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길도 도절제사에게 변방 방어책을 전지하다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옛부터 장수된 자의 도리는 반드시 들판에서 교전(交戰)하여 승부를 결단하는 것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상대편과 우리편 군사의 많고 적음을 요량하여서, 아군에게 만전(萬全)한 형세가 없으면 성을 굳게 지키고 들을 말끔히 치워서, 적에게 소득이 없게 하여 후일에 침략하는 후환을 막는 것이 옳다. 옛적에 삼랑강(參狼羌)이 침입하였을 때에 한(漢) 광무제(光武帝)는 변경 관리에게 조서(詔書)하여, 〈적과 대전했을 때에〉 머뭇거리면서 진군하지 않다가 죄받는 법에 구애되지 말라고 하였고, 유무주(劉武周)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당 태종은 무리들에게 해자를 깊이 파고 성을 높이도록 명령하여 적의 예봉을 꺾었다. 이 두 임금은 수많은 싸움을 겪었건만 그 계책이 오히려 이와 같았다. 그 싸우기를 좋아하는 것이 해됨을 알 수 있다. 제갈양(諸葛亮)이 사마의(司馬懿)와 위수 남쪽에서 대진(對陳)했을 때에 양이 여자의 의관[巾幗]을 보내어 〈여자처럼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욕했으나, 의는 끝내 경솔하게 나오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하는 말들은 ‘양은 속전(速戰)하고자 하였으나 의는 고의적으로 자중하여, 그 성공과 실패가 이와 같았다. ’고 하였다. 양은 세상에 드문 재주였으나 마침내 사마의 때문에 불리(不利)하였으니, 그 속전하는 것이 해됨을 또한 알 수 있다. 지금 홀라온·수빈강·파저강의 적들은 국경 가깝게 거주하면서 해마다 침범한다. 논의하는 사람은 비록 많으나 그 요점은 공격이냐 수비냐 두 가지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수비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깊이 알고, 적이 올 때에는 성을 굳게 지키고 들을 말끔히 치우도록 하라는 교지를 여러 차례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봉행(奉行)하는 자는 나의 뜻을 본받지 않아서 조명간(趙明干) 백성이 매양 노략질을 당했고, 신진보(辛晉保) 등이 경솔하게 출전하였다가 패하였다. 그 수비하기를 엄하게 하지 않았음이 이와 같았다. 옛날에 이목(李牧)이 안문군(雁門郡)에 있으면서, 장수와 군졸을 잘 먹이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습시키고, 봉화(烽火)를 삼가하며 간첩을 많이 이용하고, ‘적이 오거든 곧 보(保)126) 에 들어오라. 감히 포로되었던 자는 참한다. ’고 약속하였다. 흉노(匈奴)가 이목을 비겁하다고 하니, 조왕이 노하여 다른 사람을 장수로 교대해서 보냈다. 흉노가 침입해 올 때마다 나가 싸웠으나 번번이 불리하였고 군사와 군기를 잃은 것이 많았다. 조왕이 다시 목을 억지로 불러서 장수로 삼으니, 목은 옛날의 약속한 대로 하여, 변방 사졸이 모두 일전(一戰)하기를 원하였다. 이리하여 목이 흉노 10여만 기를 격파하였고, 이후부터 10여 년은 적이 감히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그 밖에도 굳게 지키는 이로움과 적을 가볍게 여기다가 해받은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이런 것으로써 본다면, 변경을 지키는 계책은 봉화를 조심해서 지키고 척후를 놓으며, 적이 올 때에는 미리 보(堡)에 거두어 들이고 조심해서 굳게 지키는 것보다 나은 계책이 없다. 만약 적의 강약도 요량하지 않고 천하에 능히 당할 자가 없다 하여, 일시에 결전하고자 하였다고 조괄(趙括)과 같이 실패하면 그 해가 작지 아니하는 까닭에, 굳게 지키는 방책을 거듭 밝혀서 조목을 다음에 열기(列記)하니, 경은 변장에게 유시하여 나의 지극한 생각을 본받도록 하라.
