姓名年歲, 取保千戶百戶, 別紀一本密藏, 則豈肯逆料其版籍, 敢生疑慮乎? 斷無搔動之弊, 而可得其數。" 今又欲依隣保之法, 老少男女, 盡錄于籍, 何前後所啓之相違乎? 今之所啓, 必是卿等灼見民心之向背、事爲之可成而啓之也。 去年九月, 慶源之民, 多被殺擄, 而國家不知, 終不隱諱, 守令得罪, 又如安末乙巾等輩亡命投彼者頗多。 古邑同介近在隣境, 常時往來, 刦執人口, 役使于家, 而邊將皆不知之。 此無他, 版籍之法不行也。 令四鎭之民共知此意而行隣保之法如卿等所啓, 則民皆以爲國家行隣保之法者, 以前此被擄投彼者頗多, 而國家不知, 故欲成版籍以察人民之出入有無也, 固無與於徭役也。 如此則民心不必搔動矣, 但出入須受官文, 予恐民心之未安也, 卿等更加熟思利害以啓。
- 【태백산사고본】 25책 79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20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호구-호구(戶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