1. 이적(夷狄)을 대비하는 요점은 변경을 엄하게 수비하는 데에 불과할 뿐이다. 한·당 시대 훌륭한 장수들의 적을 방어하는 방책이 사서에 기재되어 있어서, 환하게 상고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일로써 말하더라도, 달단(韃靼)이 국경을 침범하여 바로 요동성 밑에까지 밀어닥쳐 왔었다. 요동성을 지키는 장수는 10만 군병이 있었지만 경솔하게 나가서 싸우지 않았는데, 용병하는 데에 따른 이해에 대하여 매우 주견(主見)이 없다고 하겠다. 만약 우리에게 만승(萬勝)의 세가 있고 적이 반드시 패(敗)할 형세이라면, 문 앞의 적들을 제어(制御)하지 아니할 수 없으나, 신진보 같은 자는 고군(孤軍)으로 구원군(救援軍)도 없이 국경 너머로 뒤쫓아 달렸으니, 비록 한나라 위청·곽거병과 같은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진실로 나의 바라는 바가 아니다. 하물며 사졸이 사상(死傷)하고 들판에 피를 뿌리게 되어서, 이적에게 업신여김을 받음이겠는가. 오직 성보(城堡)를 조심해 지켜서 적이 비록 도전해 오더라도 경솔하게 나가지 말고, 만전의 형세를 기다리도록 하라.
1. 보(堡)에 거두어 들이는 것도 또한 이적을 대비하는 좋은 방책이다. 적이 올 때에는 미리 급작스레 보에 거두어 들이고, 들을 말끔히 치운 다음에 적을 기다려서 적에게 이득이 없게 하면, 험하고 막힌 산과 냇물에 여러 날을 치달려도 한갓 고단하게 될 뿐이며, 이리 같은 적들의 후일 욕심을 막기에도 족할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매년 가을철을 당하면 수확기를 독촉하고 아울러 보에 가두어 들이는 것은 영(令)이 엄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저들이 매양 침입해 올 때에는 같은 부류 중에서 미리 알려 주는 것인즉, 침략하는 시기를 몰랐던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거년 경원(慶源)에서 적에게 죽임을 당하고 포로된 자가 거의 2백 명이나 되었고, 또 근년에 여연 백성이 매양 노략질을 당함이 앞뒤 잇달아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것은 딴 연고가 아니고 전적으로 주장이 조심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는 보에 거두어 들이는 영을 거듭 엄하게 하여서, 농사철에는 병졸이 농군을 호위하고 얼음이 얼 때에는 아울러 보에 거두어 들여서, 저들로 하여금 몰래 개와 쥐처럼 침범하는 계략이 없어지게 하라.
1. 척후를 조심해서 함은 병가(兵家)의 요긴한 일이다. 정불식(程不識)은 행군할 때에는 반드시 척후를 앞세워야 한다. 조충국(趙充國)이 서강(西羗)을 토벌할 때에 또한 척후하는 것을 힘썼다. 만약 척후하는 것을 조심해서 하지 않으면 바로 성 밑에까지 와도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게 된다. 오 원제(吳元濟)가 멸망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금 연대(煙臺)를 설치한 것도 척후를 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 5월에 적이 조명간(趙明干)을 침범했을 때에 연대를 지키는 자가 적이 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변장으로서 척후하는 것을 조심해서 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지금부터는 척후하기를 조심해서 하여, 적이 오는 것을 미리 알게 하여서 우리 편이 수비할 수 있게 하라.
1. 옛부터 성곽은 비록 견고하다 하더라도 조심해서 지키지 않으면, 적은 평탄한 길처럼 성을 넘어오게 된다. 이소(李愬)가 채주성(蔡州城)을 함락시킨 것이 이런 경우이다. 옛날 장군은 비록 초야를 행군하더라도 정지하게 되면, 반드시 진영(陳營)을 굳게 하고 조두를 치게 하여 야경(夜警)에 대비하게 하였으니, 그 염려하는 것이 주밀하기가 이와 같았다. 이제부터는 연변 여러 장수는 순찰하는 것을 거듭 엄하게 하며 허술함이 없도록 하여, 뜻밖의 변고를 방비하도록 하라. 연변 수령과 여러 장수는 위에 말한 조건을 판자에다 적어서 방을 만들어 걸어 놓고, 항상 살펴서 변고에 대응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79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18면
- 【분류】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외교-야(野)
- [註 126]보(保) : 보(堡).
○傳旨咸吉道都節制使:
自古爲將之道, 非必交鋒原野而決勝負之爲貴也。 度彼我之衆寡, 而我無萬全之勢, 則堅壁淸野, 使賊無所得, 以沮後日侵陵之患可矣。 昔參狼羌之寇, 漢 光武詔邊吏不拘以逗留法; 劉武周之反, 唐 太宗令衆深璧高壘, 以挫其鋒。 此二君身經百戰之餘, 而其策尙如此, 其好戰之爲害, 可知已。 諸葛亮之與司馬懿對壘渭南也, 亮雖辱以巾幗, 而懿終不輕出, 古今以爲: ‘亮欲速戰, 懿故持重, 其成敗至於如此。" 亮爲間世之才也, 終不利於司馬懿, 其速戰之害, 亦可知也。 今忽剌溫、愁濱、波猪之賊, 住居隣境, 連歲犯邊, 議者雖衆, 其要不越乎曰攻曰守而已。 然予深知守禦之利, 當賊之來, 堅壁淸野, 累次有旨矣, 而奉行者不體予意, 趙明干之民, 每被擄掠, 辛晋保之輩, 輕出致敗, 其守之不能嚴也如此。 昔李牧居鴈門郡, 饗士卒習騎射、謹烽火、多間諜, 約曰: "寇至, 卽入收保, 有敢捕虜者斬。" 匈奴以爲怯, 趙王怒, 使他人代將, 虜來每出戰, 輒不利, 所失亡多, 趙王乃復强起牧爲將, 牧如故約, 邊士皆願一戰。 於是牧破殺匈奴十餘萬騎, 自是虜不敢犯邊, 殆十餘年。 其他固守之利、輕敵之害, 不可勝紀。 以是觀之, 守邊之策, 莫若謹烽火、行斥候, 當賊來時, 預先收保謹愼固守之爲愈也。 若不料彼敵之强弱, 以爲天下莫能當, 徒欲決戰於一時如趙括之致敗, 其害不小矣。 故申明固守之策, 條列于後, 卿其諭邊將, 體予至懷。
一, 待夷狄之要, 不過嚴備邊而已。 漢、唐賢將禦寇之策, 載在簡編, 昭昭可考。 以今日中國之事言之, 韃靼犯境, 直抵遼東城下, 遼東守將以十萬之兵, 不敢輕出與戰者, 甚有見乎用兵之利害也。 若我有萬勝之勢, 彼有必敗之形, 則門庭之寇, 不可不制也。 如辛晋保者, 孤軍無救, 追奔境外, 雖有如漢家衛、霍之所爲, 固所予之非望, 況士卒死傷, 蹀血原野, 以受侮於夷狄乎? 莫如謹守城堡, 虜雖挑戰, 毋得輕出, 以待萬全之勢。
一, 收保亦待夷狄之良策也。 當寇之至, 預輒收保淸野以待, 使賊無所利, 則險阻山川, 累日驅馳, 徒爲(彼)〔疲〕 弊, 足以沮豺狼他日之欲矣。 我國家每當秋後, 督令收穫, 竝皆收保, 則令非不嚴也; 彼每當侵掠之時, 同類者預告, 則我非不知侵掠之期也。 然去年之於慶源, 被殺虜者幾乎二百, 比年以來, 閭延之民, 每被擄掠, 前後相繼。 此無他, 專是主將不謹之所致也。 自今申嚴收保之令, 耕種之時則兵卒衛護, 氷合之時則竝收入保, 使彼潛消狗鼠之計。
一, 謹斥候, 兵家之要務也。 程不識行軍, 必以斥候爲先; 趙充國討西羗, 亦以斥候爲務, 若不謹候望, 則賊至城下, 無一人知者, 如吳 元濟之見滅是已。 今烟臺之設, 所以備候望也。 去五月賊侵趙明干, 守烟臺者不知賊來, 邊將之不謹候望如此。 自今謹愼候望, 預知賊來, 使我得以備禦。
一, 自古城郭雖堅, 不謹守禦, 則賊之踰城如坦途然, 李愬之滅蔡州城是已。 古之將軍, 雖行師草野, 止必堅營, 擊刁斗以備夜警, 其慮之周密如此。 自今沿邊諸將申嚴巡更, 毋得緩弛, 以防不虞。 上項條件, 令沿邊守令諸將掛板牓, 常常看審應變。
- 【태백산사고본】 25책 79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18면
- 【분류】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외교-야(野)